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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하다 : 목욕의 왜곡된 약식 제의

이게 다 코로나 때문이다

by 하루오

샤워하는 데 30분쯤 걸린다. 그 이상 걸릴 때도 많다. 사실은 7-8분이면 충분할 일이, 해야지, 해야지, 아, 귀찮다. 인터넷에서 가십거리를 뒤적대거나 관심도 없는 유튜브를 본다. ‘씻다’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재생을 의미한다면 나는 태어나기 번거로운 무(無)의 상징이다. 유교에서 예의 시작이라면 나는 내게 퍽, 예의 없다. 애초에 태어나기를 강제한 게 무례였다. 내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나는 굳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태어나버려 말끔하고 반듯하게, 성가셔 죽겠다.


나는 밤 샤워를 선호한다. 일과를 마치고 오면 씻어야 한다. 위생 이상의 자의식 감각이다. 하루종일 누적된 먼지와 노폐물을 씻어내는 건 나 자신에 대한 합리적 예의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나오면 체온 하강으로 몸이 수면 리듬을 만들어 낸다. 무엇보다 바깥의 이물질이 내 몸을 타고 내 공간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 내 정답에 타협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더, 귀찮을 뿐이다.


아침 샤워는 오답이다. 타인에게 매달린 자의식 감각이다. 이미 눈을 떴을 때 재생은 실현되었다. 차라리 샤워 시간만큼 스트레칭으로 몸에 활동 리듬을 만드는 것이 이롭다. 밤새 흘린 노폐물을 씻어야 한다는 변명은 그럴 듯하다. 그러나 출근 시간에 쫓겨 뭉그적댈 자유를 박탈당한 습관일 뿐이다. 아침 샤워는 타인에게 샴푸향, 바디워시향을 건넬 예의가 아니라 제물을 준비하는 체념이다.


두 번 샤워는 노답이다. 성과사회의 신경증적 병리다. 씻지 않으면 더럽다는 생각이 아니라, 씻지 않으면 뭔가 잘못될 것 같다는 불확실한 공포에 휩싸이므로 강박이다. 땀이 나기도 전에 향기를 덧입히고, 누군가에게 불쾌하지 않은 존재로 보이려는 의도로 샤워를 반복하므로 히스테리다. 출근 시간에 맞춰 자기 점검을 반복하고, 씻지 않은 얼굴로는 세상에 나가길 주저하므로 불안장애다. 몸은 살아 있음을 타인에게 증명하는 포장지로 전락했다. 문명에 과잉 순응한 증상인 것이다. 깨끗하고, 깨끗해지면, 지워진다.


찬물 샤워에서 해답을 찾았다. 아침에는 비누 없이 찬물로 샤워한다.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부정성이 쏟아진다. 숨이 들이켜지고, 등은 움츠러들고, 비명을 닮은 신음이 기어이 샌다. 그래서 몸은 긍정하기 위해 열을 낸다. 도파민은 최대 250% 증가시킨다. 숏콘텐츠가 생성하는 150%보다 농밀하고 무해한 쾌감으로 생이 폭발한다. 향기는 없다. 뭉개져 있던 감각만 직립한다. 욕실을 나올 때, 나는 원시에서 걸어나오는 새것이다. 체온이 상승하며 활력이 전신으로 퍼진다. 나도 이랬으면 좋겠지만, 찬물은 차갑다.


역시, 따뜻한 물이 좋다. 양수가 그랬다. 수압이 부드럽게 살갗을 쓰다듬으면 물아일체는 내 것이다. 근육이 풀리고, 숨이 고르고, 마음이 묽어진다. 태어나기 전에 나를 감쌌던 온도, 박동, 출렁임의 온기가 다시 나를 감싼다. 옆구리, 사타구니, 장단지, 내 손길이 닿을 일 없는 부위까지, 내가 내 몸을 만진다. 나는 몽글몽글 거품으로 촉각되고, 촉각한다. 거품 안쪽의 윤곽은 물로 된 몸체다. 내가 안전하게 은폐되었다는 실감, 이물질이 제거되며 순수해진다는 자각은 38도쯤에서 안온하다.


샤워는 현대적 감각이다. 목욕의 왜곡된 약식 의례다. 목욕은 진짜로 양수로 회귀하듯 물에 잠기는 일이다. 몸이 물속에 스며들고, 물이 몸속에 스며들어 손발이 쪼글쪼글해진다. 서 있지 않아도 되는 감각으로, 나는 나를 입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내게서 허락받는다. 물이 흐르지 않고 멈춰 있어서, 물 속의 나도 멈춘다. 나를 부력 속으로 풀어헤친다. 느림과 고요가 찻물처럼 우러난다. 멈출 수 있는 시간 감각은 녹차, 혹은 국화차 맛이다. 목욕이 만든 물리적 경계는 온전한 휴식이다. 시간에 마침표를 찍는다.


샤워는 목욕의 껍데기만 둘렀다. 물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물아일체는 물줄기의 속도로 조직된 환각이다. 그 속도를 반드시 서서 대면해야 한다. 회복이 아니라 속도의 재정비다. 커피처럼 감정을 진정시키는 대신 집중을 조율한다. 결코 시간은 멈춰지지 않는다. 커피를 삼키며 시간을 밀어붙이는 일이 내 것이다. 샤워가 끝나면 다음 나를 입게 될 것을 안다. 샤워가 만든 물리적 경계는 휴식이 아니라 역할 교체다. 우려내던 감각은 뽑아쓰는 기능으로 전락했다. 시간에 쉼표를 찍는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목욕탕에 간 적 없다. 샤워는 어쩔 수 없이 두꺼워진 습관이다. 속도를 따라 가느라 나는 시간이 비좁다. 간혹 출근이 귀찮아 퇴근하지도 않았다. 그냥 공부방에서 샤워하고 잤다. 샤워하고 나오면 공부방은 침실로 변했지만, 수면제로 강제된 잠은 내일을 위한 정비일 뿐이다. 2박 3일, 나는 유능한 선생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하고 나면, 나는 하루오다. 시간을 나눠 쓰기 벅차서 목욕이 필요하다. 잠시 적셔지는 것이 아니라 푹 잠기는 시간 속에서 아무 것도 아니고 싶다.


밤마다 샤워를 미루는 일은, 역할극의 투사(鬪士)가 되기 싫은 솔직한 투사(投射)다. 쉼표는 아무리 찍어봐야 마침표 하나만 못하다. 쉼표조차 늘어뜨릴 수 없어서 샤워를 미루는 습관을 줄이려 노력 중이다. 아침 샤워도, 최소한 매일 밤 마음먹기는 한다. 그러나 목욕탕에 갈 시간은 나지 않는다. 목욕 직후 마시던 단지형 바나나 우유 맛을 잃은 것은 별 일 아니다. 나는 잘 헹궈지는 중이다. 안다. 헹주 다음은 걸레다. 내 두께로 걸레의 시간을 유예할 뿐이다. 샤워기 물 쏟아지는 소리가 시원하다.


샤워를 하면 할수록, 목욕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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