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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민 Sep 24. 2021

어린 시절, 어른 시절

아이 보며 애니 보기 12 - 라푼젤(2010)


추석 며칠 전부터 아이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묻기 시작했다. 저 달이 보름달이냐고.


아아니, 아직 보름이 되려면 조금 멀었지. 반달이라고 하기엔 조금 뭉툭해 보이는 저 달이 완전히 동그란 달이 되어야 보름달이 된다고 말해주었다.


매년 그렇듯 이리저리 오가느라 정신없던 명절 연휴 마지막 저녁이었다. 아이는 퍼뜩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내게 달려와 말했다. 사촌동생이랑 노느라 깜빡 잊었는데, 아직 보름달을 못 봤단다. 어떡하지? 하며 아이의 눈가는 풀 죽은 강아지마냥 희미해졌다.


"달... 보러 갈까?"

"응!"


해질녘 날씨가 제법 쌀쌀해진 터라 웃옷을 입히고 같이 집 밖에 나왔다. 생각과 달리 달은 눈에 금세 들어차지 않았다. 초저녁이어선가? 아파트 빌딩숲 사이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고층건물 한 옆에 빼꼼 낯을 디민 보름달을 찾았다. 추석은 추석이구나. 휘영청이라는 형용사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밝은 달이었다. 달이 예쁘다고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더니 언뜻 보면 가로등으로 헷갈릴 법한 달 사진이 찍혔다.  


"그런데 왜 달이 보고 싶었어?"

"우리 가족 소원 빌려고."

"무슨... 소원?"

"원래는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게 해 주세요 하고 빌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건 작년에 빈 것 같아서 올해는 우리 가족 부자 되게 해 주세요 하고 빌려고."


말을 마치자마자 아이는 달을 향해 눈을 감은 채 아직 작은 두 손을 한데 포갰다. 그 모습이 사뭇 진지하고 경건해서, 나 역시 옆에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는 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손 모아 간절히 소원을 빌었던 것이 언제였더라.




여건이 허락될 때, 가능하다면 잠들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주려 노력한다. 아이에게 즐겨 읽어주곤 하는 동화책 속 '라푼젤' 이야기는 사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답시고 너무나 축약되어 있어서, 그 서사 속에서 라푼젤이 어떠한 생각을 하고, 어떻게 성장해나가는지를 전달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래도 다만 몇 분이라도 일찍 재워보려는 얄팍한 생각에 '~그래서 왕자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를 2배속으로 반복하여 읽어주지만, 읽어주는 와중에도 '이거 이렇게 성급히 결말을 맺어도 되는 거야?' 하는 생각이 매번 든다. 책 읽어주는 것도 좋지만, 이럴 거면 차라리 주말에 디즈니 버전 <라푼젤>을 한 번 다시 보여주는 게 나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디즈니의 50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라푼젤>은 '소원'에 관한 영화다. 100분 남짓 흘러가는 영화는 공주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대략은 알고 있을 그림 형제의 동화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영화의 배경이 하필 '코로나' 왕국이고, 라푼젤이 갓난아이 때 마녀 고델에게 납치되어 18년간 세상 구경을 못하고 탑 속에 유폐되어 (자가격리?) 생활하게 되는 이야기인 터라 최근에는 <라푼젤>이 미래의 코로나 시대를 미리 예견한 것 아니냐는 우스개 소재로도 쓰이곤 하지만, 쭉 보고 나면 아이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생각해볼 만한 거리를 던져주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열여덟 라푼젤의 소원은 탑 안에서 살 때 늘 신기하게 생각했던, 멀리서 날아오는 등불을 보러 가는 것이다.  제 소원을 이루기 위해 탑 밖 세상에 처음 발디딘 라푼젤은 일행을 해치려 하는 산적들에게 당신들도 꿈이란 걸 가져본 적이 있지 않느냐며 자기를 막지 말아 줄 것을 호소한다.


영화의 메인 주제곡 'I've Got a Dream'은 라푼젤의 호소를 듣고 험상궂기만 한 산적들이 사실은 자기들도 한때는, 그리고 지금도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꿈이 있다며 제각각의 꿈을 털어놓는 멋진 반전을 담은 노래다. 모차르트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멋진 사랑을 하는 로맨티스트가 되고 싶다는 산적들의 꿈에 비하면 부자가 되어 멋진 섬을 사서 혼자 편히 쉬고 싶다는 남자 주인공 플린 라이더의 꿈이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다.





아이는 예쁜 라푼젤 공주님에게 빙의하여 화면 속에 빠져드는데, 아빠는 그 옆 험상궂은 산적 아저씨들의 입장이 되어 영화를 본다.


어릴  가졌던 꿈을 어른이 되어서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어른이 얼마나 될까. 마치 <라푼젤> 속 산적들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 꿈과는 꽤나 다른 모습으로 어릴 때는 생각지도 못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속에서 등장하는 많은 노래들 가운데서도 유독 저 노래에 심장이 반응했는지도 모르겠다.


보름달을 향해 두 손 모아 빌고 있는 아이의 소원은 너무나 예쁘다. 건강하게 사는 것도 모자라 부자까지 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이승의 삶이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한 자락 아쉬운 것은, 그 소원이 온전히 제 스스로를 위한 것이었어도 좋을 것 같아서였다.


보기만 하면 마음이 설레는 등불을 쫓아가도 좋고, 좋아하는 유니콘 장난감을 마구 수집해도 좋으니 내년 추석에는 아이가 보름달을 보며 좀 더 이기적인(!) 자세로 소원을 빌 수 있길, 나도 두 손 모아 빌었다. 그의 옆에서.


<라푼젤> (2010, 이미지: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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