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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과 '함께'라는 집착

by core Feb 2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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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에서 길게 썰을 풀었듯, 나는 많은 시간 동안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 부단히 노력했다. 잠도 푹 자보고, 명상도 해보고, 책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눴다. 그중에서 가장 도움이 되었던 건, 다름 아닌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었다.


첫 에피소드부터 뼈 맞음


<즉문즉설>에는 각기 다른 괴로움을 가진 이들이 스님 앞에 선다. 이혼 후 암에 걸린 남자, 바람피운 남편을 둔 아내, 자식이 결혼을 안 한다고 걱정인 부모, 자식이 (맘에 안 드는) 결혼을 한다고 걱정인 부모 등등. 그런 갖가지 인생 고민들에 대한 스님의 답변은 하나다.


모든 것은 내 마음의 문제다. 


배우자도, 어떤 사건도, 기구한 사주팔자도 괴로움의 원인이 아니다. 오직 내 마음이 원인이다. 상대를 바라보는 내 마음, 사건을 내 입장에서만 해석하려고 하는 내 마음, 운명 탓으로 돌려버리고 진실을 마주하기 싫어하는 내 마음이 문제다. 내 마음에 원인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다스리지 못하면―특히, 남의 마음이 내 마음처럼 되기를 바라면―괴로움은 끝이 나지 않는다.


자연스레 그간의 일들을 돌아봤다. 나도 스님 앞에 선 질문자들과 똑같았다. 그들과 똑같이 집착하면서, 동시에 외면하고 있었다. 한 번 하는 결혼. 평생 살아야 하는 배우자. 인생에서 가장 큰 선택. 나는 결혼이란 것에 너무 큰 기대를 했다. 그래서 상대방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었으면 하고 욕심을 부렸다. 그땐 몰랐다. '평생'이라는 조건이 어디까지 무거워질 수 있는지. '함께'라는 당위성이 서로에게 얼마나 가혹해질 수 있는지.


평생 함께할 사람이라면, 이런 건 지켜야 해.
평생 함께할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는 게 옳아.
평생 함께할 사람이라면, 저렇게 하는 게 당연해.



이걸 깨닫고 나니 그도 그랬겠구나, 싶었다. 그를 미워할 일도 원망할 일도 없었다. 전까지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행동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두려웠구나. 그도 나처럼 무지했구나. 그는 내게 의지하고 싶었구나. 그를 이해하면서 내 마음도 비로소 헤아려보게 되었다. 나는 비겁했구나. 나도 그처럼 무서웠구나. 나도 그에게 의지하고 싶었구나.


사람이 무언가에 집착을 하면, 마음 크기가 바늘 끝 하나 꽂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좁아집니다. 그러나 집착을 놓아버리면, 마음에 온 우주가 들어가도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넓어지지요.

-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中




그렇다고 나는 자책하지는 않는다. 그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가 옳고 내가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는 좋은 사람이고 여전히 나도 좋은 사람이다. 서로가 원하는 바가 달랐고, 결국 그걸 상대에게 줄 수 없었고,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자각했을 뿐이다. 그뿐이다.


그럼 앞으로 누군가를 만날 때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할까. 이윤주 작가는 책 <나를 견디는 시간>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은 그를 데려오는 대신 나를 도려내는 일이라고. 나는 앞으로 내 자신을 기꺼운 마음으로 도려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 내게 이걸 요구하든 저걸 요구하든 그저 웃으며 내어줄 수 있는 마음. 내가 이걸 주든 저걸 주든 어떠한 셈도 하지 않는 마음. 그러니까 베푸는 일 자체에서 충만해지는 마음이 되고 싶다. 아니, 그래야 한다. 평생 혼자 살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살 거라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 물론 상대가 아닌 나를 위해서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누구보다 내가 괴롭지 않을 테니.


부부가 서로 상대방을 기꺼이 도와주되
그 대가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때
행복한 결혼생활이 유지된다.

<불변의 법칙>, 모건 하우절

<나의 아저씨>에서 좋아하는 장면<나의 아저씨>에서 좋아하는 장면


혹자는 인간인데 어떻게 그런 경지가 가능하냐고 묻는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경지가 아닌데도 결혼 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이들이 훨씬 더 대단해 보인다. 내가 얼핏 엿보고 온 결혼 생활은 지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서로를 서로의 기대로 옭아매고, 끊임없이 바라고 또 원망하는 굴레. 그걸 상대의 가족이며, 사소한 생활 습관이며, 경제력이며, 주제만 바꿔가면서 반복하는 삶. 나는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아직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해서) 도중에 백기를 들었다.


물론 지금 돌아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머리로는 이해했다고 하지만 막상 현실 속에서는 나 역시 내 감정에 경도될 것이고, 내 입장에만 매몰될 것이고, 이해심은 갈수록 옅어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연습을 하려고 한다. 기대하지 않는 연습, 욕심을 내려놓는 연습, 베풀고 잊어버리는 연습, 주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연습. 앞으로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연습 없이 누군가를 만나면 고통이 반복될 것임을, 이제는 안다. 아, 그동안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아왔던가.




마지막 결론, 법륜 스님의 최신 인터뷰로 마무리.

브런치 글 이미지 2

스님은 말씀하신다. 우리는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주위 환경과 습관에 의해 '살아지고 있다'. 습관과 무의식으로 프로그래밍된 기계처럼 말이다.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짜증이 나면 짜증을 내고, 화와 짜증이 누적되면 결국 파혼 같은 걸 하기도 한다. '왜' 그랬는지―표출된 감정의 이면에는 어떤 구체적 이유가 있었는지―헤아릴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다. '왜 반복되는가'에 대해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니 계속 똑같은 삶을 되풀이할 수밖에. 특히 ‘내가 왜 그랬던가’에 대해 모르면 ‘그가 왜 그랬는가’에 대해서는 평생 알 방도가 없다. 그렇게 남 탓과 원망만 하며 스스로의 삶을 비관하는 거다.


그렇다면 이 '살아지는 삶'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스님은 '자각'에 대해 강조한다.  

법륜 스님은 예를 하나 들었다. “남이 ‘너 고집 그만 피워라’라고 하면 참는다. 그건 변하는 게 아니다. 잠시 멈추는 거다. 그런데 본인이 ‘아, 내가 참 고집이 세구나’하고 자각하면 달라진다. 그때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자각의 출발점이 바로 ‘물음’이다.”


이번 경험 덕분에 나도 비로소 '자각'하기 시작했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 요즘 난립하는 각종 결혼과 이혼 프로그램을 보고 있자면, 삼십 대에 이런 경지(?)에 이른 사람은 매우 드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화려한 이혼 경력 없이도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적어도 십 년은 앞서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넉넉해진다. 역시,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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