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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Mar 11. 2024

애증의 라미 사파리 수성펜

나는 무엇 갖고 싶어지면 미칠 듯이 마음이 타오른다. 그렇다고 확 질러버리는 성격은 못돼서 소논문 쓰듯 물건을 분석하고, 사람들의 사용기를 꼼꼼히 읽는다. 쿠팡이나 네이버 리뷰도 혹평부터 살펴본다. 아마 이런 버릇으로 수명이 3년은 줄어들 것이다. 반면 계좌 잔고는 그런대로 잘 방어가 되고 집 안 공간도 적당히 비워서 여유를 유지할 수 있다.


어떤 물건이 갖고 싶을 때 내 앞에 놓인 선택지는 두 개다. 기존의 헌 것 혹은 망가진 것을 버리고 새 제품을 산다. 혹은 기존의 것을 고쳐 쓰거나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다. 키보드로든 필기구로든 글씨 쓰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펜은 꽤 중요한 도구다.


특히 펜은 엄청 많이 쓰지는 않지만, 하루에 못 해도 한 번은 꼭 사용하는 도구이므로 사용감이 괜찮아야 한다. 선이 거칠거나 조작감이 불편하면 영 기분이 좋지 않다. 더구나 나는 ‘할 일 목록 to do list’ 만큼은 꼭 볼펜으로 작성하고 체크한다. 펜이 부드럽게 잘 굴러가면 하루가 술술 풀리는 기분이 든다. 고로 투 두 리스트 작성은 아무 펜으로 하지 않는다. 나의 투 두 리스트 용 펜 중 애증의 물건이 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라미 사파리다.


라미 사파리 수성펜은 정말 끝내주는 펜이다. 일단 디자인과 색깔, 그립감이 끝내주게 근사하다. 그리고 안에 들어있는 M63 수성펜심이 끝내주게 실망스럽다. 수성펜 리필 하나에 육천 원이 넘는 주제에 글씨가 나오다가 끊겼다가를 반복한다. 볼펜 똥이 덕지덕지 묻어 나오는 공공기관 배치용 스프링펜에도 못 미치는 필기감이다. 그냥 보면 예뻐 죽겠는데 뭘 좀 쓰려고 펜을 잡고 있으면 한숨이 나온다. 그렇지만 버릴 수 없다. 지금 내게는 선물 받은 라미 사파리 수성펜만 두 개다. 라미는 예전부터 나와 인연이 있었다.


대학 시절 손으로 일기를 쓰겠답시고 처음 내 돈 주고 산 만년필이 노란색 라미 사파리였다. 특유의 손가락에 착 감기는 사용감이 좋았고, 뚜껑을 닫을 때 탁! 하는 부드러운 밀폐음이 근사했다. 나는 미지근한 물에 만년필 촉을 살짝 담가 굳은 잉크를 녹인 다음 일기를 썼다.


서울 시립 미술관 아트샵에서 산 커다란 노트에 라미 만년필로 사각사각 글씨를 쓰고 있으면 꽤 제대로 된 인생을 사는 사람인 양 착각에 빠졌다. 붕 떠있는 그런 느낌이 나쁘지 않았고 라미 만년필이 고양감의 일부를 담당했다. 안타깝게도 만년필 잉크는 금방 동났다.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생이었던 나는 큰 마음먹고 리필을 갈아 끼웠다. 그러다 여자 친구가 생기면서 라미는 서랍 속에 봉인되었다. 이만 원으로 한 달 치 만년필 리필을 사는 것보다 데이트 때 파스타 한 끼를 먹는 것이 더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라미에게 미안함도 아닌 부채감도 아닌 여하튼 외면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이 있다.


그렇지만 M63 수성펜 리필은 정말 별로다. 교체 후 초반에는 괜찮은데 나오다가 벅벅 거리고, 색이 옅어지고 난리다. 글씨 쓰기 싫어하는 애를 데리고 억지로다가 종이에 문지르는 것 같다. 하나에 칠천 원 하는 리필심 치고는 몹시 괘씸하지 않은가. 나름 라미는 프리미엄 펜의 문지기 역할을 하는 브랜드다. 아무리 프리미엄 펜이 비실용성을 표방한다고 하지만 배신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심지어 라미 유성펜 라인인 M16 리필 심하고도 호환이 안 된다. 정말 미칠 노릇이다.


갑자기 리뉴얼된 모나미 153 라인업에 눈길이 갔다. 옛날의 플라스틱 똑딱이 볼펜이 아니라 묵직하고 영롱한 빛깔의 153 친구들이 있다. 나는 네이버 모나미 공식샵을 한 시간째 째려보면서 평행우주의 나에게 153을 쥐어준 다음 한참을 끄적거리며 놀았다. 낄낄낄 국산도 기술 많이 좋아졌다. fx4000 리필심 후기도 만족스럽다. 그러다 아차! 정신을 차렸다. 사고 싶다고 다 사고 과소비하며 쇼핑몰 들락거리면 도파민 시스템이 망가진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질 나쁜 도파민에 절어 나날을 보내고 싶지 않다. 거기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한 발걸음을 떼야한다.


세상에는 나처럼 라미 수성펜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인간이 있을 것이다. 또 그중 일부는 돌파구를 찾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있었다.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 했던가. 라미 수성펜 최악, 별로, 짜증 같은 입력어를 섞어서 검색했더니 나보다도 깊은 분노를 간직한 분이 계셨다. 그분은 심지어 네이버 블로그에 게시물을 열 개도 넘게 써 가며 라미 욕을 하고 개조법을 연구하셨다.


그렇죠! 바로 이거거든요! 이 헤아릴 수 없는 허탈함.


오호라, 나는 즉시 그분과 동맹이 되었다. 블로그를 탐독하길 두 시간째 나는 비로소 빛의 길이 열리는 것을 목도하였다. 놀랍게도 제트스트림 겔펜 리필심과 라미 수성펜이 호환이 된다는 것이다. 단 길이가 5밀리미터 짧으니 재주껏 뒷부분만 연장시키면 된다는 단서가 달려있었다.


아무렴 어때, 어두칙칙한 새벽안개가 물러가고 환한 햇빛이 울적한 내 가슴을 위로해 주는 기분이 들었다. 실용 학용품의 대가인 일본 답게 제트스트림 리필은 하나에 700원 밖에 하지 않았다. 가격에 반해 기능은 월등히 우수했다. 낮은 필기저항으로 상당히 부드럽게 글씨를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흑색밀도도 탁월해 글자가 진하다. 심지어 마르기도 잘 말라서 종이에 잘 스며들고 잉크가 손에 묻는 정도도 훨씬 덜하다.


아, 정말 유럽의 몽블랑 이하 크로스, 펠리칸, 파커 등 비실용성을 세일링 포인트로 내세우는 프리미엄 펜 메이커들은 입에 펜을 물고 반성해야 한다. 내 비록 ‘노량’을 보며 눈물 흘리고, ‘영웅’을 보며 울컥했던 사람이지만 제트스트림의 우수성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나는 애증의 라미를 다시 사랑스러운 라미로 보듬을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펜을 사지 않아도 되어 쇼핑 횟수를 줄였고, 펜심만 주기적으로 갈아주면 반영구적으로 빈티지를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욜로, 한 번 사는 인생이니까 돈 있다고 다 버리고 새로 사지 말고 괜찮은 물건을 잘 관리해서 오래 쓰고 싶다. 꼭 사람이 아니라도 인연이 있으면 수성펜 하나에도 감정이 생긴다.


그건 그렇고 라미 사장님 내 말 좀 들어봐요. M16하고(유성펜도 세트로 상태 안 좋음) M63 리필심 무조건 바꿔요. 기술투자 힘들면 일본 애들한테 OEM 주고 중성펜 겔펜으로 그냥 받아서 리패키징해서 팔아보세요. 장담하건대 라미 볼펜이랑 수성펜 라인업 판매량 25%는 뜁니다. 진짜예요. 네? 프리미엄 펜은 안 나오는 맛으로 쓰는 것이라고요? 에르메스가 재고 백 불태우는 소리는 나의 상식으로 아직까지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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