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지켜야할 것이지만, 모든 사랑이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야
내가 막 스무살이 되던 때였어. 나는 막 대학생이 되었고 캠퍼스의 봄날을 누리고 있었지. 빽빽하게 수업이 채워지던 고3때를 생각하면 대학의 수업 시간 사이 사이는 참 길었어. 그때(09년)는 스마트폰이 없었어. 나는 피시방에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커피도 마실 줄 몰랐어. 그래서 내가 공강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학교 안 나영주 열사 추모탑 옆 벤치에서 책을 읽고 가끔은 잠을 청하는 거였어. 이 취미가 참 좋은 이유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들을 바라보게 된다는 점이야.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서 나는 책을 읽다가 오가는 이들을 참 많이도 바라봤지.
지난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봄날 캠퍼스에는 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걷는 캠퍼스 커플들이 참 돋보여. 그 중에서도 내 동기인 새내기 커플들은 온갖 걱정들을 튕겨내는 버프(상승효과)를 가지고 있어서 그들에게 이 봄날의 사랑은 모든 걱정을 녹여버리는 묘약이었지. 완연한 봄날, 사랑이 시작되는 풍경은 그들의 삶을 축복하고 있었어. 꼭 10년이 지난 요즘처럼 그때도 나는 생각했지. 아 부럽다. 부디 그들의 사랑이 영원하길!
할머니가 위독해지셨던 것도 그 즈음이었어. 할머니는 삶의 마지막 3개월을 의식없이 보내셨어. 할아버지가 부쩍 한숨을 쉬는 날도 많아지셨대. 벚꽃이 질 때 즈음 할머니는 떠났고, 남은 가족들은 마지막을 준비해야 했어. 여든이 된 할아버지도 평생을 함께한 반려자를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했지. 이제 갓 스무살이 된 내가 보기에 그 과정은 고되고, 쉽지 않아 보였어. 할아버지는 그 과정을 모두 지켜내야만 했고, 좀처럼 말이 없으셨던 할아버지의 표정에서 나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감정이 느껴졌어. 나는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지. 할아버지는 한 번도 소리내어 울지 않으셨어.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는 말했어.
참으로 허망하다. 허망해...
그때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울음과 한숨이 섞인 파열음이었어. 허망하다는 말. 그 말이 차마 표현 못할 감정은 10년이 다되어서도 잊혀지지 않아. 전쟁이 끝나고 50년 넘게 함께한 반려자를 떠나보내야 하는 마음. 나로서는 감히 공감할 수 없는 아픔이셨을 거야. 할아버지의 허망하다는 말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공허감과 상실감, 황망함이었을지 모르겠다. 이 말로도 그 마음을 담을 수는 없겠지.
며칠 후 다시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서 할아버지의 말을, 표정을 떠올렸어.
사랑은 결국에는 끝이 날 수 밖에는 없구나. 아 모든 사랑은 끝이 나고야 마는 구나. 내 앞을 지나는 이제 막 시작한 커플들의 사랑의 풍경과 며칠 전 지켜본 평생을 지켜온 사랑의 끝. 두 장면의 간극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해하기도 느낀 바를 설명하기도 참 어렵다.
왜 사랑을 해야만 하는 거야?
이 질문의 답은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 날도 오늘도
2년 후 여름, 할아버지도 떠나셨지. 두 분을 함께 모셔드렸어.
그곳에서는 부디 허망하지 않으시길.
<왜 사랑을 해야하는가?>라는 답은 삶을 대하는 태도와 철학과도 연관되는 문제다. 인간의 삶은 무수한 관계로 구성되어 있고, 사랑도 본질적으로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관계는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사랑도 관계의 종류이자 어떤 상태이기에 우리 삶은 사랑과 강하게 관련된다. 사랑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관계가 있던가?
인간의 삶은 행복해야한다. 이것은 그냥 선언이다. 인간이 행복해야하는 이유는 증명보다는 믿음이 필요하다.그런 이유로 과문한 나로서는 <왜 사랑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행복하기 위해>라 답할 것이다. 역시나 이것도 아는 것이 아닌 그저 선언이다. 행복하기 위해 사랑한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은 순간인 점이 아니라 과정인 선이다. 삶의 과정은 선의 여정이며, 끝나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인간의 삶은 언젠가 끝날 것임에도 '지나는 과정'은 생각보다 짧지 않다. 인간은 그 여정동안 더 행복하고 덜 고통받길 바라며, 여러 감정을 느끼고 고난을 이겨내고 극복하며 삶을 채워나간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당신의 삶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나의 부모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삶은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당신들께서는 행복하기 위해 사랑했고, 사랑해왔을 것이다. 비록 끝이 났고, 언젠가 끝이 날 사랑이고 삶이지만.
사랑이 시작되기란 어렵다. 하지만 지키기보다는 덜 어려울 것이다. 사랑을 지키는 과정은 그 자체로도 자뭇 어렵다. 하지만 흔하고 정말 빠지기 쉬운 어려움은 어느새 사랑을 지키기 위해 지키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랑을 하다보면 나와 상대의 행복이 아니라 어느덧 '관계를 유지'하는 것, 그 자체에만 천착하고 과몰입하기 너무 쉽다.
봄날 같은 사랑을 지날 때 도취적 상태에서 우리는 상대에, 관계에 쉽게 빠져버린다. 서로의 존재는 서로에게 축복이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술이 바짝 마르는 설레임과 긴장이 이어진다. 서로의 일상과 에너지가 상대를 향한다. 그래도 괜찮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언제나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전체 삶의 여정 속에서 이 사랑의 허니문 기간은 그다지 길지 못하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삶, 개인의 삶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있다. 아니 돌아와야만 한다.
허니문을 지난 사랑은 우리에게 '어려움'을 극복할 것을 요구한다.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자신에게 향했던 삶의 방식을 서로 함께 맞춰나가야 하는 어려움. 이 어려움 과정에서 우리는 강렬한 유혹에 빠진다. 그것은 상대를 존중하는 사랑이 아닌 <상대를 가지려는 마음>이다.
사랑이 깊어가며 한 개인은 상대와 하나가 되고 싶다. 많은 이들은 사랑에서 '하나 됨'을 <병합과 통제>로 오해한다. 관계 유지와 상대를 가지기 위한 일방적 헌신, 상대 희생의 강요, 기대심리로 상대를 옥죄는 것. 이는 사실 상대를 가두기 위한 억압이다. 이 과정은 결국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사실은 이기심을 위한 일인데, 상대를 위한 것이라 자신과 상대를 속인다. 이러한 마음의 역설은 관계에 대한 과몰입이 결국 통제를 하려는 개인, 그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완벽한 통제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개인은 끊임없이 상대를 통제하려하고, 집착하고, 의심한다. 상대를 믿을 수 없는 탓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서로는 빛을 잃는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행복할 수 없기에.
나는 상대가 될 수 없고, 상대는 내가 될 수 없다. 나는 상대의 것이 될 수 없고, 상대도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우리 각자는 서로 분리된 개인이라는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 한계를 인정해야한다. 이제 다시 선언한다. 어느 일방의 굴종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어서는 안된다!
개인으로서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서로가 함께라는 모순. 분명 가능하지만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온전히 상대를 믿을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사랑에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하고, 서로를 믿어야 한다. 작게는 상대가 나를 해하지 않을 것이며,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끝내는 '우리'를 위해 살아간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하루 아침에 이러한 믿음이 만들어질리 만무하다. 때문에 사랑은 점이 아닌 선의 여정이다. 신뢰를 쌓아가는 선의 여정. 정말이지 사랑은 삶과 비슷하다. 다시 잊지 말아야할 것은 사랑에서도 역시 삶과 마찬가지로 사랑 그 과정에서 행복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 사랑을 하고 행복하기 위해 사랑을 지키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믿는다.
삶처럼 사랑도 삶이 끝나서 끝이 나거나 관계 속에서 서로가 힘을 다하면 끝이 난다는 점에서 결국 끝이 예정되어 있다. 예정된 끝으로 달려가는 우리는 살아가고 사랑하며 어떻게 그 여정을 지날 것인가?
유-우명 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의 프랭크와 클레어는 부부다. 그들은 분명 서로를 사랑한다. 그런데 어쩐지 이들의 사랑은 헌신과 도취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차라리 이익을 공유하는 팀에 가깝다. 그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협력한다. 이들은 상호 간 이익 극대화를 위한 '팀'이며 일면 거래적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극단적으로는 둘의 관계는 유지되어서 각 개인이 더 멀리, 더 높이 갈 수 있다는 '이익'에 대한 믿음. 그것에 기반한 것처럼 보인다. 이들에게는 '우리'보다 각 개인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들은 분명 사랑한다. 그런데 사랑의 주어는 '우리'가 아니라, 철저히 '나'이다. 각 개인의 독자성을 과하다 싶을만큼 철저히 지킨다. 그들은 상대에게 말하지 않는 서로의 사생활이 있다. 어딘가 모르게 그들은 상대의 행동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 같다. 숨은 의도가 없을지 의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그들의 '팀웍'은 <거래적 동반자>로서, 이익 공유가 흔들리고 의심받을 때 끝날 것이다.
삶에서 '나'를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사랑을 단지 나쁘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관계 속에서 서로는 서로의 균형을 위해 노력을 다할 것이고, 그 균형이 맞는다면 관계는 무리없이 지속될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연인, 부부 관계가 이러하지 않을까도 싶다. '상호주의'에 입각한 외교같은 사랑이랄까. 좋은 '딜'이다.
가장 비극인 사랑(이를 사랑이라 불러야하는지도 의문이다.)은 일방의 경제력이나 권위 탓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종속되어 '끝나지' 못하고 연명되는 관계다. 이 관계 속에서는 상호 존중이 약하거나 없기 때문에 한 쪽은 서서히 개인으로서의 자아, '나'를 잃어간다. 신해철이 말했던가. '헤메는 쥐떼보다 정원에 메인 개가 나은가!' 인간은 개가 아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개인으로서의 자유를 원한다. 인간으로, '나'로 서기를 바라는 자존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과연 종속된 사랑에서 인간은 정녕 행복한가? 이런 사랑은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사랑이 종속으로 변해갔다면, 그것에서 진정 행복할 수 없다면 끝내는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삶은 행복해야하고, 사랑은 그 과정 중 단지 (좀 많이 중요한) 하나일 따름이다.
사랑에는 여러 모습이 있고, 저마다의 풍경과 해상도를 가진다. 다른 넓이와 깊이를 가진다. 봄날의 시작되는 도취의 사랑, 이익과 번영을 위한 거래의 사랑, 어쩌면 상대에 대한 통제와 굴종을 강요하는 사랑까지. 이것이 사랑이라면 이것은 사랑이 아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관계도 있다. 관계 속에서 '나'를 잃는 경우가 그렇다고 나는 선언하겠다. 그저 선언이다. 설명이 아니라 증명이 아니라 이것이 맞다고 믿는 '공리적' 선언이다.
관계는 '책임'을 요구한다. '책임'만큼 관계에서 숭고하고 사소한 말도 없다. 사랑은 가장 큰 책임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서로가 끌리고 선택하여 사랑을 시작했다면, 사랑을 지키기 위해 서로는 서로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임지지 못했다면, 사실은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사랑에서 '책임'이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모두를 지키는 것은 이상이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1) 도리의 책임 - 관계가 요구하는 '행동과 마음'을 다하는 것.
2) 매력의 책임 - 설레임과 친밀감을 경영하는 매력을 지키려는 노력
3) 믿음의 책임 - 나를 믿고 상대를 믿고, 함께 '우리'를 믿는 것.
도리의 책임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책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응당 해야할 '행동'을 하며 '마음'으로도 위했느냐는 것이다. 남겨진 자녀에게 마음없이 돈 몇 푼 양육비라며 던져주는 부모는 '사랑의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 없는 책임은 '의무'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넉넉하지 못하면 '의무'조차도 하기 어렵겠지만, 개인에게는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 있다. 최소한 개인은 마음에서라도 지극할 수 있다.
내가 정말 강아지 문돌이를 사랑한다면 예쁘고 귀여울 때만 예뻐하고, 늙고 병들 때 외면해서는 안된다. 문돌이를 목욕시키고, 아프면 병원에도 데려가고 생각날 때마다 깨끗한 물을 주고, 제때 밥을 주어야 사랑이다. 이것은 책임이다. 사랑한다면, 사랑 이전에 관계한다면 당연히 지어야 하는 책임이다.
애초부터 사랑이 시작되려면 서로를 끌어야한다. 그러자면 '친밀'하거나, '설레임'이 있어야 한다. 사랑이 시작되려면 친구처럼 가까워서 일상에서 개인으로 마주하거나, '설레임'으로 긴장되어 서로를 자석처럼 끌어야한다. 그리고 사랑의 마음이 유지되려면 서로는 때로는 친밀해서 편안하면서도, 때로는 설레임으로 긴장되어야 한다. 사랑하며 '재미'가 없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있다. 설레임이 없는 상태다. 만약 설레임만을 추구한다면, '관계의 화전민'이 될 것이다. 그런 사랑은 깊이가 없다. 하지만 설레임 없는 사랑은 '푸석푸석'할 수 있다는 생각은 든다.
사랑에서 친밀감이 없으면, 서로는 끝내 한 사람의 인간으로 가까워질 수 없다. 서로는 긴장하고 어색해진다. 서로의 '취향과 세계를 나누는 즐거움'은 없고 일방이 동경한다. 관계에서 동경으로 바라보는 이에게는 '나'가 없다. '나'가 없으니 서로는 서로를 바라볼 수가 없다.
어려운 일이지만, 사랑의 관계에서 개인은 '매력'이 있야 한다. 종속되지 않은 한 사람의 개인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나'가 되어 상대에 대해 '친밀감'과 '설레임'을 잃지 않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매력의 책임'이다.
앞서 이상적인 사랑은 각자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또 '우리'인 역설적인 상태라 말한 바 있다. 이 관계에서 서로는 서로를 여전히 끌지만, 이것은 일방적 <병합>이 아니라고도 말했다. 또한 사랑은 상호간 존중과 존경하는 마음으로, 함께 삶과 사랑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과정. 그리고 결과라 선언했다.
삶과 사랑이 여정이라면 언제나 아름답고, 언제나 모자람 없고, 언제나 행복할 수 만은 없을 것이다. 때로는 선택하지 않은 고난이 올 것이고, 삶과 사랑은 자신을 지킬 가치가 있겠느냐고 되물을 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이때 사랑에서 나는 개인으로서 '나'를 잃지 않을 것이라는, 나를 지켜갈 것이라는, 그럴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또한 상대를 위하는 내가 있을 것을 믿어야 한다. 다음으로 상대가 한 개인으로 우뚝 서도록 도우며, 상대가 나를 위할 것을 믿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서로는 삶과 사랑의 여정에서 고난과 행복을 함께 나눌 것을 진정으로 믿어야 한다. 결국 사랑에서 우리는 '나'를, '너'를, '우리'를 믿어야 한다.
요며칠 맑은 날이 이어지다 어제는 비가 내렸다
길가의 벚꽃은 진작에 모두 져버렸다
금방 더위가 찾아오겠지.
봄날이 가고 있다.
못한 것인지 안한 것인지
봄날에 사랑하지 않았다.
어떤 사랑을 하고,
어떻게 사랑을 지키고
언제 사랑의 시간을 지날지
나는 잘 모르겠다.
참.
어려운 사랑.
아
사랑을 지키기란
어려울 거야.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