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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우의 뜰 May 10. 2023

아버지가 사라졌다.

나는 둘째 딸이다.


법정 스님의 책 [아름다운 마무리]를  한 달 만에 필사했던 아버지는 이젠 없다.

박준 시인의 시를 베껴 할아버지를 추억하며 [안암동]이라는 시를 썼던 그때의 아버지는 이제 없다.

내 차 타이어 펑크나지는 않았는지 수시로 봐주시고, 내 책들을 모아 도서관처럼 서재를 꾸며주신 그 시절의 아버지는 이제 없다.

뽕짝이 아닌 뉴에이지 음악을 틀어놓고 손에는 걸레를 들고 온 집안을 윤이 나게 닦으시던 아버지는 이제 없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어딜 가고, 그 자리에 낯선 아버지가 있었다.  

은행 ATM 기계가 자신을 능멸하면서 돈을 내놓는다고 욕설을 퍼부으셨다.

아니라고, 말리던 나에게 "너도 나가. 나가 죽어'라며 후려치셨다. 

아침과 밤을 구별하지 못하고, 술을 밥처럼 꺼내 드셨다.

넘어질 듯 말 듯 오른쪽으로 기울어져서 다리를 끌면서 걷다가 넘어지셨다.

소변이 마렵지 않다고 하면서 실금을 하셨다.

밥 투정하듯 안 먹는다 하고, 한 시간 내내 맛있게 죽을 쑤신 엄마에게 죽이 딱딱하다며 밥그릇을 내던지셨다.


2년 전이다. 이런 아버지의 심한 폭언과 과격한 행동에 엄마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를 원망하진 않았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말에 의지하며 살았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고, 아버지도 스스로 반성할 것이도, 엄마도 스스로 극복하실 거라고 믿었다. 산짐승들은 몸에 병이 들면, 숲에서 가만히 웅크리면서 회복이 될 때까지 기다린단다. 가만히 가만히 시간을 보낸단다. 정말 그랬다. 특별한 시술도 받지 않고 재활운동과 처방약, 다정하게 옆에 있어준 시간만으로 3개월 만에 엄마는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알츠하이머는 다르다.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2년 전 그때, 겨우 아버지를 설득해서 강서구 치매지원센터에 등록했었다. 나는 둘째 딸이기 전에 간호사로서, 치매 증상이 있는 아버지에게 해드릴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퇴근하면 늦은 밤까지 기다려 주신 아버지와 식탁에 마주하고, 주말이면 동네 재래시장을 다니면서 장도 보고 막걸리도 한잔씩 했다. 컬러링북을 완성하고, 치매센터에서 카톡을 보내주는 문제도 매일매일 함께 풀었다. 법정 스님의 책을 완전히 필사하셔서 장학금을 드렸고, 박준 시인의 시도 함께 낭독했던 것이다. 하루종일 옆에서 돌보시느라 마음고생 몸고생 하시는 엄마도 위로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아버지는 알츠하이머라는 진단을 받았다.


학교에서, 병원에서, 주변 선배님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치매환자들을 만났고 가정이 무너지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억을 잃어버리고, 소중한 추억도 망가뜨린다. 가족들은 점점 지쳐가고 환자에 대한 기대가 없어진다. 과거가 사라지고 미래조차 꿈꿀 수 없는, 오로지 지금의 힘겨운 상황만 있게 되는 치매.

신경과 진료실을 나오는 아버지의 어깨가 더 기울고 허리는 더 굽었다. 눈만 깜박이며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두리번두리번하셨다. 눈물샘이 고장 난 걸까. 자꾸 눈물이 흘러나왔다. 둑이 무너질 듯 목놓아 울고 싶었다. 



치매란 자신이 젊은 시절 애쓰며 건너온 징검다리를 되돌아가는 것.
되돌아가면서, 자신이 건너온 징검다리를 하나씩 치우는 일.
그때 옆에 있는 당신은 답답하다고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그녀에게는 당연한 일들.
그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저 둑에 서서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일. 밝게 웃어주며 날 천천히 잊어달라고 비는 일. 안단테, 안단테...


만화가 박광수 님의 글이다. 어디서 이렇게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작가는 어머니가 차려주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한 일이 치매 가족에게는 눈물겨운 소원이다.


원망과 좌절, 슬픔과 걱정의 늪에서 다시 희망으로 항로를 바꾸려 한다. 누굴 탓하는 시간도 아깝다. 아버지와 나, 우리 가족에게 다가온 불편한 손님, 치매. 더 깊게 다가오지 않도록 어르고 달래야 한다.

오줌을 지리고 벽에 똥칠을 하더라도 치매라는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아버지의 손을 꼭 잡을 것이다.


박광수 작가처럼 '손을 흔들며, 제발 천천히 천천히 다가오기를' 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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