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의 배신
드디어 도착했다.
찬거리가 든 묵직한 종이상자를 들고 이층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은 마냥 가볍다.
띠리리리.
도어록에서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는 환영 인사처럼 경쾌하다.
현관문이 열리고 배꼼 내다보는 반가운 얼굴, 큰딸.
신발을 벗고 중문을 통과하면 작은딸이 있을 것이다.
그 얼굴을 만나기 십 초 전.
집안으로 들어서자 왼쪽에 있는 방문이 활짝 열려 있고 침대에 엎드려 있다가 엉거주춤 일어나는 작은딸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운 얼굴.
성큼성큼 다가가 무턱대고 안아주고 싶다.
보고 싶었다며 얼굴을 쓰다듬고 꽉 안아주고 싶다.
그러다 눈물이라도 나면? 감정이 증폭되고 울음을 그치지 못하면? 이런 감정 표현이 딸을 힘들게 한다면? 순간 멈칫한다. 큰딸처럼 우울증과 공황에 능숙하지 않다는 걸 상기한다. 성큼성큼 다가가려던 다리에 힘을 뺀다.
실수하지 말자, 나는 나에게 말한다.
그래서 그리운 얼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거나 무턱대고 안지 못한다. 주춤주춤 다가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잘 지냈냐고 부자연스럽게 말한다. 얼굴을 쳐다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아 눈은 살짝 내리깔고서.
작은딸이 건조하고 어색하게 대답한다.
잘 지냈다고.
아침에 통화할 때의 부드러움은 없다.
나는 얼른 주방으로 가서 쌀을 씻는다.
이게 다 뭐예요?
뒤통수에 대고 큰딸이 말한다.
밥 안 먹었지? 반찬 하려고.
고개를 돌리며 내가 말한다.
굳은 얼굴로 작은딸에게 가버리는 큰딸.
뭐지? 조금 당황스럽다. 그러나 손은 부지런히 움직인다.
계획대로 밥 먼저 안치고 반찬을 만든다. 평소라면 맛있는 냄새, 이건 뭐야?라며 주방을 서성거릴 만도 한데 두 딸은 얼씬거리지 않는다. 힐끗 방을 들여다보니 침대에 엎드려 핸드폰을 보면서 이런저런 말을 하고 있다. 둘만 있는 것처럼, 나는 여기 없는 것처럼. 음식 냄새 사이로 은은하게 퍼져 있는 냉랭한 공기가 말한다. 넌 포스트잇이 되어버린 게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이게 아닌데.
뭔가 잘못되었다.
그러나 나는 또다시 여전히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오랜만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둘러앉은 네 사람.
어색하고 불편하다. 이런 적이 있던가? 밥상에서? 없다. 단 한 번도 없다.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입을 내밀고 있거나 투덜거리는 정도였지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다.
어렵사리 내가 말한다.
많이 먹어.
딸들이 조금 고개를 끄덕였던가? 그것도 없었던가?
남편이 많이 먹어, 혹은 잘 먹을게, 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각자의 밥그릇을 내려다보며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았고 밥을 입에 욱여넣었다. 작은딸이 가장 먼저 뒤로 물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내 어깨 위로 무거운 돌덩이가 내려앉는다.
밥상을 정리하고 반찬을 냉장고에 넣는데 큰딸이 말한다.
뭐해요?
반찬 넣고 있어.
필요 없어요.
밥 먹을 때 있으면 좋잖아.
밥이 뭐가 중요해요. 나가서 사 먹으면 되는데.
그럼 김치만이라도.
손을 멈추지 않는 나를 향해 큰딸이 말한다.
이제 가요.
그때서야 등을 돌려 큰딸을 본다.
다 가져 가요.
손가락으로 냉장고에서부터 싱크대까지 둥글게 반원을 그리며 큰딸이 말한다.
잠시 멍하게 있던 나는 반찬통을 종이상자에 넣는다.
아무렇게나 주섬주섬.
마지막으로 두 딸의 얼굴을 쓰윽 본 다음
쫓기듯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딸깍,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도어록이 잠긴다.
차가운 소리를 내며 굳세게.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로 좁혀졌던 작은딸과의 거리는 다시 멀어진다. 이번에는 큰딸도 함께. 그곳은 사막이 아니다. 이제 그곳은 어딘지 알 수도 없는 음습하고 어두운 곳이다.
더 묵직해진 돌덩이는 내 어깨를 짓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