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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뀌다 : 나의 침묵

엉덩이로 악수하는 우주평화를 꿈꾸며

by 하루오

내 몸에 축적된, 나도 모르는 몸의 진실이 뽀오옹, 폭로된다. 혼자 있을 때만 거창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내장의 솔직한 증언은 나조차 알아들을 수 없다. 그저 개운할 뿐이다. 소리가 크고 길수록 타격감은 배가 된다. 소리와 냄새, 이중기표는 동시에 관측되지 않는다. 냄새보다 소리가 먼저다. 소리의 파동은 내 의지로 조절 가능하지만 냄새 입자는 무작위다. 입자보다 파동이 먼저일 수 있다면, 빅뱅을 우주 방귀로 상상한다. 우주가 고요한 이유는 방귀적 파동이 먼저 퍼지고, 입자가 파동의 궤적을 좇고 있기 때문이다. 파동과 입자 사이의 틈에 나는 우주의 무작위적 침묵처럼 잠깐 존재한다. 기표처럼 보이지만, 기의는 없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좇아온 입자에 저격당하면 나는 우주의 방귀를 완성하며 소멸할 것이다. 방귀는 몸으로 된 무의미가 찍는 말줄임표다.


굳이 기의를 찾자면 똥이다. 인간은 고귀하지 않다. 생명도 귀하지 않다. 하나뿐이라고들 하지만, 이 똥과 저 똥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인간의 일생은 5톤 안팎의 똥으로 결산된다. 쌓여가는 똥덩어리를 존중해 달라는 요청은 오만하고, 사랑해 달라는 구걸은 가련하다. 치워져야 타당하지만 아둥바둥 버텨서 삶이다. 소리와 냄새를 숨긴 채 부드럽고 따끈따끈한 살덩어리를 주장한다. 주장이 강할수록, 뱃속에 꾸륵꾸륵 가스가 차오른다. 똥의 전조이자 잔여, 더부룩해진 양심은 배출하지 않고는 별 수 없다. 그러나 참을 때, 나는 최선을 다하는 거짓말이다. 고해성사의 순간을 베토벤은 꽝, 꽝, 꽝, 꽝- ‘운명’에 담았다. 방귀 직후, 몸 안에서 ‘합창’이 퍼진다. 그 순간, 삶은 죽음이 뀐 한 방 방귀여도 좋았다. 팬티 안이 뜨끈해진다.


방귀는 죽음이 삶에 침투한 흔적이다. 생의 강력한 증거이나 드러내면 안 되는 몸의 실재다. 소리와 냄새를 드러내는 일은 사냥 성공률을 떨어뜨리고 천적을 불러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방 갈길 때, 항문에서 퍼진 몸의 실재감이 우주와 소통하며 나는, 생생하다. 방귀는 실존하는 무로서 탄생과 죽음 사이의 무한을 상상케 한다. 0과 1 사이도, 0과 100 사이도, 무한의 크기는 같다. 무한한 고요는 크기를 잴 수 없을 텐데, 굳이 하루 평균 14회, 0.5~2.5L어치의 묵비권이 과시된다. 삶이 죽음에 불어 넣는 호흡이든, 죽음이 삶에 불어 넣는 호흡이든 상관없다. 방귀의 기의는 삶과 죽음을 공회전한다. 하찮은 진실의 순간, 나조차도 숨을 참는다. 인간은 고작, 그렇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신기하다. 똥과 밀착해 있다가 같은 출구에서 같은 방식으로 분출되면서 늘 똥과 분리된다. 괄약근이 창조한 기적이다. 똥구멍은 조물주의 얼굴일지도 모른다. 설사병이 나더라도, 방귀는 독립적으로 실재한다. 심지어 구린내를 풍기지 않을 때, 방귀는 더이상 똥이 되지 못한 미완의 기체가 아니라, 절대 방귀다. 자신이 아닌 것과 타협하지 않는 순수성은 고고하다. 방귀 같은 의지, 방귀 같은 진실, 그리고 방귀만도 못한 내가 있다. 나는 똥냄새를 풍기지 않을 자신 없다.


롱패딩을 입고 있을 때는 주의해야 한다. 패딩에 갇혀 밀도 높은 냄새가 오롯이 얼굴로 올라온다. 인간은 자신의 속사정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나약하다. 속사정이 퍼지도록 섶을 열거나 허리 아래를 들어 올린다. 그 외에는 수시로 붕붕댄다. 길을 갈 때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방귀를 뿌릴 때는 조금 신났다. 방귀는 추진력이었다. 그곳에 냄새는 퍼져 없어질 것이고, 나는 앞으로 나아가 그 자리에 없다. 사라지는 방귀의 숙명은 인생의 압축판이다. 나는 방귀 같은 주체로 자아를 쏘아 올리는 중이다. 아브락사스, 그 방귀 같은 소리에 내 냄새는 잘 묻지 않는다.


양배추를 많이 먹으면 똥은 황금빛으로 건강해지지만 방귀는 감당되지 않았다. 가스량이 많아 피시식 새는 법 없이, 방 안에서만큼은 빵, 빵, 씩씩했다. 지방이 연소되는 중이라고 믿어서 방귀 뀔 때마다 위풍당당했다. 살이 빠지는 아름다운 멜로디는 냄새도 나지 않았다. 고포드맵이 뭔지도 모를 때였다. 사실은 장에서 식이섬유를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 것이었다. 필라테스 할 때마다 몸을 접거나 강사가 배를 누를 때 방귀를 참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강사는 자꾸 배에 힘 주라고 했지만, ‘정말 힘주는 게 뭔지 보여줘?’, 참았다. 우리 모두를 위해 정정당당한 곤혹이었다. 힘을 주며 괄약근을 조였다. 필라테스는 괄약근 전문 운동이던가, 내 거짓말은 숭고했다.


내 방귀 소리를 타인이 들으면 나는 끝장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방귀는 기표 없는 기의다. 100m 달리기 출발 전이든, 노래 중이든, 맞선 중이든, 심지어 자고 있든, 방귀는 모든 상황을 벗겨내어, 나는 별안간 맨몸이다. 사람들이 모른 척해줘도 오직 방귀다. BTS도, 트럼프도, 김정은도, 사람들 앞에서 방귀를 뀌는 순간 그냥 방귀다. 웃음이 들끓든, 정적이 찾아오든, ‘I am Iron-man, 뿡’이면 멘붕이다. 모든 맥락을 먼지로 날려버리고 수치심만 남긴다. 방귀를 품고 살지만, 방귀는 결코 있어서 안 되기에 방귀야말로 완전한 침묵이다. 존재를 못 이기는 부재의 노래는 침묵을 휩싸고 돈다. 방귀의 순간, 님은 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면, 그 섬엔 방귀의 기갈이 가득할 것이다. 인간은 타인의 진실을 감당할 만한 유머를 갖지 못해서 각자의 섬에서 표류한다. 출발하지 못하는 뱃고동 소리가 각자의 팬티 속에서만 우렁차다. 인류가 악수대신 맨엉덩이를 맞대고 동시에 방귀를 뀐다면, 세상은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나는 고작 그런 인간’이라는 겸손이 생생해질 테니까. 사랑 받기 태어났다며 미소 짓는 얼굴에 방귀를 먹여 주고 싶다. 태어나서, 적당히 방귀나 뀌고, 방귀를 나누며 죽으면 그만이다. 내가 들은 마지막 방귀소리가 내 것이라서, 나는 무의 기표다.


당신의 얼굴에서 당신의 방귀 소리를 들어 본다. 당신이 하찮아서 조금은 사랑스러워 보인다. 냄새가 좀 나겠지만, 그 섬에 가고 싶다. 어차피 내 냄새도 만만찮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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