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봄은 와버렸고, 매번 주저하는 나를 만나는 다시 봄.
바야흐로 도둑처럼 봄은 왔고 벚꽃은 피어버렸다. 가수 장범준의 마르지 않는 항산의 샘 '벚꽃엔딩'이 스물스물 차트에 올라오고 있다. 아직 밤은 쌀쌀하지만, 해가 떠있는 동안은 온화하고 꽃은 만개해있다. 거리에는 봄을 예찬하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노래는 말한다. "사랑하세요! 올 위 니드 이즈 러브!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사랑 미실행 등 ^^?)에 의거 처벌!"
아직 졸업을 못한 이유로 대학 캠퍼스를 자주 누빈다. 봄날, 이제 막 입학한 친구들은 참 생기가 넘친다. 이들은 온 세상 어떤 걱정도 다 튕겨내는 생기발랄 쉴드를 가지고 있다. 저들은 행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들 못지 않게 눈에 띄는 이들은 공대건물앞 벚꽃 아래를 누비는 CC(캠퍼스 커플)들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설레어 보인다. 오며가며 지나다 CC들을 보면 베시시 웃음이 난다, 그들의 설레임과 사랑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한편으로는 참 부럽다. 나에게 저런 날들이 그리 많지 않았던 탓이다. 한편으로는 앞으로 내게 저들과 같은 사랑이 가능할까하는 의미없는 기우 탓이기도 하다. 별다른 이유나 고려없는 설레임. 나는 다시 해낼 수 있을까 싶은 걱정.
사랑하는 이들의 발걸음은 빠르지 않다. 전공책을 들고 바삐 오가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수업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듯 여유롭다. 지금 그들에게 세상은 드라마 촬영장의 배경이며, 나와 오가는 이들은 엑스트라일 뿐이다. 오직 그들만이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사랑의 주인공들. 그들을 지나 도서관으로 향한다.
올라가서 책 읽어야지! 오늘은 잡지야.
...
어쩌면 이 곳도 봄인지 모른다.
도서관 근로 장학생을 경험한 후배의 증언에 따르면 서가 사이에는 CC들이 이따금씩 보인다고는 한다. 그들은 서로를 지극히 여긴다고는 한다. 정녕 저들의 설레임은 별다른 이유나 고려가 없다. 아 불타는 청춘이여. 드라마의 주인공이여. (다만 서로를 아끼는 그들의 고려는 사람의 발걸음이 뜸한 '철학'과 '종교'에 있다고 한다. 역시 인문학에는 사랑이 있다.)
그래 뭐 사실 다 부러워서 하는 말이야.
이제 막 봄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이대 앞에서 미팅을 마친 나는 그 앞 스타벅스에 원고 작업을 하러간 적이 있다. 이곳은 1999년에 연 스타벅스 한국 1호점으로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한다. 대학가에 있는지라 아무래도 대학생들로 보이는 이들이 많다. 아마도 인근 E대학이나 Y대학 학생들이 많을 것이다. 2층부터 3층까지 작업을 하거나 공부를 하는 대학생들이 유독 많았다.
자리를 찾으려다보니 위층은 이미 꽉 차있어서 나는 카운터 앞자리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원고를 쓰다보니 1층은 유독 오가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만나고는 곧이어 오래지 않아 자리를 떠나는 곳. 이 곳은 마치 이어지는 만남을 위한 기착지 같달까.
원고의 첫 줄을 적었을 때, 내 왼쪽 테이블에 E대학 과잠을 입은 여학생이 앉았다. 첫 문단을 마쳤을 때, 후드를 입은 남학생이 들어와 여학생 옆에 앉았다. 그들은 많아봐야 스물 셋-넷이나 됐을 것이다. 두 번째 문단을 채웠을 때, 오른쪽 테이블에 데님 셔츠를 입은 스물 다섯쯤 되어보이는 남성이 앉았다. 세 번째 문단을 시작할 때 예체능인의 아우라가 완연한 여성이 들어왔다. 그녀는 남성을 마주보고 앉았다.
만남의 중간 기착지인 이 곳 1층은 오가는 이들이 많아 그다지 작업하기에 좋은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원고 쓰기에 집중하다가 조금 지친 나는 1호점의 가장 표준화 된 탄맛을 느끼며(스타벅스의 커피는 표준화된 약간 탄맛이 난다.) 잠시 쉬기로 했다. 이 공간과 사람들에 관심을 가지기로 했다. 대화가 들려왔다.
- 왼쪽 테이블 (E대학 과잠 여학생과 후드를 입은 남학생)
E과잠 여학생 : 야 뭘 그렇게 재밌게 보냐(남학생은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후드 남학생 : 나? 크보!(KBO를 그대로 읽은 것으로 한국 프로야구를 의미한다.)
E과잠 여학생 : 크보? 크보가 뭔데?
후드 남학생 : 크보가 크보지 크보가 뭐냐니. 아 근데 나 피곤해.
E과잠 여학생 : 그러니까 야구 경기가 크보라는 말이네. 왜 피곤해?
후드 남학생 : 어제 늦게자고 9시 수업 듣고 3시 수업듣는데 중간에 너무 피곤한 거야. 그래서 친구집에서 자다 나왔어
E과잠 여학생 : 그러게 수업을 왜 그렇게 짰어.
후드 남학생 : 꼭 들어야하는 수업이라서 어쩔 수 없었어..흑..
E과잠 여학생 : 참 말도 안되는 수업이네. 됐고. 마라탕이나 먹으러가자. 너 지금 피곤하니까 내가 좋아하는 거 먹어.(?!?)
후드 남학생 : 자기야 그게 무슨 <용불용설*> 같은 소리야. 나 마라탕 안좋아해. 꿔바로우 좋아해
(*용불용설 - 진화론 이전 생물의 기관발달이론으로, 기린은 목을 계속 쓰다보니 길어졌다는 이야기. 즉 말도 안된다는 말이다.)
남학생은 열심히 크보를 보면서도 한 손으로는 여학생의 손을 꼭잡고 있었다.(짜식..) 마라탕을 파는 곳에서 꿔바로우를 안팔리는 없으므로 결국엔 서로 열심히 콩볶는 소리다.(콩 볶으며 꿀넣기 있기 없기?) 내용만으로는 네모나고 세모난 뾰족함이 있는 스몰토크 그 자체인데, 오가는 말의 내용은 동글 동글하기만 하다. 하나라도 더 들어주고 결국엔 상대가 원하는대로 해주려하는 배려랄까.
- 오른쪽 테이블(스물다섯 추정 남성과 예체능 아우라 여성)
스물다섯 추정 남성 : 누나. 오늘도 연습 많이 했어요?
예체능 아우라 여성 : 아니 요즘은 그렇게 많이 안하고 있어~ 사실 연습 외에 할 게 더 많아.
스물다섯 추정 남성 : 요즘 저도 할 게 많아요. 학내 창업 준비하잖아요. 개발만 배우면 괜찮은데 알아야할 게 너무 많아요.
예체능 아우라 여성 : 에구 너도 참 힘들겠다. 몸 챙겨가면서해. 몸 상해. 그리고 넌 참 대단해. 적은 인원으로 하기 쉽지 않을텐데
스물다섯 추정 남성 : 운이 좋아서 잘하고 있어요. 밥도 잘 챙겨 먹고요. 맞다 누나 제가 준비한 거 있어요.(남성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여성에게 주었다.)
예체능 아우라 여성 : 어머. 이게 뭐야?
스물다섯 추정 남성 : 별 거는 아니구 편지랑 간식 좀 챙겼어요.
예체능 아우라 여성 : 와.. 정말..너! 발렌타인 지났다고 바로 이러기야?
왼쪽은 이미 연인이 되어 깨를 볶고 있었다면, 오른쪽은 썸의 마지막 단계를 막 지나고 있는 느낌이다. 누구 하나라도 선언을 하면 그들은 곧 사랑을 시작할 참이었다. 아니 이미 그들은 사랑을 시작했다. 여성은 남성을 대화 내내 존중했고 그러면서도 귀여워했다. 남성은 여성에게 말그대로 홀딱 반해있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목소리는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승기의 어떤 노래처럼)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어서 이 기착지를 나서기로 했다. 더 있다가는 <지금 사랑을 하지 않는자. 유죄!> 아우라에 휩싸일 것만 같았다. 그들의 표정과 말씨를 기억한다. 사랑이 시작될 때 우리 일상은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으로 가득 찬다. 사랑이 시작할 때 만나는 이의 행복을 위해 우리는 사소한 노력을 다하게 된다. 이제 막 싹을 틔운 사랑은 우리를 더 힘이나고 행복한 사람으로 만든다.
가장 예쁜 꽃집을 찾게 되고(이대 앞 예삐꽃방이 가장 좋다.) 상대를 더 알고 싶어 지나가는 사소한 말에도 귀를 기울인다. 햇살은 더할 것없이 따스하고, 일상 속 짜증나는 일조차 대화를 위한 헤프닝이 된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오늘의 나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작된 사랑은 작은 행복감조차 배로 증폭시키는 앰플리파이어다.
사랑이 봄날처럼 시작될 때 우리는 도취되는 즐거움을 느낀다.(모든 사랑이 봄날처럼만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랑에 깊이 몰입하고 일상의 주인공은 상대가 되고, 나머지 자신의 일에 소홀해지기 쉽다. 이렇게 시작된 <봄날의 사랑>은 거대한 인력을 가지고 있어서 금세 우리 자아는 딸려들어 가고는 한다. 상대의 매력에는 그 만큼의 질량이 있다. 시작된 사랑의 인력은 매력만큼 더 커진다. 이 매력의 인력을 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끌어당기는 것은 상대가 아닐 수 있다. 사랑에 몰입하고, 도취된 자기 자신이며 인력에 끌려갈 때 끝내는 매력적인 자신의 모습을 상실해버리기도 한다.
물론 사랑이 언제나 거대한 인력으로 시작되지는 않는다. 가볍게 '가능성의 탐색'으로 시작되는 사랑도 있고, 그렇게 쭉 이어지는 사랑이 있고 그러다 끝나버리는 사랑도 있다. 애착을 두지 않으니 딱히 아프지 않고 아주 기쁘지도 않다. 그가 가더라도 또 다른 그'가 올 것이다. 그'가 가면 그''가 올 것이고, 이러한 사랑은 대체가 가능하기에 안전하고 합리적이다. 나간 전구는 갈아끼면 그만이니.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가능성의 사랑'에서 별로 좋지 않다가도 시나브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때에 오는 것이 결국엔 '봄날'의 사랑이다. 나 역시 그랬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끝은 비극이었다. 16년 겨울 촛불집회 때 의경으로 만난 광장과 거리의 육체적 고통이 차라리 그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는 도취에서 나를 잃었었고, 관계에는 존중이 없었다.
도취만 있고, 존중이 없고,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처럼 도취의 모습만 띤 유사 사랑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자신을 잃어갈 때 비극은 시작된다. 나는 내 책에 비극에 대한 이야기를 애써 적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나는 그때 그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기는 하지만 내 삶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길 바란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것은 사랑이어서는 안된다. 나는 결단코 그것을 사랑으로 부르지 않겠다.
사랑의 본질은 '관계'다. 관계는 다른 자아의 세계가 만나는 과정이며, 그 결과이다. 그런 이유로 사랑은 서로를 마주봐야만 한다. <나 혼자 열심히>는 최선이 아닐 수 있다. 사랑을 알기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개념과 명사를 아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무수히 많은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본질은 '상대'를 아는 것이고 상대와 함께할 '나'를 아는 것이다. 함께 서로를 마주하며 존중하며 맞춰가는 과정과 결과에 사랑의 앎은 있을 것이다. 깊어가는 사랑은 그 책임을, 어려움을 요구한다.
'도취' 상태는 서로간 맞춤을 시작하기전 잠시 찾아온 허니문 기간일 것이다. 어려움을 마주하기전 찾아오는 달콤한 시간. 그러나 도취만으로는 사랑을 알 수 없다.
이것만큼은 확실히 해두자. 당신을 잃어가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어야한다. 그것도 사랑이라면 부디 그런 사랑은 시작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봄은 사랑의 시작을 촉진하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봄날 캠퍼스에서 스타벅스 1호점에서, 사랑에 빠진 이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다보면 나 역시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사랑을 시작하기가 쉬울까?
도취적 사랑만으로는 사랑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은 알겠다. 또 사랑에는 상대가 있어야해서 혼자 열심히만으로는 안된다는 것도 알겠다. 일단 시작이 우선이다. 나는 왜 사랑을 시작하지 않(못하)는지 물음과 대답으로 이어가보자. 당신이 사랑을 시작하기전 생각해볼만한 것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상대가 필요하잖아. 그럴만한 사람이 아마도 없기 때문이겠고, 상대를 바라봐야 하는 내가 아직 준비되어있지 않기 때문이야. 내가 느끼기에 '나'는 사랑에 대한 준비도 미진하고, 내 마음에 드는 '상대'도 딱히 없으니 애써 사랑을 시작할 이유는 없는 것 아닐까?
나이를 먹어갈 수록 일상에서 우리는 상대의 매력에 대해 좀 까다로워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야.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매력의 화살표가 서로를 향하기란 참 어려워. 그만큼 사랑이 시작되고 지속되는 것도 쉽지 않겠지.
사랑에는 '내'가 필요해. 솔직히 서른이 되니까 사회적으로 너무 준비되지 않은 나의 상태가 위태롭다는 생각을 많이해. 대다수 청년이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번듯하지 못해. 집도 없고 차도 없고 사원증만 보면 어딘지 알 수 있는 회사에 다니는 것도 아니야. 그렇다고 집안이 탁월해서 항산이 안정된 것도 아니지.
물론 그것 때문에 사랑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야. 나는 책을 쓰는 내가, 노래하는 내가, 학교에 다니면서도 초보 기획자로 일하는 지금 내가 충분히 좋아. 다만 이런 나를 바라보는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솔직히 조금 고민이야. 사실 나의 준비 상태보다는 지금 애써 사랑에 뛰어들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이유 같아. 비겁한 이야기다 참.
그런지도 모르겠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나 스스로도 '확신'이 없는 탓이야. <사랑에 뛰어들만한 상대>는 기본적으로 내가 매력을 느끼는 상대여야 한다고 생각해. 이 매력에 대한 갈망이 지나치면 '동경'이 되어버리겠고, 나는 아티스트를 일방으로 좋아하는 팬처럼 되어버리겠지. 하지만 사랑의 시작은 상호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노력으로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보게 하기는 정말 어려워.
어떤 사람들은 '번듯함'과 같은 현실적인 조건이 감정에 큰 영향을 준다고도 해. 다만 그 사람이 나는 아닐 뿐이야. 내가 사랑을 하려면 '그 사람 자체'에 매력을 느껴야해. 이 경우 1) 나만 상대에게 매력을 느끼거나 2) 서로가 매력을 느끼는 상황으로 나눌 수 있겠지? 나는 소위말하는 조건에 맞춰서 없던 감정이 생기지는 않는 사람 같아. 그럴 바엔 혼자가 낫지.
당연하지. 나는 이 구도가 <매력의 가위바위보 게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해. 내게는 매력적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매력적인 사람이 내게는 아닐 때가 많지. 나는 가위고 내가 호감있는 사람은 바위인데, 어떤 친구는 보자기인거야.
상대도 나도 서로의 매력에 끌리면 <사랑이 시작되기>에는 정말 이상적일 거야. 하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지. 그래서 사랑은 쉽게 시작되지 않아. 사랑의 시작에서 좌절하는 많은 경우가 상대의 관심을 내게로 가져오려고 할 때 일어나. '애쓰는' 상태지. 보통은 이럴 때 자기 매력을 보지 못해. 아 또 안되네..하며 깡통을 차다가 스스로의 매력을 의심하지.
지금 나는 너무 '애쓰지' 않고 싶어. 애쓰다보면 무리하게 되고, 내가 해야할 나의 일을 하지 못해. 자신의 매력을 잃게 되는 거지. 나는 자신에 매력에 대해 과신도 의심도 안해야한다고 생각해. 그러면 매력의 가위바위보에서 이길 수도 있을지도 몰라. 애쓰지 않되, 나의 일을 하며 오랫동안 작은 기대 정도는 하는 거지. 전제는 내게 매력적인 상대를 발견했고, 그 주위에 자연스레 있을 방법을 찾았다는 것이겠지만.
애써도 되지. 그렇게 해서 상대가 나의 매력을 알게 된다면 멋진 일이야. 다만 애쓰면서도 상대를 배려해야한다고 생각해. 애쓰기만 하다보면, 상대를 단순히 갈망하는 마음만 커지면서 어떤 집착을 낳게 되고 더 무리하게 돼. 이상한 기대심리가 생기고. 사실 그 모두 스스로를 위한 이기심인데 말이지. 아무튼 이러다보면 자신을 보지 못하게 되고 자신을 잃어가는 경우가 많아. 매력은 계속 작아지지.
이 경우 애써서 시작되어도 상호 간 '설레임'과 '친밀감'이 모자라니 관계의 헌신 자체에만 과몰입하게 돼. 과도한 헌신을 하게 되면 상대는 부담을 느낄 거야. 만약 상대가 영악하다면 너는 노예 상태에 놓일 거야. 헌신을 멈추면 관계가 끝이 나는. 물론 시작조차도 웬만해서는 안되겠지만.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과 상대를 갖고 싶어하는 마음을 착각하지 말자. 애써도 돼. 근데 집착하지마. 정말 좋아하는 것이라면 부담이 될 때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맞는 말이야. 나를 바라보는 이들에게도 분명히 매력이 있어. 실제로 예전에는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상대에 대한 갈망과 동경에 자주 사로잡혔다면, 이제는 나를 매력적으로 봐주는 사람들의 매력을 보려 노력해. 어쩌면 내가 모르는 매력이 있는 정말 좋은 사람일지 알 수 없잖아. 또 첫 시작이 설레임이 아니어도, 좋아질 수 있는 관계도 분명히 있으니까.
일단 시작하고 '좋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기도 해. 다만 이 경우 '설레임'과 '친밀감'이 모자라니 이를 알아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해. 시작된 관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거지. 이때 조심할 것은 <예의로만 상대를 대하는 것>이야. 반대로 상대가 '애쓰게' 될 수 있어. 그가 자신의 삶을 잃어가서는 안돼.
한편 상대의 매력을 알아가는 것에도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해. 설레임이 강한, 도취적 상태로 시작된 사랑이 아니라면 상당히 노력해야하는 과정이라는 것이지. 이것도 다른 의미로 꽤나 애쓰는 상태야. 뭐가 되었든 요즘 나는 '애쓰기보다' '나'에 집중하는 것이 더 좋은 상태라고 할 것 같아.
<일단 시작>을 '애착을 크게 두지 않고 일단 만나보는 것'. 즉 교제를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해볼게.
이 단계는 사랑은 아닌 것 같아. 서로에 대한 끌림이 애매할 때, 사랑이 시작되기 전에는 탐색이 필요해. 요즘은 <썸>이 있으니 좀처럼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썸의 설레임을 생략하고, 일단 시작하는 것도 의미가 있어. 그런데 솔직히 이때 드는 감정은 '쎄함'이야. 나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하는? 좋아하지도 반하지도 않는데 어설픈 호감으로 일단 스타트를 끊었을 때의 찜찜함이랄까.
언제는 이런 적도 있어. 그렇게해서 시작된 상대와 뮤지컬을 보러 간적이 있어. 상대는 기대감이 있었어. 그런데 그 기대감은 나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연애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심취. 그 상태에 대한 기대 같았어. 상대에게는 나에 대한 배려가 없었어. 자신이 보고 싶은대로 나를 재단했지.
음..단적으로 왜 뮤지컬을 보고나면 포토존이 있잖아. 나는 그 사람의 사진을 더 잘 찍어주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데, 상대가 찍은 내 사진은 조금의 정성도 없는 거야. 1초 걸려 찰칵.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알거야. 피사체에 대한 관심과 정성이 얼마나 그 대상을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지. 단적인 사건이지만 비슷한 일을 몇 번을 마주하며 '이 관계를 시작하지 않았어야 했는데'라 생각했어.
<일단 시작>은 결국 나중에 좋아질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시작하는 일이지. 가능성이라는 게 있는 것 같아.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는 가능성. 저 사람이 괜찮은 사람일 것 같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이 있고, 큰 부담이 없을 때 '시작'해볼 수는 있지.
<일단 시작>의 더 확실한 기준을 보자면 결국엔 '나'를 봐야해. 상대에 대한 나의 마음. 그 마음의 단계를 <호감→ 좋아하는 것→사랑하는 것>으로 보자면. 호감과 좋아하는 것의 경계에서나 시작했으면 좋겠어.
친근하지만 소중한 이들과 사랑을 시작하지 않았던 적이 있어. 그 사람을 오래 보고 싶었으니까. 뭐..친근함이 설레임보다는 훨씬 크기도 했었고.
돌이켜보면 내가 호감가는 이, 좋아하는 이와 잘 안됐던 이유는 결국 나를 잃어버려서였다고 생각해. 결국 나다워야 한다는데 나는 그 사람 앞에서 나답지 않았던 거야. 왜냐하면 나는 나를 정말 좋아하지만, 나는 나 자신의 매력에 대한 자신이 없었던 거야.
내 생각에 원래의 '나다움'은 '병맛맨'에다가 이상한 개그를 좋아하는 말 많은 남자애에 가까워. 무의식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런 나를 이상하게 볼 것이 분명하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이상한 생각이지. 상대를 보는 내가 나답지가 않으니 어색해. 시작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하는 거지. 무슨 알파고도 아니고, 로봇같잖아.
앞으로는 그냥 애써 나를 편집하지 않을 생각이야.
그러니까 나를 잃을 정도로 애쓰지 않겠다라는 서른살의 이상한 깨달음인 거야.
도둑처럼 서른은 왔다.
겨울이 지나고 서른의 봄도 왔다.
생각이 많아서 생각이 많은 나.
봄이 시작되기전 편지에 나는 적었다.
"요즘은 인연에 대한 소중함과 두려움, 주저함도 커집니다.
이는 시작되기에 시작될 수 있으나 끝나기는 두려운 탓입니다.
좋은 때 인연이 되기란 어렵고 흘려 보내기는 쉬우나 끝내 함께 하기는 더욱 어려운 탓입니다.
한때 내가 동경하던 이처럼 필요로 만나고, 관계를 불태우고 떠나는 ‘관계의 화전민’이 되지 않기란 어려운 탓입니다.
인연은 소중하기에 나는 두려워합니다. 주저합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기에 나는 무엇을 결정하기 두려운 것 같습니다.
이는 마음을 다하는 것이 어려움을 이제서야 조금은 아는 탓입니다."
서른에 맞은 봄.
나는 두려워한다. 주저한다.
인연의 소중함을,
마음을 다하는 것의 어려움을 이제서야 조금 아는 탓에.
아
사랑을 시작하기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