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보며 애니 보기 15 - 주토피아(2016)
주토피아, 그리고 DMV에서의 경험
나무늘보가 등장하는 예고편을 본 순간 <주토피아>는 내 마음속 꼭 봐야 하는 영화 리스트 최상단에 등극했다. '아, 이건 누가 뭐래도 꼭 봐야 해!' DMV에 얽힌 개인사를 떠올리며 속으로 되뇌었던 게 벌써 5년 전이다.
2년간 한국을 떠나 짧은 유학 생활을 했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한 첫 한 달 동안 나는 과거에 미리 당겨 쓴 시험운에 대해, 그리고 비주류 아시안 유학생 아무개로서 살아가는 삶은 어떠한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DMV라는 곳에서.
DMV는 Department of Motor Vehicle의 줄임말이다. 차량 관리국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면허가 없으면 차를 운전할 수 없다. 차를 운전할 수 없다는 것은 미국 같은 환경에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짐을 의미한다. 게다가 미국에서는 운전면허증이 개인 신분증 역할을 하기 때문에, 면허가 없으면 매번 여권을 갖고 다녀야 하는 등 불편이 잇따른다. 최대한 빨리 면허를 따른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정착의 선결조건이었다.
DMV의 딱딱한 업무처리 방식과 긴 대기줄은 악명이 자자하다. (<주토피아>가 DMV를 풍자한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면허증을 받아드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필기에서 한 번, 실기에서 두 번 도합 세 번 물을 먹고 4수 끝에 간신히 통과했다. 아직까지는 나만큼 DMV와 악연을 쌓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학교 교수님들이 직접 어느 DMV가 상대적으로 면허 따기 좋더라는 이야기를 갓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전해줄 정도였지만, 그래 봤자 운전면허 시험, 별 것 아닐 거라 생각하고 새로 사귄 친구들과 소풍 가듯 DMV에 방문한 것이 패착이었다. 첫 관문인 필기시험에서부터 물을 먹고 정신이 퍼뜩 들었다. '역시 컴퓨터로 보는 CBT 방식은 나랑 안 맞아.' 하고 얼굴 화끈거리며 돌아서던 그 여름날 감정은 5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게 느껴진다.
두 번째 DMV 방문에서야 실기 시험을 볼 수 있었다. 필기야 방심해서 그렇다 쳐도, 실기는 내심 자신 있었다. 미국에 오기 전에도 10년 가까이 운전을 했다. 그중에는 회사 업무상 거의 매일같이 수백 km를 달려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근 10년 무사고 경력인데 설마 떨어지기야 하려고?
그리고... 연거푸 실기시험에 떨어졌다. 시험에 불합격하면 다음 한 주간은 재응시할 수 없었다. 동기들이 필기 실기 통틀어 한나절만에 취득한 면허증을 받기 위해 4주, 한 달을 절치부심해야 했다. 매주 월요일마다 우울한 얼굴로 나타나면 동기들은 MBA에 입학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시험인 GMAT보다 미국 운전면허 시험이 더 어렵다고 애써 웃음을 참으며 어깨를 다독여주곤 했다.
그런데 실기시험을 볼 때 옆자리에 동승하는 감독관의 무뚝뚝한 표정은 운전석에 앉을 때부터 묘하게 압박으로 다가왔다. '뭐 하나만 잘못해봐라... 국물도 없다.' 이런 기세로 팔짱을 낀 채 그는 운전석에 앉은 내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마음은 졸아들었고,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실수들이 나왔고, 그때마다 감독관들은 들고 있던 점수판에 감점을 더했다. (두 번째 감독관은 도로를 지나는 순간 DXXX! 하고 내게 빼액 소리를 질렀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아직도 영 모르겠다.)
세 번째 실기시험을 보고 나왔을 때는 감독관의 얼굴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염라대왕 같이 보였다. 그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했던 질문의 요지는 "오늘 당신의 운전이 어땠다고 생각합니까?"였다.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두 손을 모은 채, "정말... 최선을 다해 운전했습니다!"라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방법이 없었다.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면허증이 필요했으므로. 간절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겨우 운전면허증을 받아 들 수 있었다.
새로운 땅에서 내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신분증 한 장 받아 드는 것,
그 간단한 절차가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은 미처 몰랐다. 직접 겪기 전에는.
워낙 고초(?)를 겪어선지 한동안 DMV 있는 동네는 쳐다보지도 않고 살던 터였다. 그런데 DMV에 대한 풍자가 담긴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라니! 유학 초기 DMV에서 겪었던 억울한 심정을 달래줄 만한 영화일 것이라 마음먹고 개봉하자마자 극장으로 달려가 봤었다.
그런데 유쾌 통쾌하게 봤던 그 영화를, 시간이 지난 후에 아이들과 함께 보니 슬쩍 다른 것들이 보였다. 그 여름 DMV에서의 느낌이 무엇이었는지 스스로에게 솔직해졌다. 한국에서는 많이 경험하지 못했던, 그래서 영 익숙지 않던 그 느낌의 이름은 다름아닌 '편견'이었다. 그것도 '다짜고자 무작정'이라는 꽤 모진 형용사가 붙은. (생각해보면 DMV 직원이 나를 친절하게 대해 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커뮤니티의 일원으로서 나를 맞아주는 학교에서와는 달리, DMV 감독관에게 나는 그저 어눌하게 영어를 하는 행정처리 대상의 하나였으므로.)
그러나 아직 모든 것에 서툰 어리버리한 동양인 유학생에게 보내는 썩 유쾌하진 않은 눈초리는 다시 생각해봐도 여전히 서늘하다. 타지에서의 삶이 생각했던 것처럼 아름답지는 않다는, 오히려 꽤나 녹록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는 전조와도 같았다. 아, 외국인을 영어로 Alien이라고 했던가.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맞서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
디즈니의 55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인 '주토피아'는 동물을 의인화하며 다양한 문화가 섞인 미국 사회를 풍자한다. 토끼와 여우라는 고전적인 동물 캐릭터들에 인간의 감정을 불어넣는 데 그치지 않고, 동물들이 인간과 같은 문명 세계를 구현하여 산다는 세계관을 차용하고 있다. 미키 마우스와 도날드 덕 시절부터 내려오는 디즈니의 동물 의인화 전통에 그리고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 함께 공존하며 살아간다는 개념이 더해졌다. (데즈카 오사무의 '밀림의 왕자 레오'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시골에 사는 토끼 주디는 어릴 적부터 경찰이 되고 싶었다. 부모와 친구들은 그런 주디를 비웃지만, 주디는 굴하지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해 경찰 사관학교에 입학, 수석으로 졸업한 후 대도시인 주토피아 입성에 성공한다. 그러나 꿈꾸던 멋진 경찰생활 대신 주디에게 주어진 것은 단순한 주차단속 임무다. 꾸역꾸역 주어진 일을 하다 우연히 사기를 치는 사막여우 닉을 만난다. 이 인연으로 주디와 닉은 한 팀이 되어 동물들의 낙원으로 포장된 주토피아의 숨겨진 이면을 파헤치고, 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함께 경찰로 활약하게 된다. 대부분의 디즈니 영화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버디 무비다.
<주토피아>를 다시 보게 된 건 지난해 여름 무렵이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이 일어나고 이어 Black Lives Matter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이 확산되던 때였다. 토끼와 여우 등등 다양한 동물들이 많이 나오는 터라 아이들이 좋아하는, 볼 때마다 웃음이 나는 DMV 풍자 신을 보면서 즐거워했던 이 애니메이션이 실은 미국 사회 내에서의 인종간, 문화 간 차별이라는 이슈를 세밀한 터치로 그려내고 있음을 보다 깊이 인식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영화의 초반부는 주토피아 내 주류 사회에서 상대적 소수자에 속하는 토끼가 ‘토끼는 약한 동물이라 경찰은 될 수 없다’는 편견을 뒤로하고 (주류 사회에 속하는) 경찰이 되기 위해 분투하고 성공하는 과정을 그린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할리우드 영화의 문법과 비슷하다. <주토피아>가 다른 영화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후반부에 등장한다. <주토피아>의 제작진은 영화 속에서 토끼와는 다른 또 다른 소수자인 여우가 ‘여우는 교활하고 믿을 수 없는 동물’이라는 편견, 그리고 ‘육식동물은 태생부터 위험한 존재’라는 이중의 차별에 갇혀 있음을 조명한다. 동물을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지만, 토끼인 주디는 여성, 여우인 닉은 미국 사회 내의 소수자 집단인 흑인과 아시안 등 유색인종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평화로운 것처럼 보이는 주토피아는 사실 여러 개의 구획으로 나뉜 공간이고, 그 속에서 누군가는 차별과 편견 속에서 끊임없이 소외당하며 살아간다. 포스터 속의 'Welcome to the Urban Jungle'이라는 표현에 뼈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겉으로는 풍요롭고 화려하며 평등한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지만, 언제든 상황이 바뀌면 누군가에 의해 특정 소수자 집단이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넌지시 경고하는 애니메이션이다.
미국 조지아주에서 한인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총격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국계, 아시아계 친구들은 SNS에 #stopasianhate 해시태그를 달고 자신들이 겪은 차별의 경험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코로나 19 확산 이후 증가해왔던 아시아인들에 대한 혐오범죄가 선을 넘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타임라인 위 끊임없는 해시태그 물결을 보며 <주토피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실제 현실 속에는 훨씬 더 복잡한 배경들이 얽혀 있겠지만, 겉으로는 젠틀해 보이기만 하던 세상도 이렇게 한순간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주토피아>는 5년 전에 미리 보여줬었다. 절대 그럴 리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편견에 기인한 무자비한 차별과 폭력이 언제든지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이제 사람들은 안다.
당분간은 해외여행을 떠나기도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희망을 죄다 내려놓고 부정적으로 변하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주토피아>처럼, 사람들에게 차별이란 무엇인지, 편견이란 무엇인지,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 사람들은 어떤 방향으로 마음을 모아가야 하는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한, 세상은 조금씩이나마 좋은 쪽으로 변화해나가리라 믿고 싶다. 애니메이션 속 사회인 '주토피아' 역시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자정작용을 해나가지 않는가.
<주토피아>는 야, 너두 언제든 주디처럼, 닉처럼 차별받을 수 있어. 그럼 어떻게 할래? 하고 아이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가며 스파링할 기회를 주는 영화다.
약자들이 힘을 합쳐 편견을 허물고 더 좋은 세상을 같이 만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팬데믹 시대를 지나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을 작품이 되지 않을까. 세월을 뛰어넘는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작품은 시간의 무게를 너끈히 견딜 수 있으니까.
아이들에게 보다 다양성이 존재하는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 부모들이라면, 반드시 함께 봐야 할 작품 목록에 올려둬도 좋을 만한 애니메이션이다. 개봉한 지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별이 다섯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