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보며 애니 보기 16 - 루카(2021)
"아빠, 여기 루카 있다!"
"어, 그러네?
주말 오후, 큰애와 둘이 오붓하게 서점 데이트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이가 그림책 코너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신나게 손짓을 하며 부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보니 애니메이션 '루카'에 나오는 루카와 알베르토, 줄리아가 표지에 그려져 있는 동화책이다.
아직, 루카를 기억하고 있구나.
지난여름, 아이들과 함께 극장에서 봤던 영화였다. 코로나19 때문에 한동안 영화관에는 얼씬도 안 하던 터였지만, 유독 시원한 극장 말고는 도저히 다른 옵션이 생각나지 않는 더운 날이었다. 한낮 열기에도 지치지 않고 생기를 뿜어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간신히 아이들을 앞줄에 앉혀놓고 나니 때맞춰 영화가 시작했다. 디즈니 성과 픽사 조명 로고가 어찌나 고마웠던지. 역시, 세상에 죽으란 법은 없구나 싶었다.
영화가 시작하자 묘하게 스튜디오 지브리의 감성을 자아내는 이탈리아 마을이 드러났다. 엉? 픽사 작품인 줄 알았는데 지브리였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비슷한 느낌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감독인 엔리코 카사로사가 지브리에 대한 오마주를 영화 여러 곳에 담아놓았단다. 마을 이름부터가 지브리의 명작 '붉은 돼지(Porco Rosso)'를 떠올리게 하는 '포르토 로쏘(Porto Rosso)'다.) 늘 믿고 보는 픽사 애니메이션인데, 지브리 스타일의 픽사라니 가만, 이건 너무 즐거운 한 시간 반이겠는걸? 속으로 흐흐 웃으며 어둠 속에서 혼자 신이 났다.
극 중 주인공인 '루카'는 육지인간들이 사는 마을을 가보고 싶어 하는, 지느러미와 꼬리가 있는 바다인간(그러니까... 인어?) 소년이다. 루카는 자신을 포함하여 바다인간이 육지로 나가면 몸이 육지인간처럼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호기심을 못 이기고 동네 형 '알베르토'와 함께 포르토로쏘 마을로의 모험을 떠나게 된다. 둘은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 '줄리아'를 만나게 되고, 그들의 로망 '베스파' 오토바이를 갖기 위해 마을 운동회인 '포르토로쏘 컵'에 참가하기로 한다. (역시 소년들의 로망은 예나 지금이나 오토바이?)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루카와 알베르토의 모험 속에 빠져들어가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아, 이 영화 단순한 애니 아니구나.
루카와 알베르토의 세상과 줄리아의 세상은 사뭇 다르다. 루카와 알베르토는 바닷속에서는 보통의 인어일 뿐이지만, 포르토로쏘 마을로 올라가면 '괴물'이 된다. 정체가 밝혀지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둘은 알고 있고, 몸이 물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다. 그 노력이 때론 너무 가상해서, 어느 땐 애처롭게까지 느껴질 지경이다. 바다괴물처럼 극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많은 소수자들이 루카와, 알베르토와 비슷한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짧게나마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이 되어 살았을 때, 가끔씩 '투명해지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여 투명해지는 것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종류의 투명함은 아니었고, 시쳇말로 '공기화'되는 순간들이었다. 몸은 그 공간에 있으나, 누구도 내 존재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상태.
사전의 뜻을 따르자면 이방인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다. 영어로는 에일리언(alien). 원래 그 사회의 주류 집단에 속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속할 가능성이 아주 많다고 보기는 어려운 이들이다. 2년 남짓의 유학 생활이 남긴 것은 소수자로서 살아가는 마음의 발견이었다. 스스로 겪어보고 나서야 겨우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언제 사람들에게 정체를 들킬지 모르는 루카와 알베르토를 보며 마음을 졸였다. 관객들 심장 터지지 말라고 '루카'는 클라이맥스 시점에 루카와 알베르토의 정체를 드러내 보여주는데, 그때 나는 눈시울이 그만 그렁해졌다. 앞줄에 앉은 아이들은 까마득히 몰랐겠지만. 자신의 정체를 내보이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며 벗을 대하는 마음은 얼마나 귀하고 어려운 것인가. 늘 친구들을 제 살처럼 아끼는 아이들은 아직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 시간 동안 알게 모르게 힘이 되어 준 벗들이 있었다. 함께 어떻게든 버텨서 원하는 것들을 이뤄 가보자며 같은 입장에 서 있었던 사람들, 난생처음 모국을 벗어나 타지에서 버둥대고 있을 때 쉬이 정착하라고 살뜰히 지혜를 나눠주었던 사람들, 거품이 되어 날아가버리려는 찰나에 인간 대 인간으로서 내 이름을 불러주었던 사람들.
모국으로 돌아온 지 몇 년 지났다고 슬며시 잊어가고 있었는데, 루카가 다시 그 감정을 일깨워주었던 게다. 그리고 루카는, 알베르토는, 줄리아는 묻고 있는 것이다. 너, 네 주변은 잘 돌아보고 있는 거야? 하고.
루카의 결말은 (애니메이션의 그림톤에서 느껴지듯) 해피엔딩이다. 대책 없는 수준은 아니고, 오히려 근래 보기 드물 정도로 멋지고 완벽한, 어쩌면 판타지에 가까운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어린이 버전이랄까.
극장을 나서며 작은 바람을 가졌더랬다. 아이들이 자라며 루카를, 알베르토를, 줄리아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세 친구의 하모니를 떠올리며, 나와 다른 존재를 만나더라도 다름이 방어와 차별의 이유가 아니라 다양한 즐거움의 원천일 수 있음을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길 바랐다.
글을 마무리지으려는데, 둘째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더니 한 마디 던진다.
"루카네? 아빠, 나 몰래 루카 보고 있었구나? 딱 걸렸지?"
아이를 보며, 함께 씨익 웃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