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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르멘 Nov 02. 2024

일상의 중력(2)

일상이 일탈을 이긴다

마음에 힘이 있어야, 들을 수 있는 거예요.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마음에 힘이 들어가는 일이거든요.


한낮에 그냥 누워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본 지가 얼마나 됐을까.

주말에 누군가 해주는 삼시 세끼를 받아먹고, 특별한 일정을 안 세우고 누워있기만 하면 되는 하루.

그 하루를 꼬박 보내봤다.


입원을 할까, 통원치료를 할까 고민할 때 간호사 분이 한 말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집에 가시면 가만히 못 쉬시잖아요. "


맞다.

어쨌든 16킬로그램 아이를 수시로 안아야 하고, 삼시 세끼를 차려야 하고, 씻기고, 가끔 한밤중 아들의 발차기에 별이 번쩍 하며 새우잠을 자게 된다.


나의 존재만을 건사하면 되는 하루, 나 아닌 다른 생명체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하루를 4년 만에 처음 경험했다.


그러다 우연히 김창옥 쇼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거기에는 참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지금 나의 상황을 별거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이야기는 넘쳐났다.


임신 37주에 아이의 심장이 멈춰 유산한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아버지가 "왜 명절에 오지 않느냐"며 호통친 이야기.

그리고 아이 넷을 키우며 군인인 남편을 따라 열댓 번 이사를 감수하고, 그중 막내딸이 생사를 오가는 순간에도 해외 파병을 간 남편 탓에 그 고통의 순간을 오롯이 혼자 이겨낸 엄마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초등학교 졸업 직후 일터에 나가  집안 살림에 온전히 희생을 강요받은 딸의 이야기.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소중한 사람과 함께 왔다.

그 쇼에 김창옥 님의 이야기를 듣고, 본인의 이야기를 말하러.

김창옥 님이 한 말 중 이 말이 참 와닿았다.


"남의 말 안 듣죠? 고집불통인 사람들이.

그런데요 남의 말을 듣는 것도 마음의 힘이 있어야 들리거든요.

내가 내 마음을 들여보고, 남의 마음도 들여볼 여유가 있어야 들리는 거거든요.

말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말하는 게 얼마나 에너지가 드는 일인데요.

힘이 있어야 자기 목소리를 말하는 거예요."


맞다.

보통 마음의 여유가 없고, 자신의 상황을 적절한 거리에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남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다.

우리는 고집불통이라고 생각한다.

듣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나도 그런 경험을 수도 없이 해왔다.

하지만 듣지 않는 자에 마음에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사고가 났을 때 죄송하다며 이야기를 하는 뒤차 운전자의 말을 들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말을 바꾸면 어떡하나, 녹음을 해야 하나, 아니 앞도 안 보고 무슨 운전을 하냐며 성내기 바빴다.


아이가 투정을 부릴 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게 하자'라고 하는데 아니다.

나는 백 퍼센트 확신하건대 '체력이 태도가 된다'라고 생각한다.


내 체력이 될 때 아이에게 다정한 엄마가 된다.

내 체력이 될 때 남편에게 다정한 배우자가 된다.

체력이 컨디션이고, 컨디션이 기분이고, 그게 태도의 총합이다.


그러니 내 체력에 여유가 있어야 말이 여유 있게 나가고 다른 이의 말이 들어올 공간이 생긴다.


일주일에 한편 쓰기도 힘들었던 브런치 글을 하루에 두 편이나 쓰는 에너지가 생긴 건,

온전히 쉬어서다.


내 몸은 보통 기상부터 아이취침 전까지 비상사태로 운영돼서 그전까진 생물학적인 배고픔만 느낄 뿐 탐이 생겨나지 않았었다.

어쩌다 보니 간헐적 단식을 했고, 점심은 운동 후 건강식을 먹거나 정말 배고파서 먹는 정도로 먹었다.

(물론 배가 정말 고프므로 잘 먹는다)

그리고 아이가 잠에 들면 비로소 통제된 몸이 식탐을 불러들여서, 늦은 저녁으로 라면을 먹거나 치킨을 먹는 등의 행위를 반복했다.

그러니 몸의 체력, 면역력이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입원하고 보니 어쩔 수 없이 아침 7시 30분, 점심 12시, 오후 5시에 5첩 반상의 밥을 먹게 된다.

매일  육아와 회사에 억지로 끌어 쓰던 힘을 안 쓰고,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해도 되나 싶게 하루를 꾸려간다.


그러니 내가 글을 쓰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듣는 사람이 된 건

갑자기 태도가 하루 만에 바뀌어서가 아니다.

그저 글을 쓰고, 읽고, 들을 체력과 마음의 힘이 생겨나 서다. 나는 그냥 보통의 사람이기에.


일주일에 한 권 읽기도 힘들었던 책을 이틀 만에 읽고, 유퀴즈나 김창옥쇼 같이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고,

그 모든 이야기들이 내게 하는 말인 것처럼 들리는 건 내가 쉬어서다.


몸에도 마음에도 듣고 말하는 힘이 생겨난 것이다.


일상의 힘은 이런 거다.

일탈을 일상으로 끌어당기는 중력,

그 중력은 일상을 꾸려가는 체력에 달렸다.


이번기회에 일상의 중력에 무게를 쳐야겠다.

좀 더 쉬고, 좀 더 먹고, 좀 더 자자.


길진 않겠지만 이 며칠의 일상의 힘이 앞으로 일상을 살아갈 힘이 되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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