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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철 May 10. 2019

차마 사랑을 끝내기란 어렵다

사랑. 끝나기란 쉽지만, 끝내야 할 때 끝낼 수 없었어. 차마 나는

이별에 의미를 두지 말라는 말

가장 보편적인 고통이니까 각 개인에게 별 의미 없는 일이라 말할 수 있는 걸까?

"와이퍼는 뽀드득 신경질 내는데" 월간 윤종신 '이별택시' MV


어느 날 사랑이 끝이 났어


그것이 사랑이었는지는 모르겠어. 오랫동안 사랑이라 믿었으니 사랑이라 해두자. 사랑이 끝나던 날, 밥에서는 모래알 맛이 났어. 무엇을 먹어도 쓴 맛이 났어. 잠이 많은 내가 뒤척이다 계속 깨고는 했어. 불안한 각성이 이어졌어.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생각이 나고 '이랬으면 어땠을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같은 부질없는 생각과 후회를 하다가 기운이 다하면 꺼지듯 잠이 들었지.


보통 사랑은 '성적 긴장이 있는 상대와의 애착' 관계로 여겨진다.

이 관계의 끝인 이별은 막연히 아픔, 슬픔, 괴로움으로만 낭만화된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말하지도 묻지도 못한 채로


사랑이 끝이 났든, 내가 끝을 냈든. 의미를 두었던 만큼, 애착을 가졌던 만큼 상실감은 커졌지.

평범했던 일상은 지옥이 됐어.

무엇을 해도 즐겁지 않고 막연한 막막함과 한숨. 한없이 작아지는 나.

그래 그게 이별이었어.


많은 사람들은 사랑의 끝, 그러니까 '이별'을 낭만화하는 것 같아. 여기에서 낭만화되는 이별은 친구나 가족의 상실이 아니라 애착을 두었던 연인과의 연이 끝나는 것을 말해. 이별은 술 한 잔 나누며 토닥이는, 누구나 거치는 시간 정도로, 사랑 노래들의 흔한 주제로 치부되지. 사랑 노래는 말해 이별은 아프다고 슬프다고 괴롭다고 시간을 돌이키고 싶다고. 드물게, 떠난 이여 행복하시오. 도 있긴 한데 흔하지 않아.


이별은 누구에게는 끔찍이도 아프고 슬프고, 괴로운데 생각보다 많이 공감받지는 못해. 거의 모두가 언젠가 한 번은 하는 경험이기 때문이겠지. 이별한 이에게 사람들은 말해. 모두 다 그런 거야. 나도 그랬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다 지나갈 거야.

솔직히 아픔, 슬픔, 괴로움을 이겨내는데 별 도움 안 되는 거지 같은 조언이라는 생각도 들어


술 한 잔 기울이며 여러 말들을 하지만 결국엔 이 말이야.


너무 의미 두지 마.

의미라. 의미는 무엇일까? 사랑하던 이에게 내가 '애착을 두던 것'? 그 과정? 그랬던 과거의 나? 무엇이 의미이고 의미가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은 이별의 상흔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나이기에 이 '의미를 두지 말라'는 말에 대해 차분히 고민해보게 돼. 애착을 두었던 관계가 끝이 났다면, 그것이 이별이라 불리는 것이라면, 정말 그 끝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 거의 모든 이가 한 번은 경험하기 때문에? 보편에 가까운 아픔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별은 별 의미가 없고, 사소하고 심지어는 아무것도 아닌 걸까?


이별의 상처를 보는 것은 딱지를 떼는 일이 아니라

상처를 진단하고 처방하여 치료하기 위한 것.

사랑의 경험과 그 끝이 내게 무엇으로 남았는지 곱씹어보는, 나를 위하는 일


의미두지 말라는 말은 아마도 '이별을 지나는 시간'에 덜 아프기 위해, 빨리 아픈 시간이 지나도록 하기 위해 덜 생각하도록 하는 것일 거야. 더해지는 이별의 낭만화는 사랑의 끝을 그저 아프고 슬픈 시간으로 덧칠해버려. 어쩌면 마치 그 시간이 없어야 하는 시간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어. 하지만 아무래도 이상해. 아프기 위해 아플 필요는 없지만, 몸이 아플 때는 그 이유를 찾으려 하는 것처럼, 이별로 인한 아픔에서도(게다가 정말 몸까지 아파버리니까)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이 정말 의미가 없을까?



상처가 나서 병원에 가면 의사는 상처를 볼 거야. 의사는 상처를 보고 언제 무엇으로 왜 상처가 났는지 물어볼 거야. 그리고는 덜 아플 방법을 고민하고 약을 처방하고 치료를 할 거야. 다양한 상처가 있듯 다양한 이별의 아픔이 있을 거야. 이 다양한 상처와 아픔을 단지 '괜찮을 거야', ' 다 지나갈 거야'라는 말로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신은 극심한 자상을 입었군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테니 그냥 참으세요." 이렇게 말할 의사는 없겠지.


이별의 의미, 사랑에 끝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상처의 딱지를 떼자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있는 그대로 보고 직면하고 상처가 난 자리에 딱지가 앉도록 하고, 끝내는 사랑의 생채기가 아물게 하기 위함이야.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야. 지나간 사랑이 무엇이었냐에 따라 지극히 아플 수 있는 일이니까 아픈 상처를 만지듯 조심스러워야 해. 물론 조심스러움과 회피가 다르다는 것은 분명해.


다시 말할게. 단순히 이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자는 것이 아니야. 이별의 아픔, 그 이유를 찾으려 하는 일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아픔의 원인을 찾고, 가능하다면 덜 아플 방법을 고민하고. 혹시 '사랑의 끝'이 사랑을 끝낸 이들에게 어떠한 의미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 사랑은 내게 무엇이었는지. 사랑하던 이에게는 어떤 것이었는지.

그래서 내게 무엇을 남겼는지 고민해보고, 그 시간의 유산을, 나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야.


우리

용기를 내야 해.

내가 보낸 시간을 다시 마주할 용기



결국 모든 사랑은 끝이 나게 되어있다.

방점을 둘 것은 끝난다는 사실이 아니라 <함께 지나온 시간>이 남긴 의미와 좋은 끝이다.

삶이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사랑도 그렇다. 어떤 사랑이 아주 오랫동안 삶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고 해도 결국 사랑이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소멸 없는 삶이 저주인 것처럼, 끝없는 사랑은 저주 일 것이다. 소중함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한한 것은 유한한 것보다 소중하기 어렵다. 끝이 있기에 지나는 시간은 소중하다.


삶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반드시 끝이 나며

유한하기에 지나는 시간은 더욱 소중해진다.

그러나 방점을 둘 것은 '끝'이 아니라 <함께 지나온> 시간이 남긴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삶이 그렇듯 사랑은 반드시 끝나게 되어있으며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의 완성이 죽음이듯, 사랑의 완성도 마침표에 있다. 여생을 함께 보내며 서로를 존경하며 함께 끝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것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는 것을 안다.


한편 삶의 모습처럼 사랑은 참 많은 풍경과 다양한 해상도를 가진다. 무엇이 되었든 사랑은 근본적으로는 관계다. 때문에 사랑에 대한 생각을 말하려면, 그 사랑이 어떤 관계에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지 정해두지 않고 두리뭉실 넘어가서는 안된다. 아마도 사랑에는 부모님과의 사랑, 형제자매와의 사랑, 반려동물과의 사랑 등 많은 관계의 양상이 있을 것이다.


보통 '이별의 고통'으로 말해지는 사랑은, 쉬이 낭만화되는 사랑은 '성적 긴장이 있는 상대와의 애착'을 두었던 관계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오늘 말할 사랑의 관계. 사실 이 관계는 참 이상한 관계다. 그리고 더욱이 위태롭다. 쉽게 끝을 맞이한다. 친구도 아니고 부모나 형제도 아니다. 한 때는 끔찍이도 아끼며 붙어있고 소중했던 이를 나중에는 마치 없는 존재처럼 대해야 한다.


하지만 '끝'에 방점을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음의 가능성이 삶을 더 소중히 만드는 것과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삶을 망치는 것은 다르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결국엔 끝난다는 사실이 사랑을 지나는 시간을 망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나는 시간 동안 고통받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나와 너와 우리의 행복을 위해 하는 것이 사랑이다. 지나는 시간도 끝을 결정할 때 조차도.


사랑의 좋은 끝은 지극히 어렵다.

그 끝은 우리가 함께 지나온 시간과, 함께하지 않을 남은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끝이 난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끝낸 사랑.


사랑의 시간은 어떤 형태로든 사랑을 지나온 사람에게 흔적을 남긴다. 지나온 시간은 마침표를 찍는 순간의 기억으로 그 의미가 더해지거나 빛을 바랜다. 두고두고 떠오르고 곱씹어볼 정도로 좋았던 사랑의 기억도 악몽 같았던 끝으로 부정하고 싶은 시간이 되기도 한다. 사랑을 '지나는 과정'의 기억 못지않게 '끝'의 기억은 각 개인의 삶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친다. 좋은 끝이 중요한 이유다.


사랑의 시간을 지나오며 잘 지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좋은 끝'은 정말 어렵다. 끝을 망치지 않기란 어렵지만 그래도 잘 끝내려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끝은 우리가 선택한 끝이길 바란다. 나와 그리고 함께 지냈던 이의 지나온 시간과 함께 하지 않을 남은 삶을 위하여.

우리가 선택한 끝.



최악의 이별이 내게 남긴 것

태양을 떼어버린 지구는 혼란에 빠지지만, '나'로 살기위한 것이라면 해내야만 하는 것

사랑은 끝이 나게 되어있지만 끝을 내야 할 때가 있다. 아주 오래전 나는 지옥 같은 이별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사실 이별 그 자체보다도 그 방식에서 겪은 충격이 더 컸다. 사실 그 사랑은 돌이켜보면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이어서는 안 된다. 이 사랑에는 '나'가 없었고, 행복이 없었고, '관계'를 지켜야 한다는 당위적 노력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은 끝나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랑은 서로의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하다못해 이익 균형을 맞추는 거래적 사랑일지라도 여기에는 '나'가 있고, '너'가 있다. 끝내 '나', '너'를 지키고 존중하며 '우리'의 울타리를 만들어가는 사랑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튼 나는 '나'를 잃어가고 있었고, 이 관계에는 상호 존중이 없었다. 하다못해 거래적 사랑조차 될 수 없었다. 회고해보면 이 관계는 시작할 수는 있었으나 지킬 가치는 없었고, 끝이 나야만 하는 사랑이었다. 나는 그때 그것을 몰랐다. 알았어도 진정으로는 몰랐다.


비참한 사랑의 기억과 그 경험을 완성한 최악의 끝

이것이 사랑이라면 차마 사랑이라 부르고 싶지 않았다.

다만 이 경험조차도 사랑의 의미와 그 끝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어린 나는 '헌신'의 의미를 착각하고 있었다. 언제든 상대가 떠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상대에게 나의 자아를 위탁하고 주는 행위에 과몰입하게 만들었다. 관계 속에서 나는 언제나 무리했다. 관계가 지속될수록 나는 상대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그럴수록 상대는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자신의 상처를 무기로 쓰는 상대, 그를 바라보는 외바라기 관계에서 나는 작아지고 있었다. 나의 가짜 헌신은 굴종과 예속은 있었으나 단호함은 없었다.


이 유사 사랑 관계의 완성은 '끝'에 있었다. 오래전 어느 날 상대는 홀연히 사라졌다. 일방적 언사를 남겨두고는 단절됐다.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상실감에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나는 운 좋게도 그 과정에서 좋은 이들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다. 감사하게도 그들은 나의 이별을 '낭만화'하지 않았고, 내가 처한 상황의 개별성과 특수성에 주목해주었다. 그러나 결국 이겨낼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극심한 혼란 속에서 다시 자리에 멈추어 서다


나는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의미를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진심으로 그 사랑이 끝난 것에 안도한다. 최악의 이별 경험에서도 나는 온전한 개인으로 다시 태어날 기회를 찾았다. 썰물이 빠지고 폐허만 남은 밑바닥을 바라보며 나는 비로소 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예정된 끝이 찾아올까 두려워 그 사실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끝이 날 것이 아니라 끝내야 했다. 내게는 마침표를 용기가 필요했다.

자유로운 '나'로 살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태양을 떼어버린 지구는 빛을 잃는다. 하지만 그것이 가짜 태양이었다면 지구는 용기를 내야 한다. 예속되고 속박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스스로 빛날 수 있는 지구는 가짜 태양을 떼어내야 한다. 그것은 뼈가 시릴 정도로 추울 것이고 아플 것이다. 비참할 것이다. 가짜 태양에 예속되었던 만큼 혼돈은 찾아올 것이며 고통 속에서 절규로 울부짖을 것이다.


그러나 믿었던 가치가 거짓이었다면, 인간은 용기를 내야 한다. 도취된 사랑에서 개인은 자신을 잃기 쉽다.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지나는 관계는 무엇인지. 상대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직면하는 용기를. 그리고 결정하는 용기를.



비참한 이별에서 이상적 이별을 그리다

나와 너, 우리의 행복을 위해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을 끝낼 것을 선택하기

영화 <노트북>  중 이별 후 남긴 편지


가장 비참한 이별에서 나는 이상적 이별을 그렸다

이것이 이상인 이유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어렵고 어렵다. 하지만 어렵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도 본질적으로 관계다. 관계에는 내가 있고, 상대가 있다. 서로를 발견하고 상대에게 도취되어 설레임을 느끼는 사랑의 단계를 지나면, 사랑은 서로를 존중할 것을 서로를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는, 때로는 일방은 함께 지내다 사랑을 그만두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다만 사랑을 지킬 때처럼 끝에서도 '책임'은 요구된다.


보통 이별이 비참한 비극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나의 의지와 무관한 요인으로 끝이 '결정'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조건이나 상황이 맞지 않아서, 나 또는 상대가 문제를 일으켜서, 일방이 '통보'하고 다른 쪽은 '감내'해야 해서. 준비되지 않은 채 갑작스런 충격을 받게 된다.


보통은 이 과정에서 한쪽은 '업보'를 남긴다. '마음 빚'을 남기고 시간이 지나 돌이켜 보았을 때 자신이 무엇을 한 것인지 '인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났을 때 '잘 지내냐는 그때는 미안했다'는 거지 같은 말을 남긴다. 사실 이는 지극히 이기적인 행동이다. 자신의 마음속 한 켠 불편함과 '마음 빚'을 덜기 위해 사면받기를 원하는 이기심의 극치다.


일방적인 이별은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돌아서며 마음 빚이 남지 않도록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끝'으로 향하는 마음을 서로는 미리 알 수 있다면 이상적이다


나 역시 끝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한 이에게는 미안함을 느꼈다. 그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나 내가 상대에게 받은 메시지는 내게 다음과 같은 마음이 들게 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의 마음 빚을 덜어주지 않을 거야.
당신을 사면하지 않을 거야.
나는 당신이 보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아.
알아서 자기 길에서 행복하길 바랄 따름이야.
하지만 그 옆에 나는 결단코 없을 거야.


역시 하지 말아야겠다. 미안함조차 '구원'(仇怨)을 남긴 이에게는 죗값이다.


이상적인 사랑의 끝은 사랑이 시작되고, 지속될 때처럼 서로를 존중하고 바라보는 과정의 연장이자 마침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상대와 자연스레 멀어지고 그라데이션을 거쳐서 서로가 서로에 대한 완충과 준비를 하며 끝내 마침표를 찍는다면, 사랑의 끝은 힘겹겠지만 퍽 이겨낼 만한 충격이 될지 모른다. 이상적인 사랑의 시작이 함께 끓어올라 함께 상승하는 것이라면 끝날 때도 함께 식어가고 그 과정에서 예의와 존중을 다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끝을 향하는 관계의 이상적 그라데이션


의지와 무관하게 사랑이 끝나는 날은 온다. 그 날이 오기 전 사랑을 끝내야 한다. 그 신호는 '나'를 잃어갈 때, '서로'를 바라보지 못할 때, 고난을 '함께' 이겨나갈 것이라는 약속을 내면에서 암묵적으로 철회할 때다.


그러나 현실에서 많은 경우는 한쪽은 끝내려 하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 것이다.

서로의 성숙이 필요하다. 이상적이지만 서로는 이랬으면 좋겠다.



- 이별을 말하려는 이가 해야 할 것

당신이 상대를 사랑했다면 그 끝에서 아프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당신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상대가 여전히 당신을 향한 마음이 각별하다면, 솔직해져라. 이 사랑을 끝을 내야 하는 이유.
우리가 계속 함께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가능한 솔직히 말해라. 당연히 그 과정에서도 배려해라.

다만 상대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사전에 충분히 명시적인 시그널을 주었으면 좋겠다.
연락의 빈도와 그 온도가 변하더라도 냉-온이 아니라 중간에는 미지근함이 있었으면 좋겠다.
'끝'을 말하는 순간은 꼭 마주했으면 좋겠다. 잠적하지 말라.

그리고 이 관계가 자신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도 상대에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단호했으면 좋겠다.

현실에서는 '안전 이별'이라는 이슈도 있다. '완충'과 준비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무작정 붙잡으려는 이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며 폭력적으로 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불행히도 상대의 인격이 사랑할만한 자격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그가 사랑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관계에 속박된 마음일 것이다. 부디 당신이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길 바란다.


이별을 고하는 이는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로 갑작스레 '끝'을 맞이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의 마음을 암시하지 말고 '명시'했으면 좋겠다. 앞서 말한 상대가 극단적인 일부 상황을 제외한다면 용기 내어 끝의 순간을 직면했으면 좋겠다.


그저 잠적하거나 문자 한 통. 메시지 한 통. 남긴 채로 관계를 끝내는 것은 불편함을 직면하기 싫은 것이다. 관계의 존중이 딱 그 정도였던 것이다. 마침표를 확실히 찍지 못하면 상대는 관계의 끝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별을 말하는 이는 높은 확률로 '마음 빚'을 남기게 된다. '마음 빚'과 잘못만큼의 '구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을 위해 이별하려는 이는 용기를 내야 한다.



- 이별을 마주 당한 이가 해야 할 것

만약 당신이 상대에게 '헌신'함을 이유로 헤어지기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단지 상대에 대한 수동적 통제욕이 발현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욕구에 자신의 마음이 잡아먹힌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이별을 말하는 이가 관계를 이어가지 못할 이유를 솔직히 말해주었다면, 당신은 충분히 들으라.
그리고 당신도 느낀 바를 말하라. 이 관계에서 스스로에게 '나'가 있었는지,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 했었는지 따져 물으라. 만약 지속된다면 그럴 수 있는지도 솔직해져라.
그렇지 않다면 끝을 마주하라. 부디 너무 매달리지도 무작정 찾아가지도 말아라.


어떤 이들은 이별을 고하지 않기 위해, 이별을 유도한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고 상대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만든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랑의 관계에서 비겁한 것이다. 그것은 그라데이션이 아니라 일방적 회피다.


또 이별을 마주당하는 이들 중 상당히 많은 이들은 관계에서의 '헌신'을 착각한다. 조건 없는 헌신, 이유 없는 사랑은 부모가 자녀에게나 줄 수 있을 것이다. 내 몸의 일부였던 것에게나 줄 수 있는 것. 그마저도 줄 수 없을지 모른다. 만약 조건 없는 헌신을 진정으로 주었다면, 떠남조차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헌신하는 마음 자체에 몰입하고 볼모로 잡혀있는 것은 아닌가? 사실 이는 헌신을 착각하는 것이며 이기적인 것이다. "네가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살아" "네가 없으면 죽어버릴 거야" 이러한 말이 정말 상대를 위한다고 생각하는가?



사랑을 끝내는 과정에서도 서로를 존중할 것

너무 매달리지도 무작정 찾아가지도 말 것.

돌아섰다면 함께한 시간을 애도하며 떠나보낼 것.


현실적으로 '함께' 사랑을 끝내는 과정이 쉽지 않음을 안다. 서로의 자유의지로 끝을 마주하고, 그리하여 각자가 더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니까. 사랑을 끝내며 '나'를 위하되, 상대에 대한 존중은 잊지 않길 바란다.

관계의 도리를 다하고 '마음 빚'과 '구원'을 남기지 않길 바란다.


고교 시절 나와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과 나는 그 시절 참 즐거웠다. 가끔은 이 친구들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각자 바빠서 잘 보지 못한다. 그러나 애써 보지 못하여도, 애써 묻지 않더라도 괜찮다.

우리는 함께 졸업했으니까.


이상적인 사랑의 끝이 지나면, 내가 사랑했던 상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로가 함께 지낸 시간의 의미를 꼭 되짚어보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당신은 나와 함께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다. 당신으로 나는 더 나아갔고, 더 좋은 사람이 됐다.
어쨌거나 우리는 함께 하지 않기로 했고, 그 상실감은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아픔이다.
나는 우리가 함께 지나온 이 시간을 애도하며 떠나보내고 싶다.

친구로 지내지 않아도 괜찮을.
오늘도 행복을 바라는 너에게서

나는 오늘 졸업했다.



영화 <노트북> 중 편지를 정리하는 앨리.


얼마 전 이사를 하다 오래전 닫아둔 상자를 열어봤다.

써두었던 일기와 부친 편지를 미리 담아둔 메모리 카드.

몇 년 동안 거의 열지 않았던 나의 역사, 유산, 기록들이었다.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기와 편지

버리지 않아 아니 차마 버리지 못해 다행이었다.

나는 부단히 도 일기를 썼고, 가끔은 편지를 썼구나.


어떤 시기 어떤 한 줄에는 아픔이 있었고.

다른 한 줄에는 배시시 웃음이 나는 행복도 있었다.

비참함에 절규했던 날도 있었고, 더 나은 내가 되리라 다짐했던 순간도 있었다.

그 시간도 결국엔 내가 지나온 시간이었다.


나는 그 시기 나를 추억하고 때로는 애도했다.



그날도 오늘도 나는 사랑을 잘 모르겠다.

먼 훗날에도 잘 모르겠지.

그래도 조금은 사랑을 알겠노라고, 삶의 끝에서

남은 이들에게 말할 수 있길.




언젠가는 끝이 날

아득히 먼 삶과 사랑의 애움길에서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네







차마 사랑을 끝내기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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