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욕도 전염된다. 아는 맛일수록 전염력이 강하다. 야밤에 보고 있는 TV나 유튜브에서 누군가가 라면을 ‘후루룩’대다가 배 아래쪽에서부터 ‘으~아!’를 얼큰하게 끌어 올리면, 백 년 간 봉인된 식욕도 풀릴 판이다. 침이 고이는 건 인간성의 생물학적 정의(定義)이자 행복의 정의(正義)다. 그러나 뱃살에 두른 죄책감을 물리치고 라면을 먹어도 기대만큼 맛있지는 않다. 이미 아는 맛, 그럭저럭 참을 수 있는 맛이라 후회된다. 라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당하는 속수무책의 맛이다.
내 내장 지방의 주범은 라면이다. 밥하기 귀찮으면 라면을 끓였고, 밥하기는 대체로 귀찮았다. 두 개는 많지만, 하나는 부족해 두 개를 먹었다. 하나를 끓일 때는 밥을 말았다. 반 공기만 말자는 다짐은 지켜지는 일이 드물었다. 1,000칼로리 넘는 한 끼들은 쓸데없이 착실했다. 라면이 건강을 위협하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날씨만 쌀쌀해져도 입 안의 수구초심은 한결같다.
라면은 신이 내린 가성비의 음식이다. 가격 대비 칼로리와 포만감이 압도적이다. 마트에서 파는 빵도 1,200원인 시대에 700원짜리가 빵보다 더 큰 포만감을 준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오뚜기가 라면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저가정책을 펼치느라 5개 묶음을 2,500원이 안 되는 가격에 팔았다. 지금도 3,000원이면 5개 묶음을 살 수 있고 마트 행사 때는 2,000원 중반대로 떨어졌으니 라면의 실질 최저 가격은 600원이 안 되었다. 2,000원으로 살 수 있는 빵과 우유는 간식이지만, 라면에 삼각김밥은 궁색할지언정 한 끼에 준했다.
1,000원 미만의 돈으로 라면보다 맛있는 음식을 찾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아이스크림이나 불량식품 정도겠지만, 그들은 군것질 거리에 불과하다. 군것질의 범주에서도 부셔 먹는 생라면은 가격대비 양과 질이 일반 과자에 밀리지 않는다. 더군다나 라면 측에 하얀 국물 라면, 짜장 라면, 불닭볶음면까지 가세하면 맛의 다양성이 풍부해진다. 맛의 석학들이 경쟁적으로 쌓아 올린 오래된 공든 탑, 라면이다. 자취생에게 라면은 불패의 소울 푸드가 될 수밖에 없다.
라면보다 관대한 음식도 없다. 라면은 대부분의 식재료를 품어내며 다문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어떤 요리를 하고 남은 식재료, 냉장고에 있는 자투리 식재료는 무엇이든 라면에 넣어 먹으면 된다. 라면은 버리기 직전의 식재료조차 그 본질을 부활시켜 라면 자신의 다양성으로 포섭한다. 김치찌개와 된장찌개가 품기 힘든 치즈나 만두조차 품고, 부대찌개가 품었다가는 해물탕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는 해산물도 라면은 라면으로 품어낸다. 추가되는 식재료가 무엇이든 라면의 본질을 왜곡하지 못한다. 구글에 ‘식재료+김치’를 검색하면 안 나오는 게 없다고 하는데, 라면도 이에 못지않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부대찌개도 라면화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조리가 간단하다. 내가 라면을 끓일 때 들이는 유일한 수고는 끓이는 시간을 타이머로 재는 정도다. 라면 봉지에 적힌 시간보다 10초 정도 일찍 가스 불을 꺼서 약간 꼬들꼬들 하게 먹는다. 끓는 중간에 한 번씩 면을 들었다 놔주면 면과 공기가 만나 면발이 탱글탱글해진다고 하지만, 그런 수고를 들일 것 같으면 애초에 요리를 했다. 간혹 불끄기 30초 전에 계란을 넣는 수고를 더하곤 하지만, 계란은 스프와 다름없는 라면의 일부이니 추가적인 수고라고 할 수는 없다.
가게 망할 작정을 하지 않는 이상 모든 분식집은 라면에 계란을 넣어준다. 취향에 따라 계란을 익히는 방식은 다양하다. 계란을 풀면 국물이 탁해지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뭉실뭉실한 맛이 있다. 나는 반숙인 채로 국물 속에 아껴 두다가 마지막에 노른자만 따로 퍼 먹는 것이 좋다. 노른자를 뜰 때 숟가락에 묻은 라면 국물 정도면 간도 적당하다.
라면 위에 올라온 파는 눈으로 먹는 애피타이저다. 식욕을 돋워주며 국물을 깔끔하게 해준다. 양파는 국물을 달큰하고 시원하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지방을 분해하는 특성 덕분에 칼로리에 걸린 죄책감을 상쇄한다. 다진 마늘은 국물에 한국인을 더한다. 한국이 왜 1인당 마늘 소비량이 가장 많은 나라인지는 라면 국물에 다진 마늘을 넣어 보면 실감할 수 있다. 한편 팽이버섯이나 느타리버섯은 싼 맛에 넣는다. 맛이 달라지는지는 모르겠지만 라면에 뭐라도 들어가 있으면 요리 비슷한 느낌이 난다. 2020년에는 매운 계열 라면에 순두부를 넣어 먹는 것이 유행했다. 따라 먹어보고 나서야 왜 순두부를 넣어볼 생각을 못했는지 감탄했다. 그러나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고 요즘은 다 귀찮아서 그냥 라면만 먹는다. 단, 이것저것 다양한 제품을 투어 중이다.
라면의 단짝은 김치다. 사실 나트륨에 나트륨을 더하는 무모한 단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어질 생각을 않으니 영혼의 단짝이다. 라면에 김치를 더하면 맵고 짠 일관성이 유지된다. 그러나 뜨거운 라면과 시원한 김치가 단짠처럼 온냉을 교차하며 맛에 입체감을 새긴다. 게다가 면발의 부드러움과 김치의 아삭한 식감도 잘 어울린다. 한동안 건강을 생각해 김치 대신 생양파나 채 썬 양배추를 먹어 짠맛을 중화했다. 그러나 온냉과 아삭함을 아우르고 있는 맵짠의 리듬이 깨져서 다시 김치로 돌아왔다.
군필자들은 한겨울 불침번이나 혹한기 훈련에서 라면이 주는 뜨거운 감동을 기억할 것이다. 미필들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맛을 입 안에서 공유할 수 있다. 라면은 식욕의 안쪽에 잠복해 있다가 비가 오거나 추운 날이면 발현되는 집단 유전학의 법칙을 따른다. 그릇을 손으로 감싸 손부터 녹이며 국물을 조심히 후루룩, 뜨거운 기운이 목을 타고 식도를 지나가는 궤적을 느끼며 ‘으~어!’. 면발을 입 안에 양껏 말아 넣고 뜨거움에 입을 방정맞게 움직이며 들숨을 말아 올리는 순간, 라면보다 맛있는 음식은 없다.
나는 고시원에서 먹었던 라면이 가장 맛있었다. 공용 부엌에서 라면을 끓여 내 방으로 가져와 이어폰을 끼고 ‘택뱅리쌍’ 시절의 스타크래프트 경기를 보며 소리 죽여 먹었다. 2개 1,200원 하는 커플 삼각 김밥과 함께 끼니를 때우는 일이 잦던 시절이었다. 돌이켜 보면, 라면은 당시 맛있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궁색함을 지탱해주는 관용의 맛, 라면은 은혜로웠다.
요즘도 라면의 은혜를 입고 있다. 다이어트와 라면은 궁합이 나쁘지 않다. 한 끼 600칼로리 미만으로 먹으면 살은 빠질 수밖에 없고, 라면은 550칼로리 안팎이다. 물론, 라면 하나로는 배가 안 찬다. 그래서 350칼로리짜리 건면 하나만 먹었다. 여기에 대파 하나를 다 썰어 넣고, 느타리버섯 한 움큼을 찢어 넣었다. 무 200g 안팎을 잘게 썰어 넣거나 콩나물 한 줌을 넣기도 했다. 라면이라기보다는 야채찌개에 라면 사리가 들어간 형태지만, 500칼로리 안팎에서 한 끼의 든든함을 채워냈다. 국물을 비워내지 않은 한, 맛있는 한 끼의 소명을 건강하게 해냈다.
우린, 평생 갈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