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아시아 청년 다큐멘터리 공동제작’ 섹션의 영화 <구구구>(트레버 포, 옌 이 추, 이 잉 황, 박한나 연출 / 2022)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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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영화는 하나의 경계를 설정하며 시작합니다.
“갑자기 바깥세상이 창문 하나로 제한되었다 / 나무가 이상한 모양으로 자라기 시작했다”
세상이 창문 하나로 제한되었다는 건 반대로 창문 하나에 세상을 담았다는 얘기이기도 하겠지요. 온라인이라는 창에서 만난 그들은 이미지와 언어를 안고(이어지는 자막에서 그들은 이미지와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각자의 길 위에서 발견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에 앞서 그들이 발견한 이상한 모양으로 자라는 나무는 무엇일까요. 저는 부서지고 무너진 자리에 세워진 타워 크레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방대한 도시(개발)의 표상이요. 이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소소한 근황을 나누며 문득 그들이 찾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창문으로는 충분하지 않기에 / 모든 도시와 골목에서 우리 자신을 찾기 시작했다”
이 자막에 이어지는 장면은 창문의 난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비둘기들의 모습입니다. 비둘기들은 공사현장과 해양 쓰레기들, 강가의 페트병들과 물리적으로, 이미지적으로 엮이며 “자연과 환경에 대한 사랑”의 메신저가 됩니다. 동시에 네 명의 사람이 자신들을 비둘기라고 자처합니다. 그럼 이들이 곧 사랑의 메신저가 되겠군요.
하지만 그들이 내내 발견하는 이미지는 흔히 얘기하는 자연이나 사랑의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우선 첫 번째 메신저는 쓰레기 더미를 보여줍니다. 사물의 죽음과 해방을 짐짓 느끼게 만드는 그것들은 원래의 쓰임으로 영영 돌아가지 못하고, 동시에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지만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면서 생태계를 교란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들의 무지향성은 플라스틱 장난감의 모습으로 두 번째 메신저에게 닿으며 외로운 슬리퍼를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하지만 외로운 슬리퍼와 플라스틱 장난감은 엄연히 다릅니다. 외로운 슬리퍼는 유실물이라면 플라스틱 장난감은 버려진 것이니까요.) 자연에 기존하던 것들과는 이질적으로 표류하는 플라스틱 장난감은 여전히 친구를 찾지 못하고 있네요.
큼지막한 타워크레인이 방향을 바꿉니다. 그러고는 바싹 마른 땅을 보여줍니다. 흙을 파내고 땅을 뒤엎는 모습을 보며, 또 다른 메신저는 공사현장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포클레인이 드러내는 “날것의 흙”, 그것이 돌연 땅과 가까워지는 순간을 만드는 것 같다고요. 우리는 자연을 자연스럽지 않은 곳에서 발견하고 떠올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총을 주운 이도 있습니다. 그는 형광 주황빛이 도는 장난감 총을 바닷가에서 주웠습니다. 쓰레기 더미에 그것을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에게 장난감 총은 이미 잊히고 버려진 기억이었는데 그것이 눈에 띈 순간 다른 수많은 버려진 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왜일까요. 이 물음은 우리가 안고 갈 이야기 중 하나가 됩니다.
공사현장에서 화약(폭죽)이 요란하게 터지고 그 뒤로는 고속 열차가 지나갑니다. 환경오염 한복판에서 자란 메신저 중 한 명은 그것들이 너무나도 친숙한데 어떻게 미워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쉽게 성찰을 요구하거나 반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음이 물음 그 자체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시로 남고 동시에 현실로 이어집니다. 이 글이 제멋대로 시론의 외피를 덮고 있다면 아마 이런 물음들이 영화 곳곳에 있기 때문 아닐까요.
자연과 동떨어진 곳에서 평생을 살고 자연을 학교와 미디어에서 배우는, 자연과 하나라는 감각을 느낄 일이 드문 이의 질문은 우리에게 결코 낯선 것이 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렇기에 “지식을 배우면서 삶에 존재하지 않던 것을 들인 셈”이라는 그의 말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들에 날개가 부러진 부메랑을 던지는 모습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다고 의미마저 없는 것은 아닐 테지요. ‘해변에 떠내려 온 버려진 인형이 22년 동안 나와 함께 해온 인형과 무엇이 다를까?’ 라는 물음을 남겨둘 수 있게 됐으니까요.
마지막, 네 명의 메신저들은 각자의 목소리, 각자의 언어로 나란히 발음합니다. 사각 창문이 들어찬 아파트와 흔들리는 나무들이 보이고 비로소 우리가 매 순간 지나치는 일상적인 인위의 풍경 앞에서,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지만 무언가를 알고 난 이후에는 기어코 고개 돌릴 수 없는 것들을 들여다보면서요.
“우리에게 이미지가 있다 / 우리에게 언어가 있다 / 우리는 창문을 통해 서로 바라보고 이야기한다 / 그러나 이 사각 창문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큰 해협과 거리에는 여전히 우리가 만든 것들로 가득하다 / 창문 밖 비둘기들은 대지의 메신저로서 긴 하루를 보내고 쉼을 얻는다 / 광활한 풍경 속에서 비둘기들은 그들의 깃털 사이로 다음 세대를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