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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철 Apr 01. 2019

다른 세대를 이해하기란 어렵다

다른 시대에 태어나 같은 시대를 사는 이들. 우린 서로를 모른다.

"요즘 젊은것들은 말이야~" 그 유구한 역사

유사 이래 젊은것들은 언제나 나약하고 배움을 게을리하며 재수가 없었다.

젊은것들과는 아무 관련 없는 이집트 벽화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의 지탄(?) 대상이 되어왔다. 유사 이래 고대로부터 젊은것들은 언제나 나약하고 배움을 게을리하며 재수가 없었다. 젊은 세대의 나약함과 무례함, 게으름은 쐐기 문자로도, 한자로도 라틴어로도, 벽화로도 남아 그 유구한 지탄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그냥저냥 한 아저씨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당대의 철학자들도 젊은것들을 보고 한탄을 마지않았는데, 후대에 크나큰 영향을 준 소크라테스도 한비자도 그중 하나였다.


'젊음과 어림'은 상대적이다. 이제 막 서른이 된 내게 20대 초중반 사람들은 약간 시간적 거리감이 느껴진다. 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그들은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초등학생초글링이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09년에는 피쳐폰이 휴대용 이동통신 단말기(aka 폰)의 기본이었다. 물론 곧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긴 했지만, 그 친구들은 초딩 때부터 '스마트폰'을 사용했을 것이다.


젊은것들, 어린것들이 뭔가를 하려고 할 때

마음속 꼰대는 말한다. 차마 말하지는 않겠지만.

"야 임마 이거 그렇게 하는 거 아냐"


내가 익숙한 것을 이들이 새로 시도하려고 할 때, 더 어리지 않고, 더 젊지 못한 나에게 이들은 뭔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왠지 헤메이고 방황하며 어리숙한 것 같다. 이때마다 내 마음속 꼰대는 한 마디씩 더하고 싶다. "야 임마 이거 그렇게 하는 거 아냐." 물론 애써 말하지 않는다. 보통은 3가지 이유에서다.



1) '아휴 내가 뭐라고'

내가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무어라 조언할 자격이 되던가. 성취가 조언의 자격인지는 모르겠으나 객관적으로 내가 이룬 것이 없기도 하다. 조언보다는 내가 하는 일을 더 잘하는 게 맞겠다 싶다.


2) '저 친구가 나보다 잘할 수도 있잖아?'

특히나 어린 친구들과 같이 뭔가를 해야 할 때 당장 볼 때는 마이크로 매니징을 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르지만, 애써 그러지 않아도 이 친구들은 내가 못 보는 것을 어떻게든 보고 내가 못하는 것을 하고는 했다. 무엇을 모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스스로 찾아가고 알아가는 과정도 성취의 일환이다. 성취의 즐거움을 빼았을 수는 없다.


3) 어린 날 조언을 가장한 무례함이 주었던 불쾌함을 잊을 수 없다. 


가장 주요한 이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20대 중반까지 대체로 <20대 중반 이상 군필, 취준 남자 선배>들은 나를 별로 안 좋아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스물일곱에야 군대를 갔고, 그전까지는 줄곧 창업을 한다고 설쳤으니 다른 길을 가는 내가 얼마나 모자라고 어리숙하게 보였을까. 그들 마음은 아마 이랬을 것이다. "야 임마 너 인생 그렇게 사는 거야냐."(feat. 넌 망할 거야) 아무튼 이따금씩 조언이라며 건네는 말들은 사실 대단히 불쾌했다. 하는 말들이 '정말 잘되라는 말'인지 원래 잘되라는 말은 이렇게 불쾌한 것인지 사실은 망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지. 조언에 대한 반감 탓인지 하라는 대로 하기는 더 싫어졌다. 게다가 그들도 아직은 돈이 없어서 지갑을 꺼내면서 말을 하지는 못했다. (참치 사줬으면 잘 들었을 텐데)



아무튼 시간이 지나 나도 계란 한 판이 됐다. 고작 이제 막 계란 한 판이 된 나도 "야 임마 이거 그렇게 하는 거 아냐"를 누르고 살진데, 반 백 년 이상을 사신 분들은 오죽하실까 싶다. 그분들은 나보다 말을 아끼고 지갑을 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말을 많이 하고 지갑을 열지 않으면...(하지 마!)


아무튼 애써 조언을 가장한 '말씀'을 하지 않을 이유가 이렇게나 많음에도, 상대적으로 기성세대가 보기에 젊은/어린것들은  <나약하고 배움을 게을리하며 재수가 없다> 무례함은 덤이다. 이들은 왠지 '우리'와는 다르다. 저들은 뭔가를 모른다. 반대로 젊고 어린 세대가 보기에 기성세대는 얼마나 고루할 것인가.



정말 달라서 다른 건지 틀려서 틀린 건지

세대가 달라지면 '상식'이 달라진다. 어떤 세대의 상식은 정말 모두의 상식인가?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하정우 병장이 이병에게 직접 참 교육을 시전하고 있다.

기성세대가 젊고 어린 세대를 보는 일반적 관점(앞서 본 대로 '어리숙하고 배움을 게을리하며 재수가 없다'라고 가정하자)은 90% 한국 남성의 제2 사회화 기간인 군대 시기에 압축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군대 내 사병' 끼리는 실질적으로 같은 세대임에도 신구 세대의 상대적 관계가 너무나 쉽게 관찰된다. 군대에서의 반년은 세대로는 마치 5년 같달까. 이 곳은 '같은 세대 안 또 다른 세대차'를 구현한 실험장 같기도 하다.


군대에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레 그 문화에 적응하게 되고 특유의 일하는 방식에 숙달될 수밖에 없다. 1년을 넘게 같은 장소에서 먹고 자고 반복되는 일을 하면 이제 막 들어온 '신입'이 얼마나 어리숙하게 보일까.  '2층 침대 위' 선임들은 우리 동기들에 대해 한 마디씩 덧붙였다. "나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아이러니는 그 선임들이 나보다 6살은 어린 친구였다는 것이다. 사회에서야 내가 나름대로 경험이 있겠지만 (에헴) 여기에서 사회에서의 경험이나 전문성은 리셋된다. 이 곳 문화에 적응하고 복종하고 소위 말하는 기는 정도가 '에이스'의 표준이 되며 이는 계급 사회의 <상식™>이다. 나는 의경을 나왔다. 기안84 만화 <노병가>의 상식™ 정도는 아니겠으나 어느 정도는 그 문화의 잔상이 편린으로 남아있었다.


군대 시절 <상식™>은 사회의 상식과는 달랐던 것 같다.

<상식™>은 위계의 복종과 고생에 대한 보상심리로 구성됐다.

이러한 <상식™>은 1년 새에도 꽤나 많이 변했다.


동기들은 '이른바 촛불 기수' 중 하나였다. 가장 낮은 이경 때 촛불 집회가 막 시작됐고, 그 겨울의 광장과 거리는 추웠다. 그곳에서 매주 수십만 명을 목도했다. 우리는 3월 10일 탄핵 날 헌재 앞에서 긴장을 하던 기억을 공유했다. 나중에는 촛불의 기억을 가진 이들과 아닌 이들로 '세대'가 나눠졌던 것 같다. 고작 반년 정도의 시간이지만 이 고생한 기억은 우리의 자부심이자 피해의식이 되었다. (오후 8시까지 외출은 촛불 기수의 고생으로 이뤄낸 '전리품'이라는 식에 인식이다.) 스물일곱에 입대해서 제법 사회화가 된 나에게도 이 자부심과 피해의식은 꽤나 영향이 있었다. 나의 사회에서의 자아는 여전히 <상식™>에 저항했지만 나중에는 중대 내 비상식에 꽤나 무뎌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 기수의 <상식™>은 '윗 선'의 노력과 사회적 압력으로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막 입대한 친구들은 '우리 때'와는 다르게 어려운 청소를 몰빵 받지도, 휴게 시간에 잠을 못 자지도, '전파'라는 명목으로 알림 내용을 전하려 뛰어다니지도 않았다. 물론 이것이 당연한 상식인 것은 진작부터 알았다.


입대 1년 반쯤 되었을 때 동기들끼리 모여서 이제 막 들어온 신입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동기 하나가 한 마디 덧붙였다.

아휴.. 요즘 애들 왜 이러냐 진짜.
너무 편해서 그래.
나이로는 같은 세대인 그들은 기억과 경험으로 다른 세대가 됐다.
<2019, e-나라지표 참조, 인사혁신처「공무원보수규정」[별표13]>


우리 기수의 <상식™>은 정말 '상식'일까. 나보다 어렸던 나의 선임들이 공유했던 상식™은? 그보다 전 세대의 상식™은? 군대 시절 상식은 고생에 대한 보상심리에서 기인했다. 상식은 처음부터 '고생을 덜한 후배 기수'에 대한 피해의식과 인정 욕구로 발현됐다. 우리는 후임들이 왠지 편하게 지낸다 느꼈다. 그들도 고생하지만 이 친구들에게는 촛불이 없었으니 더 편하다고 생각했다. 군생활 시작부터 우리보다 급여도 많이 받았으니 더 윤택하다고 여겼다.(18년도부터 사병 급여가 2배 정도 늘었다.)


고군분투와 고생의 기억은 세대를 구성하고 결속한다.

고생한 세대는 '고생하지 않은' 이들에게 요구한다.

내 고생 좀 알아달라고.


그런데 이런 식으로 고생 배틀을 하자면 끝도 없다. 90년생 내 친구들이 일반적으로 군대를 갔던 09-11년도에는 병장도 10만 원 남짓을 받았다. 나는 그래도 수경 급여 40만 원을 받고 나왔다. 나의 아버지 세대는 그보다 훨씬 적게 받았고, 복무 기간도 우리보다 훨씬 길었다. 각 세대는 각자의 고군분투와 고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 기억은 세대를 구성하고 세대를 결속한다. (이러한 이유로 군대에서 만큼은 나의 세대는 90년생 친구들보다 6년은 늦다.) 한 편으로는 이제 우리 고생은 끝났다는 생각은 다음 세대에 대해 <이제는 너 차례다 임마>라는 못난 마음으로 표출될 때가 있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 때만큼 열심히 안 하는 것 같아서 짜증 난다. 여기서 더 꼬인 사람들은 후대가 고생을 안 하는 것처럼 보여서 짜증이 날 것이다.


나는 군대의 '짬질'과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 가지는 '너 임마 이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가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생각한다. 내 고생을 알아달라는 요구. 더 나아가 우리 세대 <상식™>을 따라달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대는 변하고 세상은 변한다. 우리의 <상식™>이 후대의 상식일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공유하는 기억이 다른 세대는 같은 시대에 다른 상식으로 살아간다.


각 세대는 공유하는 기억이 다르다

다른 시대에 태어나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영화 <국제시장>, 중장년층 이상 세대가 공유하는 집단 기억이 담겨있는 것 같다.


표준 국어사전은 '세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부모 일을 계승할 때까지의 30년 정도 되는 기간. ≒대(代).

ex) "이제 이 땅에서 번역되거나 재구성된 삼국지는 대개가 한 세대 가까이 오래된 것이 됐다."
<이문열, 시대와의 불화> 중

2. 같은 시대에 살면서 공통의 의식을 가지는 비슷한 연령층의 사람 전체.

ex) 젊은 세대

예시가 불친절하다. 공통의 의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3. 한 생물이 생겨나서 생존을 끝마칠 때까지의 기간.

예문이 없었다. 나는 이 정의를 어떤 유기체 종의 평균 수명 정도로 이해한다. 가령 <인간은 대체로 85년 정도 기대수명을 가진다> 의미로 받아들인다.


4. 그때에 당면한 시대.

ex) 통일은 우리 세대에 꼭 이루어야 할 최대의 과제이다.                              


3,4번은 현존하는 세대 차이를 다루기에는 다소 먼 정의다. 일제시대에 청년 시기를 보냈던 분과 나는 직접 갈등할 여지가 거의 없다.


1번 정의에 따르면 30년은 한 세대를 나누는 기준이 된다. 사회학에서는 대체로 이 정의를 따르는 것 같다. 2번은 앞선 군대 이야기에 가장 맞는 정의 같다. 나는 이 '공통 의식'이 세대가 공유하는 집단 기억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세대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그 세대가 공유하는 기억에 주목해야 한다. 저들이 우리와 어떻게 다른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탐구해야 한다.


세대에는 경험이, 그 시대가, 집단 기억이 녹아 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집단 기억은 같은 시대 안에서도 나라마다 다를 것이다. 80년대 20대를 보낸 미국인과 한국인의 기억이 같을 수는 없다. 그 나라에는 레이건과 터미네이터가 있었고 이 나라에는 전두환과 외인구단이 있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꽤나 동의한다. 지금 30살인 나와 20살인 친구들은 같은 시간을 다른 나이로 지나오고 있다. 우리는 특정 연도에 대한 시간적 거리감도 다를 것이다. 내게 80년대는 '음 조금 옛날이군.' 정도의 온도라면 그들에게 80년대는 60년대/70년대에 대한 감상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사실은 그 시대는 꽤나 차이가 있다는 말은 마치 '현대인에게 중종 때와 세종대왕 때 감성은 꽤 다르답니다!'에서 느끼는 당혹감을 감상으로 남길 것이다. 다행히도 30살 나와 20대 초반 친구들과는 '포켓몬'과 '디지몬'이라는 그들에게는 어린날 기억의 조각일, 희미한 연결 고리가 있다. 같은 게임을 하고 같은 만화를 다른 나이 때 보았다는 작은 고리!


태어난 시대가 다른 각 세대는 다른 나이로 같은 시대를 산다

각자는 다른 집단 기억을 가지고 있다

다른 집단 기억을 가진 각 세대는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꽤나 차이가 있다. 10년의 시간은 차이를 공통점보다 두드러지게 한다. 10년도 이러할진대, 그보다 태어난 시기 차가 크다면 차이는 더 두드러진다. 태어난 시대가 다르면 젊은 시기 경험한 기억도 달라진다. 게다가 이 나라는 너무 빨리 변했다. 50년 간 나라의 경제는 100배 넘게 성장했다. 87년 체육관 정권이 끝나고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기 시작했다. 불과 30년 남짓밖에 안됐다. 각 세대가 20살에 경험한 기억은 다른 차원 세계만큼이나 너무나 다른 것이다.

<한국 전쟁 당시 컬러 사진. 1947년 미군이 찍은 것으로 추정됨.> 우리 세대는 이 시대를 상상할 수 있는가?


시대가 너무 빨리 변하는 탓에 각 세대가 공유하는 기억은 참 다르디 다르다. 한 세대(30년)로부터는 이해의 어려움을, 두 세대(60년)로부터는 큰 낯섦과 거리감을 느낀다. 엄마 아빠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영화처럼 그려지기는 했다. 하지만 외할머니가 어린 날 경험한 일제 시대나 한국전쟁 때 이야기를 해주셨을 때 나는 막연한 흑백사진을 상상했다. 무엇이 있었고 없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시대.


의경 시절 촛불 정국이 한창이던 때 여러 집회 현장에 나갔던 기억이 있다. 이른바 '태극기 집회'에서는 군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노년층들이 많았다. 그들은 왜인지 군가를 틀고 젊은 시절 자신의 소속을 나타내는 깃발을 들고 시내를 아주 천천히 행진했다. 어떤 이들은 내게 다가와 자신들의 정당성에 대해 말했다. 우리 애국하러 나온 거라고. 고마운 줄 알아야 한다고. 4시간째 밖에 서있던 나로서는 그분들이 그저 빨리 지나가시길 바랐다.


군복을 입은 무리 중 어떤 이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우리 애국하러 나온 거야. 나라를 구하러 나온 거야"

그들은 내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무표정의 관찰자였던 나는 그들의 행동이 너무나 의아했다. 아니 군복은 왜 입는 걸까. 군가는 왜 트는 걸까. 나는 단지 그들이 젊거나 어린 시절 새마을 운동을 경험했을 것이고, 적어도 서른은 다되어서야 대통령을 투표로 뽑아봤을 것 정도를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짐작은 아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온 가족과 단칸방에서 살아본 적은 있으나 밥을 굶어본 적은 없다. 고교 시절 선생(여전히 나는 그를 존칭 할 수 없다.)에게 쉬는 시간 체벌을 받는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는 이유로 갑작스레 따귀를 맞은 적은 있으나 촌지를 내본 적은 없다.


지금의 내 나이, 과거의 내 나이에 그들은 무엇을 경험했을까? 무엇을 마주했을까? 무엇은 저들을 거리로 나서게 했을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전이 울렸다. "마지막 대열 00(음어) 지났습니다." 기대마를 나온 후부터 꼬박 5시간이 지나있었다. 그 날의 기억은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무엇을 남겼다.


각 세대는 각 시대의 어려움을 직면해왔다

서로 이해하지 않으면 차이는 때로는 두려움으로 때로는 혐오로 발현된다

영화 <사도> 아버지와 아들은 갈등하고 반목한다.


미디어에서 주로 보이는 세대 갈등을 아주 간결히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 기성세대의 생각

'어리다'는 말은 '어리석다'의 옛 말이기도 하다. 기성세대에게 젊은 세대는 '어리석게' 보인다. 고생과 고난을 모르고 자란 것도 모자라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것 같다. 관계에 대한 책임이 지기 싫으니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는단다. 이상하다. 우리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 젊은 세대의 생각

젊은 이들에게 기성세대는 답답하다. 고루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살아온 시대 기준을 강요한다. 알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다. 당신의 시대와 다르게 지금은 좋은 직장 들어가기가 너무 어렵다. 결혼은 개인을 상실하는 시작하기도 어려운 너무 비싼 선택이다. 애를 낳으면 '나의 꿈'은 더 요원해질지 모른다.

아직은 '젊은 세대'에 속하는 나이기에 <내 삶을 책임지지 않는 이들의 조언>은 고루하고 짜증 났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나서 보면 부모 세대의 어떤 조언이 곱씹어 보았을 때 꽤나 맞는 말이었다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시대가 달라 맞지 않는 것도 많았다. 나는 기성세대가 책임을 질 수 없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말할 수 없을 때는 조언하기보다는 그저 믿음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의 부모가 내게 준 것처럼, 널 믿는 나를 믿는다는 그 믿음.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각 세대는 자신의 시대를 견뎌내고 살아남았다

다른 시대에 태어나 같은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고생을 인정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믿는다.


한편 나는 각 세대가 각자의 고생을 해내 왔다고 생각한다. 조부 세대는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던 시대였다. 그때를 살아낸 기억은 강렬하게 그들의 삶 전반을 지배한다고 본다. 원칙은 없었고, 반칙은 만연했을 것이다. 그런 시대를 이겨낸 그분들을 나는 진심으로 연민한다. 남은 여생만큼은 편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의 부모 세대는 젊은 시절 분명 고성장기에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물가상승률도 끔찍하게 높았다. 그들은 분명 '살기 어려웠다.' 생존은 했으나 생활을 지키기 힘들었다. 노동권은 열악했고, 임금은 낮았다. 자고 일어나면 생필품 물가는 훌쩍 올라 있었다. 그 시기 대부분의 가정은 단칸방에서 한 식구가 모두 생활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안다. 가족이라기보다는 '식구'가 있고 개인은 없다.


우리 집이 첫 번째로 망했을 때 단칸방에 4명 식구가(희지도 문돌이도 태어나기 전이었다.) 살게 됐다. 그 집은 화장실이 밖에 있었다. 나는 그날 밤을 꼬박 설쳤다. 이제 나의 방이 없다는 의미는 개인으로서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생활이 부모 세대가 경험한 젊은 날의 대부분이었다면, '개인으로서 나'를 중시하는 요즘 애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도 이해가 된다.

<2016.06.01, 한국일보, ‘꼰대’ 임원 vs ‘무개념’사원… 세대 갈등에 발목 잡힌 기업>

지금 세대도 생활은 힘들다. 고성장기는 끝이 났고, 장기 저성장의 터널로 우리 사회는 들어섰다. 노력은 '노오력'으로 자조된다. 한편 초 연결 기술이 일상이 되면서 <개인의 시대>가 도래했다. 나보다 멋지고 잘 나가는 개인들이 너무나 많이 보인다. 그런데 나는 초라하다. 여전히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자아실현'이라는 것은 도무지 나에게 가능한 일인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인플루언서다 유튜버다 독립출판이다 세계일주를 한다는 자아실현의 홍수 속에서 여전히 나는 자아 미실현 상태로 남아있는 것 같다.


이때 무심하게 어떤 어른은 말한다.

"녀석아 그래도 결혼하고 애는 낳아야지"
내가.. 왜요?

각 세대의 가치관을 형성한 시대의 차이를 이해하지 않으면 서로는 증오하기도 혐오하게 되기도 쉽다. 노인은 '틀딱'이 되고, 중장년층은 '꼰대'가 된다. 젊은것들은 '철없고 나약하고 무례한 놈들'이 된다. (젊은 세대를 혐오하는 마땅한 표현이 없다는 데서 젊은 세대의 기성세대 혐오가 그 강도가 더 강하지 않은가 한다.)


결국 우리는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

다른 시대에 태어난 각 세대는 같은 시대를 아주 오래 함께 살게 될 것이다

<2017.5.16, 블로터, [불편한IT] 무인포스 확산···햄버거 주문이 버거운 노인>

나는 영원히 젊지 않다

나의 몸은 낡아가고 늙어간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노인이 된 나는 무엇으로 여겨질까.


갈등은 쉽게 드러난다기보다 훨씬 구체적인 차이로 일상 속에 잠재되어 있다.


당연하게도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구분은 상대적이다. 11살 어린 내 동생 희지에게 나는 기성세대다. 이러한 나에게도 기성세대로 밖에 불릴 수 없는 시기가 올 것이다. 나는 영원히 젊지 않을 것이다. 20살 어린 어른이 된 날로부터 서른 살까지는 체감으로 중학교 3년보다 짧았다. 시간이 흘러 시대가 변하고 언젠가 나의 젊음도 사그라져 갈 것이다. 나에게는 중년이, 이어서는 노년기가 올 것이고 그때의 사회와 나의 몸은 어떤 상태일지 짐작하기 어렵다. 나는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나는 '꼰대'가 '틀딱'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최근 앱 서비스 기획자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인터뷰와 관찰을 하다 보면 연령대 별로 앱을 쓰는 형태가 대단히 다르다는 인상을 받는다. 모두를 잡을 수는 없기에 기획 단계에서 가장 많이 하는 것은 '배제'다. 서비스의 주 연령대를 정한다. 그리고 서비스를 잘 쓰지않을 것 같은 연령대는 가장 나중에 사용성을 고려한다. 고려할 수 없다면 과감히 배제한다. 근 몇년래 패스트푸드 점에 도입된 키오스크(무인 주문 기계)를 사용하기 어려워하는 노년층이 많다고 한다. 그들 세대에게 터치 인터페이스는 도무지 너무 낯설어서 이해가 어려운 것이다. 나는 그들이 기획 단계에서 배제당했다는 생각을 한다. 내심 그들이 오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2012.09.09, 전자신문, 제1회 아이패드 캠프>

11살 어린 동생과 대화하다 보면 사고의 기본값이 다르게 세팅되어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물어보니 동생은 카카오톡을 중1 때부터 써왔다고 한다. 자기 스마트폰을 쓰기 이전부터 공기계로 해왔단다. 나는 카톡을 22살 때 처음 썼다. 다만 나는 인터넷은 초3 때부터 썼다. 생각해보니 희지는 더 빨랐다. 이 친구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주니어 네이버를 봤다. 88년생인 나의 형은 2016년 7월에 태어난 문하성 군의 아버지다. 지난주에 하성이를 보러 갔는데, 하성이와의 놀이는 물리적인 실체가 존재하는 장난감으로 놀기 반, IT 기기 함께 보기가 반이었다. 아직 4살밖에 안된 하성이는 유튜브에서 동영상 찾아보기를 너무나 잘했다. 나는 아이 패드를 21살 때 처음 만져봤었다.


나는 이내 두려워졌다. 저 아이가 내 나이가 될 때쯤, 나는 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일까? 다른 세대에 태어나 같은 시대를 살아갈 하성이의 세대는 어떤 기억을 공유할까? 나는 그들을 이해할까? 그들은 나를 이해하려 할까?


유기체 인간은 점점 오래 살아남는다. 출산율은 줄겠지만, 다양한 세대가 다른 시대에 태어나서 같은 시대를 사는 기간은 점점 길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제껏 목도한 적 없는 세대 차이의 시대를 곧 마주하게 될 것이다. 좋든 싫든 우리는 같이 살아간다.



어떤 세대가 어떠한 경향성을 가지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존재한다. 어떤 세대의 집단적인 체험에 의한 사고 형성을, 공통 체험을 하지 않은 다른 세대가 이해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불가능하다. 다만 나는 노력을 해볼 따름이다. 키오스크 앞에서 헤매는 어르신께 친절히 말을 건네어 볼 따름이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하니까.


확실한 것은 나는 나의 외할머니를, 건너 방의 나의 엄마 아빠를, 결혼한 형을, 옆 방 희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들과 나는 더불어 살아갈 운명이다. 앞으로 내가 사회에서 만날 다른 이들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꽤나 다르니까..





아.

다른 세대를 이해하기란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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