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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민 Jan 23. 2022

현실주의자 아빠의 꿈

아이 보며 애니 보기 11 - 공주와 개구리(2010)

주말을 맞았다.


실컷 늦잠도 자고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밖에 나가 달리기도 좀 하고... 이도 저도 아님 소파와 한 몸이 되거나 천장을 보며 그대로 망중한을 즐긴다.


환상이다.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면 환상은 사라지고 새 일과가 시작된다.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같이 놀고 같이 배운다. 해가 지고 아이들이 다시 까무룩 꿈속으로 빠져들 때, 먼저 재우고 나서 요즘 핫하다는 드라마라도 한 편 보고픈 마음으로 버둥거리다 실패하고 결국 같이 잠든다. 나 개인의 정체성보다는 부모로서의 정체성이 우선하는 시간. 아이가 우선인 시간. 주말.


이번 주말, 둘째는 역할놀이에 푹 빠졌다. 조잘조잘 재잘재잘 쉴 새 없이 옆에서 입을 놀린다.


"아빠, 이거 봤지? 나는 디자이너랑 음 …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될 거야!"


5초나 지났을까. 다시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그리구 음 … 또 승무원이 될 거야!"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은 친구다. 그런데 너 그거 아니? 꿈을 꾼다고 바라는 것이 모두 다 이뤄지는 것은 아니란다. 너무 현실적인, 어쩔 수 없는 회사원 아빠라고…?





'공주와 개구리'는 정확히 12년 전인 2010년 1월 개봉했다. 그때부터도 그랬지만 요즘에는 더욱 찾아보기 어려운 2D 애니메이션 형태로 제작되어 왠지 모를 향수를 자극한다. '라이온 킹'이나 '알라딘' 같은 1990년대 디즈니 르네상스 시대의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특히나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작품이다. 제작 방식은 전통적인 스타일을 추구한 데 비해, 배경은 디즈니 작품들 중 가장 최근 시대인 20세기 초 뉴올리언스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색다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전차를 타고 다니는 프린세스라니!)


'공주와 개구리'라는 제목 자체가 굉장히 직설적이다. 그림 형제의 동화 '개구리 왕자'를 모티브로 하는 만큼, 어찌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듯 결국 '공주와 개구리로 변한 왕자가 키스하는 이야기' 한 문장으로 내용을 요약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디즈니는 그 뻔한 이야기를 새로운 이야기로 탈바꿈시킨다. 21세기 버전의 ‘공주와 개구리’의 메시지는 기나긴 육아 라이프 속 주말 매너리즘에 빠져 흐리멍덩한 눈으로 아이들 옆에 앉아 있는, 얼빠진 아빠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이기에 충분하다.


'Duke's Cafe'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 '티아나'가 가진 삶의 목표는 단 하나, 뉴올리언스에 자기 이름을 내건 레스토랑을 여는 것. 그 꿈은 티아나의 꿈이지만, 먼저 세상을 뜬 아빠와 어린 시절 함께 꿈꾸었던 소망이기도 하다. 자신의 힘으로 꿈을 이루기 위해 티아나는 워커홀릭 수준으로 일을 하고, 결국 개구리 왕자와도 엮여 의도치 않은(!) 모험을 떠나게 된다.


물론 티아나는 외모와 마음 모두 아름답기 그지 없는 주인공이지만, 내 이목을 잡아끈 것은 티아나의 아버지 제임스였다. 제임스는 영화 초반에 잠깐 등장하는 캐릭터이지만, 티아나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다. 별을 보고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뤄진다고 믿는 딸에게 뼈 때리는 말을 서슴지 않는 부모이기도 하다.


(티아나) 샬롯의 동화책에서 봤는데, 초저녁 꿈을 보고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뤄진대요! (중략)


(제임스) 명심해야 될 건 말야, 그런다고 별이 다 이뤄주는 건 아니라는 거야. 네 스스로 최선을 다해서 그 꿈을 향해 노력할 때, 그때서야 비로소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단다.


딸이 만든 수프가 맛있다고 천재 요리사라고 치켜세울 때는 언제고, 소원 비는 것만으로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고 팩폭을 날린다. 딸이 잠들기 전 머리맡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아빠 제임스의 마음은 어떠했으려나.


삶은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어렸을 때 꿈꾸었던 것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뤄지지 않은 것이 더 많다. 어쩌면 생의 끝에 가서도 그저 버킷리스트에 글자로만 남아있는 것들이 더 많으리라. 딸과 함께 품었던 소원을 결국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던 제임스처럼.


씁쓸한 현실을 알고 있기에, 어릴 때나마 아이들이 그저 꿈과 희망이 가득한, 그런 동화같은 세상 속에서 살게 끔 해주고 싶은 마음도 크다. 하지만 동시에 언젠가 그 버블이 꺼졌을 때, 아이가 더 큰 세상으로 나왔을 때 겪을 낙차를 생각해본다. 그 아득한 삶의 격차를 생각하면, 어쩌면 애니메이션 속 제임스보다 더 냉정한 톤으로 이야기해줘야 할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부모의 마음은 갈팡질팡 흔들린다.


그러다 다시 영화 속 제임스의 사진을 본다. 1910년대 남부 뉴올리언스에서 사는 흑인 아버지. 현실 속 고단함을 익히 알고 있었고, 결국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제임스는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런 제임스였기에 어쩌면 금지옥엽 외동딸에게도 현실적인, 어린 나이에 자칫 실망감마저 안겨줄 수 있을 법한 조언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손님, 내가 어서 오세요~ 한 다음에 와야죠!” (짜증)

“손님, 아니 아빠!! 이 책이 어디에 있지? 하고 먼저 찾은 다음에 와야지!” (짜증 x2)

“자아, 그럼 다시!”


이번에는 서점 역할놀이를 하는 중이다. 둘째는 사장님, 나는 손님. 아이는 손님 역할 하나 똑 부러지게 못하는 아빠를 흘겨보며 타박한다. 이상하게 계속 혼나고 있는데도 마음이 그리 나쁘지 않다.


어릴 때 소망 중 하나가 대전에서 제일가는 서점 주인이었다. 서점 주인이면 원 없이 책을 읽을 수 있겠지? 생각하던 열 살 남짓 꼬마의 마음이 다시 둥실 떠오른다. 그때 꿈만큼은 아니더라도 어쩌면 세상 속에 나만의 개성을 살린, 특색 있는 작은 서점 하나는 꾸려가볼 수 있지 않을까? 가슴속에 너무 꽁꽁 숨겨둔 나머지 까맣게 잊고 있던 꿈 하나를 찾아 펼쳐본다. 제임스와 티아나의 레스토랑처럼, 부녀가 함께 경영하는 책방을 상상하곤 혼자 기분좋아 죽는다. 


주말에 흐리멍덩하게 처져 있지 말고, 꿈을 향해 좀 더 노력이란 걸 해볼까 한다. 아이들이 꿈나라에 가 있는 동안은 괜찮겠지. 좀 더 정신을 집중하면 같이 잠들지 않을 수 있을 거야. 


그건 그렇고 둘째야, 넌 디자이너나 승무원보단 감독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디렉션 주는 게 어째 꼭…? 


공주와 개구리 (2010, 이미지: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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