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보며 애니 보기 14 - 메리다와 마법의 숲(2012)
시작은 디즈니 프린세스였다.
꼬마들에게 디즈니 공주님들이란 늘 선망의 대상이어서 아이는 최근에도 디즈니 공주님들이 나오는 책들을 한 꾸러미 집에 가져와 읽던 참이었다. 함께 열 명도 넘는 디즈니 프린세스 그림을 보며 하나하나 이름을 헤아려보다 붉은 곱슬머리의 메리다가 눈에 들어왔다.
걸그룹처럼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센터 포지션을 (전통의!) 신데렐라와 오로라에게 내주고 맨 마지막 끝줄에 아슬아슬 걸쳐 있는 어린 공주. 이게 뭐라고 측은지심이 드는 건가. 나이로 보면 훨씬 젊은 친구가 왜 라인업 끝에 서 있는 게야. (신데렐라는 1950년,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1959년 작품이다.)
"이 빨간 머리 공주님... 누구인 줄 알아?"
아이가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다.
좋아, 가만히 앉아서 코로나에 질 순 없지. 이번 주말엔 메리다의 세계로 떠나 보자.
메리다는 픽사의 애니메이션 <메리다와 마법의 숲> 속 주인공이다. 중세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한 이 애니메이션에서 메리다는 활쏘기(양궁?)를 좋아하는 십 대 사춘기 소녀로 등장한다. 영화는 자신을 부족 연합의 다른 남자 후계자들에게 시집보내려는 왕비와 갈등을 겪고, 그 과정에서 성장하는 메리다의 모습을 그려낸다.
"저희가 자유롭게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하는 거예요.
가슴이 이끄는 삶을 살고 싶고 스스로가 선택한 사랑과 맺어지고 싶어요.
누굴 사랑할지는 젊은이들이 직접 정하면 안 될까요?"
메리다는 전반적으로 다른 디즈니 공주들과는 외양이 제법 다르다. 빼어난 미인보다는 평범한 소녀에 가깝다. 이는 메리다가 원래 디즈니가 아니라 픽사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라는 측면에 기인한다. 픽사가 첫 번째 공주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면서 디즈니의 전통과는 사뭇 다른 결의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렇게 보면 마찬가지로 디즈니의 전통적 공주상을 비틀어 풍자하고자 했던 드림웍스의 '슈렉'과도 일부 겹치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스토리 면에서는 디즈니/픽사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탄탄함이 다소 처지는 느낌이 있다. 디즈니-픽사의 이후 작품들인 "겨울왕국"이나 "모아나"에 비하면 아쉬운 부분이 몇몇 눈에 띈다. 이를테면 모르두 등 조연급 캐릭터들에 대한 설명이 다소 부족하다는 점 등이 그렇다.
쌍수를 들어 극찬하기에는 솔직히 조금 고민이 되는 작품이지만, 몇몇 장면은 꽤 오래 여운이 남는다. 극 중 메리다가 부족원들 앞에서 하는 연설은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디즈니의 또 다른 프린세스 작품인 라푼젤(Tangled, 2010) 속 주인공인 라푼젤이 '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메리다가 청중에게 하는 이야기는 '자유'라는 테마와 맞닿아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는 여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자스민이나 뮬란 같은 다른 디즈니 공주들과도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
자유롭게, 가슴이 이끄는 삶으로 향한다는 것
아직 아이가 어려 사춘기 딸과 엄마의 갈등을 직접 겪어 보지는 못했지만, 곧 질풍노도의 시기가 올 전조는 언뜻언뜻 보인다. 그저 귀여운 아기 같던 아이가 어느 순간 장난감 화장대에 앉아 볼터치하는 시늉을 하고, 밖에 입고 나갈 옷을 고를 때마다 (갈길 바쁜 부모 속도 모르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 고민한다. 점심상을 차려놓고 얼른 밥 먹으라 채근하니 되돌아오는 말이 걸작이다.
"아빠, 나 립밤 발라야 해. 밥 못 먹어."
"...!?!"
아이들은 툭하면 '나 다 컸어. 혼자 할 수 있어.'를 주문처럼 왼다. 부모는 그런 아이들을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아이야, 세상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단다. 적어도 수십 년 더 살아보니 그렇더라. 엘레노어 왕비도 메리다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특히나 외부와의 전쟁에만 관심이 있는 바깥양반 대신 안살림을 도맡아 하며 수없이 많은 말 못 할 일을 겪었을 그녀로서는 더욱. 요새 들어 뜸하긴 하지만, 아이가 이불에 쉬를 그려놓을 때마다 나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메리다가 어른들을 앞에 두고 외치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와서 박힌다. 어느새 메리다보다는 엘레노어의 처지에 더욱 깊이 공감하게 된 나이가 되어 스스로를 돌아본다. 나는 아이들 스스로의 선택을 존중해줄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설사 그것이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기에 실패할 것이 빤히 보이는 길인데도? 어릴 때야 작은 실수일 수 있지만, 메리다만큼 커서 스스로의 길을 가겠다고 내 앞에서 당당히 선언한다면? 고백건대 나는 아직 자신이 없다.
다행히 아직은 시간이 조금 남아있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생각하고 그 선택을 지지해주기 위한 연습을 하는 시간들이. 여전히 부글부글 가슴속에서는 울화가 끓어오를 테고, 가끔은 참지 못해 성내기도 할 테지만 그래도 아직은 서로의 눈을 보고 맞춰 갈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만이 작으나마 위안이다. 용기를 내 봐야지.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원제목을 찾아보고 살짝 놀랐다. 다름 아닌 브레이브(Brave)다. '용감한'이라는 형용사로도, '용감하게 대면하다'는 동사로도 해석할 수 있는 용어다. 가족 관객이 많은 애니메이션 특성을 고려한 선택이었겠지만, 작품의 주제를 표현하는 차원에서 한국어 제목은 원제목에 크게 못 미친다는 생각이다.)
메리다를 보고 나서 아이가 드디어 자기 방에 있는 메리다 피규어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애정이 생긴 게 얼굴에 보인다. 한참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 안방에 드러누워 있는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자못 한심한 표정과 함께 한 마디 툭 던진다.
"아빠, 그렇게 누워있다간 곰 된다고!"
퍼뜩. 그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속 누워있을 수만 있나. 여러 방향으로 용기가 시급하다. 아이를 향해 더 뭐라 말고 나나 잘하자. 평생 곰으로 살지 않기 위해. 자유롭고 가슴이 이끄는 삶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