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보며 애니 보기 17 - 엔칸토(2021)
일을 하려고 자리에 앉았는데 환청이 들린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엔 증세가 조금 심하다. 이러다간 곧 '마드리갈' 가족 계보를 모두 외울 지경이다.
영화 '엔칸토' OST 이야기다.
아이들이 눈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주야장천 틀어대니 멜로디를 피할 도리가 없다. 설거지를 하다 문득 정신 차리면 '입에 담지 마 브루노노노노오, 입에 담지 마 브루노오오오오~' 혼자 어깨 들썩이며 이러고 있다. 다른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그렇지만 이번 엔칸토는 OST 중독성이 유독 심하다. 오리지널 버전과 국내 버전 모두 더할 나위 없이 찰지다. 그러니 가족 모두 이렇게 줄곧 읊어대고 있겠지만.
엔칸토는 극장에서 처음 봤다. 아이들과 함께 한 번 두 번 극장을 찾다 이제는 새로운 디즈니 영화가 나오면 함께 손잡고 가서 보는 루틴이 정착됐다. 온갖 형태의 키즈 콘텐츠가 유튜브에 범람하는 시대에 어른부터 아이까지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꾸준히 만들어내는 디즈니가 지금처럼 고마울 때가 없다.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영화를 보고 나오면 한동안은 각자 인상적이었던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재잘재잘 이야기꽃을 피운다. 두어 달 정도 시간이 지나 잊을만해지면 거실 TV 전면에 같이 봤던 영화가 떡하니 다시 등장한다. 거대 미디어 기업의 마케팅 전략에 놀아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이 신나 하니 기꺼이 지갑을 열... 아니 구독 결제를 연장한다. 까짓 거 마음껏 놀아나 주지 뭐, 애들이 이렇게 좋아라 하는데.
OST 중독성이 있어선지 엔칸토는 다른 애니메이션보다 유독 더 자주 돌려보게 되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봐도 좋은 영화다. 선율도 물론 좋지만 영화가 말하는 주제 역시 마음을 '쿵' 하고 들었다 놓는 면이 있다.
주인공 미라벨은 15세 소녀다. 명랑 쾌활 캐릭터지만 마드리갈 집안에서 ‘유일하게’ 마법을 쓰지 못한다. 가족들 모두 하나씩은 갖고 있는 마법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이유로 위로는 집안의 어른 아부엘라 할머니로부터 아래로는 언니와 사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포지션이다. 일찌감치 마법 능력을 깨우치며 자기 방을 얻은 언니들과는 달리 미라벨은 열다섯이 되었음에도 다섯 살 사촌동생 안토니오와 같은 방에서 지낸다. 엔칸토의 세계관 속에서는 미처 ‘독립’을 이뤄내지 못한, 여전히 유년기에 머물러 있는 미숙한 캐릭터인 셈이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체하지만, 미라벨의 속도 사실 말은 아니다. 귀여워라 하는 사촌 룸메 안토니오조차도 각성하여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자 미라벨의 우울함은 극에 달한다. 미라벨의 마음은 저 아래 나락으로 떨어지고, 바닥을 찍는다.
남들과 같은 능력이 없다는 것은 인생에서 적잖은 스트레스다.
10대 사춘기 시절에는 말할 것도 없다. 또래집단에서 당연히 갖추길 요구하는 조건에 자신이 부응하지 못한다고 생각만 해도 행동에 여유가 사라진다. 마음속에 행복이 들어앉을 공간이 넉넉히 자리하기 어렵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과 인정에 대한 열망이야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 중 하나라지만, 뭐든 지나치면 문제가 되는 법이다. 주위를 둘러보다 어느 순간 끊임없는 비교의 함정에 빠진다. 부단히 노력하여 나름 썩 괜찮은 수준에 올라왔다 하더라도, 정작 그 단계가 되면 또 다른 스트레스와 마주한다. 미라벨의 자매인 이사벨라와 루이사가 그렇다. 미라벨이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출중한 능력을 가진 두 언니들이지만, 그들도 나름의 고충을 호소한다. 늘 완벽하고 흠잡을 데 없기만을 바라는 가족의 바람은 어느 순간 그녀들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로 돌아온다.
이 풀릴 길 없는 인생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불운을 행복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
결국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는 데 답이 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으레 그렇듯, 엔칸토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미라벨에게는 비록 다른 가족들과 같은 형태의 마법은 없었지만, '문제 해결 능력'이 있었다. 가족이 처해 있는 문제를 직시하고, 다른 가족들이 가진 재능(=마법)을 적절히 활용하며 끈질기게 해결책을 찾고자 물고 늘어졌으며, 최악의 상황에도 용기를 잃지 않는다. 미라벨이 가진 '평범한' 능력은 그렇게 가족을 다시 한 데 뭉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로서 작용한다. (쓰고 나니 잘 나가는 스타트업 CEO에게 필요할 법한 역량은 모두 갖추고 있다!)
몇 년을 살게 될 지조차 모르는 채 태어나는 것이 인간이다. 자기의 능력, 탤런트가 무엇인지도 물론 처음엔 알지 못한다. 그렇게 인생은 불확실성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불확실성이 존재하기에 인생은 또 제법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당장 지금 알 수는 없지만, 그리고 마침내 얻게 된 그 능력이 남들 보기에 그다지 멋들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 능력이 언젠가는 적절한 시점에 딱 맞아 요긴하게 쓰일 일이 있을 것이라 믿는 것, 그것만으로도 가끔씩 찾아오는 어려운 순간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믿음을 갖고 중심을 잡고 이리저리 기우뚱거리는 마음을 다잡는 것. 인생살이가 힘겨울 때 슬쩍 꺼내는 치트키 같은 것이려나.
"아빠! 나 무슨 능력 있는지 알았어!"
"무슨 능력...?"
"응, 나는 달리기 능력이 있고, 오빠는 레고 잘 맞추는 능력이 있고, 할머니는 책을 잘 보는 능력이 있고, 엄마는 화장을 잘하는 능력이 있어!"
"아빠는?"
"음... 없는 것 같은데, 이따 좀 더 생각해볼게!"
"......"
자신의 능력이 마침맞게 제대로 쓰일 곳이 어디인지를 찾아가는 기나긴 여정이다. 부디 아이들이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치더라도 도중에 길을 잃지 않고 하루하루 즐겁게, 마음 넉넉히 지낼 수 있길 소망한다. (... 사춘기가 오더라도 흑화 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