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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철 Jan 10. 2019

인천/경기에서
서울을 오가기란 어렵다

인천/경기도민의 조건, 광역버스 번호 암기와 칼같은 막차 시간 사수

가깝고도 먼 내 고향 서울

서울 야경이 예쁜 것은 퇴근이 없기 때문이지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주민번호라는 신기한 국민식별 번호를 가진 한국은 자신이 태어난 지역을 주민번호에 표기하고 있다. '900617-10...' 번호에 따르면 나는 90년 6월 17일 서울에서 태어난 남자사람이다. 이런 내게 서울에 살았던 기억은 인천으로 오기전의 유년 시절과 창업 후 서울에 나가 살았던 때, 의경 생활로 서울에서 '살기는 살았던..' 때에 있다. 회고해보니 1~7살까지는 서울에, 8살부터 24살까지는 인천에, 25살부터 29살 6월까지는 또 서울에 살았다. 지금은 다시 가족들이 있는 인천에 살고 있다.


20대 전체를 보면 서울에 살지 않았던 시간이 꽤 길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서울을 향하고 있었다. 학교를 가야했고, 친구를 만나러 가야했고, 무언가를 하려면 서울에 가야만 했다. 나는 용인 친구, 시흥 친구와 가장 친했다. 우리는 자주 만났는데, 거의 서울에서만 만나고 정작 각자의 동네에서 본 적은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서울을 제외한 도시간 교통은 막차가 빨리 끊기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반면 서울에서는 밤 12시에도 어디든 갈 수 있다.


분당 용인 친구들은 강남에 조금이라도 가깝기를, 인천 부천 친구들은 조금이라도 홍대 쪽에 가깝기를 희망했다.


인천 계양에 사는 내게 1500번 빨간 버스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빨간 버스를 타면 인천 계양구에서 홍대를 지나 신촌, 이대, 서울역까지 갈 수 있었다. 다만 경인고속도로가 밀리면 도착하는 시간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나는 매일 집 밖을 나서며 오늘은 버스가 빨리 오게 해달라고,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막히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염원했다. (30분을 일찍 나왔는데 늦고, 급하게 나왔는데 10분 먼저 도착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몇 년이 지나 공항철도가 생겼다. 공항철도 건립은 엄청난 업적이었다. 일단 타기만 하면 홍대와 서울역까지 슝 날아갔다. 나는 가끔 장난삼아 친구들에게 이거 만든 사람 노벨상 줘야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인천 집은 내게 단지 자는 곳, 쉬는 곳이었다. 나에게만 그럴리 없었다. 아빠는 우리가 인천으로 이사한 시점부터 20년을 인천 계양에서 서울 성동 사이를 오갔다. 아빠의 아침은 언제나 우리집 누구보다 빨랐다.(왜 서울 존버를 하지 않으셨을까..)



어차피 좋은 건 서울에 다있어


나는 초중고를 인천에서 나왔다. 그런 나는 스스로 인천 사람이라는 자각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인천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니다. 서울 사람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잠과 휴식은 인천, 그 외 생활은 서울에서 이어가니 나 자신도 내가 어디 사람인지 모르겠다. 신기한 것은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내 친구들은 그냥 각자의 동네에 사는 사람이었다. (다만 송도 사람들은 인천이 아니고 송도이며, 분당 사람들은 성남이 아니라 분당이고, 일산 사람들은 고양이 아니라 일산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인천 계양에 산다.)


인천에 살던 나도, 시흥 친구도, 용인 친구도

다같이 가진 확고한 인식은 있었다.


서울엔 재밌는 것이 많아

서울엔 일할 것이 많아 

좋은 건 서울에 다있어


그러니까


우린 서울에 가야만 해.


스무살 어린 어른이 되어 제대로 둘러본 서울은 놀 것도 볼 것도 갈 곳도 많았다. 한강 공원도 있고, 대학교도 많고, 먹을 것도 많았다. 아침 첫 차를 기다리게 한 클럽도 있었다. 성공한 사람들의 강연은 언제나 서울에서 열렸다. 볼만한 공연이나 전시는 서울에 있었다. 롯데월드도 서울에 있었다. 특이하게 과천에 있는 놀이공원은 서울 바로 아래 있어도 '서울랜드'였다.



서울에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대학에서는 부산 친구도 만났다. 내가 사는 계양구가 포켓몬스터의 첫 시작지인 태초마을이었다면 서울은 전설의 포켓몬과 고수들이 도사리는, 탐험하기엔 너무나 방대한 필드같았다. 나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또 왠지 모를 새로운 가능성을 마주하기위해 서울로 향했다. 

또 다른 빨간 버스 9500번을 타고 나는 강남으로 갈 수 있었다. 1시간 반정도 걸렸다.

2011년에 청년 창업을 지원해주는 기관에 지원서를 냈었다. 역시 서울에 있었다. 시간이 지나 관련 아이템으로 시흥 친구, 용인 친구와 창업을 했다. 자소서에 관련한 교재를 만들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2년 정도 스터디 카페에서 진행했었는데, 이제는 우리 자체 공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빚을 좀 져서(^^) 사무실을 구하기로 했다. 장소는 당연히 서울이었다. 우리 학생들은 서울에도 있었고, 인천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경기도 친구들이었다. 가끔은 부산, 광주 친구들도 있었다. 이들이 다 모이려면 서울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서울로 왔고, 정읍 유지였던 학생도 우리를 만나기위해 매주 서울로 왔다. 당시 그가 살던 동네에는 우리같은 '어린이'급 강사보다도 입학사정관 전형을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대부분이 서울에 살지 않았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울에서만 모일 수 있었다. 

단지 그것이 중요했다.


나이를 먹고 보니 서울에는 청와대도 있다. 국회도 있다.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는 큰 회사 본사는 여기에 다있다. 가고 싶어하는 대학들도 서울에 많이 있다. 인천에는 앞서 말한 것들이 거의 없다. 용인에도 잘 없다. 시흥에는 전혀 없다. 파주에도 없을 것이고, 구리에도 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서울이 가진 권능은 '관습헌법'(행정수도 추진에 대해 04년 헌재는 서울은 600년간 수도였으므로 관습헌법에 따라 행정수도 추진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냈다.)이라는 이름 아래 거의 영구히 수호되고 있었다. 

놀 것도 서울에 다있네. 뭐 아무렴 어때 (막차 타고) 집에만 가면 되니까!


과천에 있는 놀이 공원이 '서울'랜드라면, 서울 밖을 감싸는 고속도로는 '외곽순환' 고속 도로다. 서울 안을 도는 도로는 '내부순환'로다. 서울 밖 근처, '외곽'에 사는 우리는 거의 매일을 서울 '내부'로 향했다. 외곽의 우리는 내부로 갈 수 밖엔 없었다. 


어차피

좋은 건 

서울에 다있으니까!

(Make Gyeong-gi Great Again!)



그러나 서울을 오가기란 정말 너무 고되다


세계 주요국가들이 포함된 OECD 회원국 중 한국인의 하루 평균 통근, 통학 시간은 58분으로 1위다. 서울에만 한정해보자. 통계청의 15년 조사에 따르면 서울의 통근, 통학 시간은 평균 78.6분으로 전국 평균 61.8분보다 더 오래 걸린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일도 제일 많이 한다. 그 덕에 서울의 도심은 밝게 빛난다. 그 뿐이랴. 한국인들은 길에서 시간까지 많이 버리며 서울의 도로도 알알이 수놓고 있다.(^^) 아름다운 서울의 야경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역시 세상 많은 것들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서울은 매우 큰 도시이기 때문에, 서울 안에서 서울을 오가는 것도 오래 걸린다. 강서에서 강동은 또 무지하게 멀다. 5호선을 타고 2번 정도 자고 일어나면 끝에 가까워져있다. 서울 안에서도 서울은 멀고 서울 밖에서도 서울은 참 멀다.


시간이 지나 외곽에 사는 우리는 '내부'에 일자리를 잡았다. 어떤 친구들은 자취를 선택했지만, 그래도 '오갈만'하다고 생각하거나, '돈을 아끼려는' 친구들은 여전히 주 5일 서울을 오가고 있다.

지하철 9호선은 알집보다 위대한 압축 기술을 자랑합니다.zip

아침 9시, 저녁 7시 9호선은 정말 엄청난 압축률을 자랑한다. 내가 아는 어떤 친구는 2년째 부천에서 강남까지 아침 1호선, 9호선을 타고 오간다. 나는 일반적인 9 to 6의 회사를 다닌 적이 없기 때문에 내게 그 시간 9호선이 일상은 아니다. 다만 몇 번 그 시간 9호선을 타보고는 진심으로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의경을 할 때 나는 교통기동대에 있었다. 매일 근무지가 서울 어딘가로 바뀌었다. 강남일 때도, 종로일 때도, 노원일 때도, 송파일 때도 있었다. 우리는 저녁 퇴근 시간대 근무를 '러시' 근무라고 했는데, 정말 말그대로 그 시간대 차들의 행렬은 러시와 다름 없었다. 끊임없이 도시 중심부에서 도시 바깥을 향해 동으로 서로 남으로 북으로 차들은 빠져나갔다. 더운 날에도 추운 날에도 예외가 없었다.


꼬리를 끊지 않으면 차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교차로를 빠져나가려고 앞 차의 꼬리를 물었다. 물에 젖은 솜처럼 피곤한 그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위해 제발 자기까지만 보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칼같이 끊어야만 했다. 남북이 물리면 동서가 막히니 어쩔 수 없었다.


아마 그 시간 지하철도 꽉 차있었을 것이다. 모두가 참 고생이다. 

각자 자기 직장, 학교 앞에 살 수만 있다면 참 좋을텐데. 



''미세먼지 농도 17의 서울 풍경'' - 2015, f11, 1/100, iso100 , 디지털프린트, 김진호 <서울사랑 17.3월호에서 발췌>


서울에서 살기란 더 어렵다


일찍이 이 나라에서 서울이 가진 소프트파워와 인프라의 우위는 절대적이었다.(서울외잡)

조선시대 실학자 정약용은 귀향지에서 생전 수백 권의 저서를 썼는데, 가끔 자녀들에게 부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 중 필히 한양에 살 것을 강조하는 편지가 한 통있는데, 대충 요약하자면..


도성에서 멀어지면 문화의 안목을 기르기 어렵다

그러니까 아무리 망해도 도성 십리 안 팎에 '붙어 살아라'

그러다 가세가 일어나면 도성 한복판에 집을 짓고 살아라

-다산 정약용 말씀-


거의 사회주의급 토지 개혁을 주장한 실학자 정약용조차 서울 '존버'가 답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회는 사회대로 발전하더라도, 개인은 개인대로 생존을 추구해야하니 나는 정약용이 아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이해가 된다. 나도 서울 근처에(계양?) 붙어 살며 얻은 기회가 많았다. 마찬가지로 요즘 나는 11살 어린 고3 여동생에게 꼭 서울로 대학을 갈 필요는 없지만, 서울 근처에서 '기회'들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서울은 커지고 있다. '서울 중심'부에 사는 것은 내 살아 생전 가능할까..?


서울을 단순히 '서울'이라 퉁치기에 서울은 너무 큰 도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촌'은 한정되어 있고, 부촌이 아닌 서울 바깥 서울에 살아가고 있는 이들도 분명히 많다. 그들도 직장이나 학교와는 거리가 있어서 오고가며 꽤나 고생을 할 것이다. '내부' 순환로 안 서울은 비싸다 참.


살고 싶다 나도

직장과 학교가 30분 이내인 서울!

한강과 공원이 가까운 서울!


그러고 싶지만.. 

이미 서울은 너무 비싼 도시다.


13년 동안 서울 살이는 30% 더 비싸졌다. <서울시 생활물가지수통계 05~18년에서 추출>


위 표는 안봐도 된다.

서울에 주거를 포함한 생활물가는 13년동안 30% 더 비싸졌고,(17년 이코노미스트 지에 따르면, 서울은 세계에서 생활물가가 가장 비싼 도시 6위에 올랐다.) 서울 '어디에든' 집을 사는 것은 9년은 전혀 안먹고 안써야 가능하다.


쉽게 말해 서울에 집을 사는 것이 아니더라도 

살만한 곳을 구해서 '숨쉬며 사는 것' 자체가 너무 비싸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서울에 2호선, 4호선 라인에 집이 아니라 그럭저럭 살만한 '방다운 방'을 얻으려면 보증금 500~1000만원에 월세와 각종 생활비로 적어도 '식주'에 100만원은 우습게 지출하게 된다. 그러나 대다수 우리내 삶은 가성비를 생각해야 한다.


먹고 자고 생활하는데 월 100만원은 써야하는 나의 작은 방에서 나는 어쩌다 기분을 낸 적이 있다.

파스타를 해먹으려 끊인 물의 열기는 금방 방 안을 채웠다. 나는 바로 에어컨을 틀었다. 

나는 웬만하면 기분을 안내기로 했다. 서울 '방' 살이는 생각보다 감성비도 안나온다.


집이 아니라 작은 방에서 살아도, 별다른 사치를 누리지 않아도 '도성'안과 '내부'에 붙어살기는 비싸다.

방조차 이러할 진데, 집이 서울 2호선 라인에 있기는 더 어렵다. 


서울에서 살기란 어렵다. 

나는 지금 서울에 살기를 포기했다.

다만 정약용 선생의 말마따나 도성 바깥에서 붙어 살며 존버하기로 했다.

'문화의 안목'을 기르고 홍대에서, 이태원에서 불금해야지!


이런 내가 선택한 삶은

'주기적 변동'을 피해서 서울 밖에 살기.


아침엔 지옥철, 점심엔 텅빈철, 다시 저녁엔 지옥철, 밤에는 그럭저럭


단기적이며 일정한 주기적인 변동을 '계절성(Seasonality)'이 있다고 말한다. 

평일 출퇴근 시간 9호선이 미칠듯이 붐비고 점심에는 그럭저럭 여유있는 것이 그러한 변동 중 하나다. 


나는 지금도 일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약간씩 저 주기성을 피해가며 살고 있다.

이 말은 내가 일반적 의미의 '좋은 직장'에 가지 (못한)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서울을 오가며 의식적으로 점심에 나오고, 퇴근 시간이 지난 후 돌아간다.

앉아서 오가는 시간에 책을 읽거나 '딴 짓'들을 잘해낸다.

서울에 살지 않음으로서 덜 쓰는 돈들로는 맛있는 것을 먹고 적금을 들거나 보험을 든다.

서울 살 때보다는 나의 소비는 감성비가 잘나온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시간의 주기성을 피해가니 그럭저럭 삶의 여유는 생긴 것 같다.


서울에는 좋은 것은 다있다.

인천에는 좋은 것은 잘 없지만

엄마 아빠 희지 문돌이가 있다.

따뜻한 저녁과 웃음소리를 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기에

나는 서울에 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도 포기할 수는 없는 나는

오늘도 인천과 서울을 오간다.

앉아 갈 수 있기를 바라며 

계양행 공항철도에, 1500번 버스에 몸을 싣는다.


오늘은 12시 반까지 허락된 서울에서의 삶.






아 

인천에서 

서울을 오가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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