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클어진 마음을 정리해 준 책이 있다. 바로 김주환 교수님의 <내면소통>. 처음 읽을 때도 감탄하면서 읽었는데, 복잡한 심경으로 다시 읽으니 훨씬 더 와닿았다. 무려 800쪽에 달하는 벽돌책이지만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유튜브 강의를 곁들여서 들으면 더더욱 좋다. 특히 추천하는 편은 아래 강의.
강의에선 이런 연구를 소개한다.
이른바 서로에게 푹 빠져 있는, 연애 초기의 연인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남자에게는 여자친구 사진, 여자에게는 남자친구 사진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들의 뇌를 fMRI로 찍었다. 연인의 얼굴을 봤을 때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를 관찰해 본 것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바로 뇌의 '보상 체계 영역'이 아주 활발하게 활성화되었다. 보상 체계 영역이란 뭐냐.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병을 보여주었을 때, 도박 중독자에게 카드를 보여주었을 때 미친 듯 활성화되는 곳이다. 그렇다. 초기 연인은 서로에게 중독 상태다.
이번엔 똑같은 실험을 ‘사이좋은 5년 차 부부’에게 진행했다. 아이도 있고 금슬도 좋고 서로 아주 잘 지내는 부부들. 그들에게 각자 배우자의 사진을 보여줬다. 결과는 어땠을까? 중독 상태와는 거리가 먼, 아주 차분하고 안정적인 패턴을 관찰할 수 있었다. 여기서 재밌는 점. 배우자의 얼굴과 가장 유사한 뇌 패턴을 불러일으키는 시각적 정보는, ‘거실 소파’였다고 한다. 집에서 가장 안락함을 느끼는 공간 말이다. 행복한 부부는 서로에게 그렇게 편안한 존재라는 뜻일 테다. 그렇다. 고도로 발달한 배우자는 소파와 구분할 수 없다. 적어도 뇌 fMRI 사진으로는.
연구의 핵심 메시지는 “연애와 결혼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저는 제 여자친구를 사랑해요', 라고 말하는 남자와 '저는 제 아내를 사랑해요', 라고 말하는 남자의 뇌에서는 서로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결혼은 서로에게 중독적인 초기 연애 상태가 지속되는 일이 절대 아니라는 것. 오히려 반대로 서로를 완전히 편안하게 여기고 신뢰하는 데에 행복한 결혼의 정수가 있다는 말씀이다. 잘 와닿지 않는다고? 유튜브 채널 <인생 녹음 중(@tikitakabooboo)>의 부부를 보면 납득이 된다. 결혼 생활을 해본 적 없지만, 그들을 보며 저렇게 유쾌하게 함께 지내는 것이 결혼의 정수가 아닐까 싶었다.
한편, <알쓸신잡>에서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결혼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결혼은 상대에게 예측 가능성을 주는 것이다.
<연인의 연인에게>, 백영옥
결혼은 서로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라는 소설 속 말이 있어요. 예컨대, 애인 사이일 때에는 끊임없이 놀라움을 줘야 해요. 사랑하는 사람 사이엔 모르는 것, 즉 '무지'가 있어야 하거든요. 완벽하게 알 때는 사랑이 생기지 않고 설렘이 생기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 사랑이 제도로 들어갈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측 가능성, 즉 '신뢰'라는 것이죠. 이제부터는 저 사람이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 가능하도록 해줘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끝없이 약속을 지키는, 작은 약속들을 지켜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
결국 그와 헤어진 이유는 한 마디로 ‘서로를 신뢰할 수 없어서’였다. 서로가 서로의 예측 범위를 사뿐히 넘어가는 사람이라는 걸, 몇 번의 갈등을 겪고 나서 깨달았다. 그 후로도 상대가 경계선을 오갈 때마다 불편해하고 불안해했다. 때로는 부서지거나 무너지기도 했다. 애초에 각자가 예측 범위를 좁게 설정해 둔 건 모르고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다. (물론 이건 내 입장이다) 아마 파혼 직전쯤 뇌 fMRI를 찍었더라면, 아주 혼돈 그 자체였을 거다. 도파민도 세로토닌도 없이, 코티솔만 몽창 나오고 있었을지도.
내면소통과 알쓸신잡을 보며 많이 반성했다. 아, 나는 누군가에게 푹신한 소파 같았던 적 있었나. 오히려 차디찬 마룻바닥 같지는 않았나. 그러면서 (비단 이번 경우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내 곁에서 불편한 좌식 생활을 했을 이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척추 측만과 골반 전방 경사를 상상해 봤다. 참 다행이다. 그들이 지금 나와 함께 하지 않아서. 한평생을 엉덩이 배길 일이 없을 테니. 나는 기도했다. 지금이라도 그들의 척추와 골반이 안녕하길. 지금이라도 푹신한 소파에서 평온하길.
TMI : 나는 연초마다 ‘올해의 문장’을 정하고 한 해 동안 되새기는 리추얼이 있는데, 2025 올해의 문장은 ‘being kind than being right’이다.
자, 이제 이 두서없는 글을 정리하자. 혹시나 이 글을 보고 있을 (이 글을 굳이 보고 있다면 아마 싸웠을 가능성이 농후한) 예비부부에게 한 마디. 분한 감정을 추스르고 행복한 부부의 뇌 fMRI를 떠올려 보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되물어보라. 나는 푹신한 독립 스프링 침대만큼 상대에게 충분한 편안함을 주고 있는가. 딱 알맞게 젖혀지는 리클라이너 소파처럼 충분한 아늑함을 제공하고 있는가. 혹시 예비 배우자가 주머니 사정에 맞지 않는 가구를 고집한다면, 그건 당신을 포근하게 느끼지 못해서일지 모른다.
신혼살림을 고르다 그렇게 헤어지는 커플이 많다는데. 경험에 비추어 충고하자면, 사실 그건 가구 때문이 아니다. 그냥 서로에게 푹신함이 없어서 그렇다. 언제든 온몸을 깊숙하게 감싸주는 푹신함. 함께하려는 두 사람에게 필요한 건 사실 그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