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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서서 쓰는 사람

계간 민들레에 감사하며

by 카르멘

2025년 봄, <교육과 소비>라는 제목의 민들레 155호가 도착했다.
브런치를 통해 제안받은 기고문이 실린 계간지였다. 육아휴직 때 썼던 브런치북 『엄마는 신이 아니라서』 속 글을 다시 다듬어 ‘SNS 육아의 함정’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했다. 고백하자면, 여전히 나는 그 함정과 사정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달 또 한 번 제안을 받았다.
이번 12월 겨울호의 제목은 <돌봄의 지도를 다시 그리다>.


1부 ‘교육과 돌봄, 그 경계에서’ 나는 〈맞벌이 시대의 돌봄〉이라는 주제의 글을 기고했다.


대단한 글을 쓴 건 아니었지만, 편집장님은 이번엔 오마이뉴스에 실린 내 기사를 보고 연락을 주셨고, 그 흐름에 맞닿은 글을 새로 쓸 수 있었다. 두 번의 수정을 거쳐 최종 원고가 실렸다. 아직 실물 책은 받지 못했지만, 곧 설원을 뚫고 내게 오겠지.

(이글을 발행하고 집에 와보니 와있었다)

경계라는 자리


글을 쓸 때는 내 글이 어디쯤 배치될지 몰랐다.
그러다 사이트에 접속해 확인해 보니, ‘1부_교육과 돌봄, 그 경계에서’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독 ‘경계’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 보면 나는 매일 경계에 서 있다.
일과 육아의 경계, 돌봄과 자유의 경계.


아니, 어쩌면 내겐 경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최근의 일련의 사건들—곧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될 그 과정까지—을 거치면서, 나는 거의 유체 이탈하듯 한계점 가까이 다녀왔다.

일과 육아의 경계도 더 이상 뚜렷하지 않고,
돌봄과 자유의 경계도 애매해졌다.
예전엔 무언가가 무 자르듯 딱 나뉠 거라 믿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저 매일 왔다 갔다 흔들리는 나만 존재한다.


균형이란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흔들리는 중에도 다시 중심을 찾아가는 일,
혹은 새로운 중심을 만드는 일인지 모른다.


경계 역시 땅따먹기 하듯 고정된 선이 아니라,
매일 그었다 지웠다 하며 다시 자리잡거나,
새로운 구획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일지도.


한 가지일 필요는 없다


언젠가 읽은 글 가운데, 이런 문장이 있었다.


“나의 정체성을 하나 찾는 일보다, 무엇이든 나의 정체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어쩌면 지금의 나도 그렇다.
작가도, 회사원도, 엄마도, 그리고 그냥 ‘나’도 모두 나의 정체성이다.
그리고 그 복수의 정체성을 한데 담아 쓰는 글이 결국 내 장르가 된다.


가장자리에서 보이는 것들


우리는 모두 경계에 서 있다.
머리와 현실 사이에도 경계가 있고,
글과 삶 사이에도 경계는 존재한다.
경계란 나쁜 것은 아니다.


미국 소설가 커트 보니것은 이렇게 말했다.
가장자리에서는 중심에서 볼 수 없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꿈에도 생각 못한 큰 것들을,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이 처음 발견한다.”


경계는 가장자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 가장자리를 끊임없이 드나들며,
때로는 새로이 만들어내는 사람—
그가 바로 작가인지도 모르겠다.



좋은 기회를 주신, 너무나 좋은 글들을 많이 싣고 있는 <민들레>를 소개합니다.


https://naver.me/xWzDqDF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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