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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민 Jan 27. 2021

심심한 일상의 힘

아이 보며 애니 보기 9 - 이웃집 토토로(1988)

"아빠, 토토로 보자."


아이가 툭 던지는 말이 반갑다. 아빠야 늘 환영이지. 


이웃집 토토로(1988)


지난해 코로나19가 심해지면서 한동안 집에서 아이들과 지브리 애니메이션만 연달아 보던 시기가 있었다. 그중에도 나름 아이들이 좋아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토토로와 키키, 아리에티는 늘 세 손가락 안에 들었다. (가오나시... 는 인상 깊었지만 더이상 좋아하지는 않는단다.) 


콘텐츠는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수많은 버전으로 재탄생한다. '이웃집 토토로'를 처음 봤을 때는 미처 기억도 못하고 지나갔던 장면들이 아이들과 함께 토토로를 보는 와중에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문과생 아빠, 터울 있는 아이들간의 갈등, 재택근무의 어려움, 배우자의 부재가 부모의 삶에 미치는 중차대한 영향(아무리 짧더라도), 비상시 도와줄 수 있는 이웃의 중요성, 딸의 잠재적 남친...(!) 


1988년 작인 <이웃집 토토로>의 극 중 배경은 개봉 당시로부터도 한 세대 전인 1950년대이지만, 삶의 원형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애니메이션 속 모습은 1980년대보다 요즈음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2020년대에 만나는 <이웃집 토토로>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재택하는 아빠가 두 아이를 키우며 분투하는 일상' 아닐는지. 


흥...!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따스한 필치로 그려진 평화로운 시골 마을 정경은 언제나 마음을 편안케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사소한 일상이 갖는 힘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늘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학부모가 되어가며 생기는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아이들에게 계속 잔소리를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점점 커가고, 학교에서 친구들과 자기들만의 문화를 공유한다. 사회화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이전 세대일 수밖에 없는 부모인지라 내가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근심이 점점 늘어갔다. 


"유튜브 좀 그만 봐."

"게임 좀 그만 해."


집에 있는 동안 보다 못해 아이에게 이렇게 몇 번이고 이야기하다, 얼마 전에는 '잔소리 괴물'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마저 획득한 터다. 


TV만 켜면, 아이패드만 열면 온갖 재미있는 것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부모 바람처럼 시간을 보내기에는 흥미로운 볼거리가 너무 많다. 볼 게 없으면 심심하고 투정 부리는 아이에게, 때론 삶에서 심심한 시간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어떻게 알려줄 수 있을까 하던 시기에 토토로를 만났었다.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이웃집 토토로>의 줄거리는 굉장히 단순하다. 밋밋하게 이야기한다면 어느 날 저녁 엄마를 찾으러 가다 길을 잃은 메이와, 메이를 찾으러 나선 언니 사츠키의 에피소드가 중심을 이룬다. 나머지는 이 짧은 일상 속 모험을 설명하기 위한 부가적 요소에 가깝다. 


<이웃집 토토로>를 세월을 거스르게 만드는 명작으로 만든 것은 어쩌면 잔잔하게 흘러가는,
심심하기까지 한 일상의 삶 속에서 피어나는 상상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애니메이션을 보며 사츠키나 메이라고 그 시대가 재미있어 죽는 시절은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새 집으로 이사 온 두 자매가 이것저것 온갖 재미있는 상상을 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보이는 '동글이 검댕 먼지'도 보고, 토토로와 고양이 버스도 만나며 판타지의 세계로 넘어가게 된 것이 아닐는지. 엄마의 부재라는 상황은 아무리 짧더라도 어린아이들에게는 판타지나 마찬가지인 설정이었을 테니 말이다. 


엄마가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이 신비로운 이야기는 끝이 난다. 아이들은 계속 자랄 것이고, 옥수수는 매년 다시 영글 테지만, 아이들 마음속에 토토로가 있을 자리가 점점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그런 두려움이 일었다. 부모가 된 이후로 늘 드는 두려움 중 하나이다. 


메이랑 똑 닮았던 둘째는 어느새 메이에 비해 머리가 꽤 자랐다. 큰애도 한층 더 사츠키같이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들이 커가도 마음속에 토토로가 자리 잡을 빈 공간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기를. 옛날만큼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아빠로서 그저 바라마지 않을 뿐이다. 


이웃집 토토로(1988),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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