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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Apr 01. 2024

세상에 나쁜 안경은 없다

나는 가급적 물건을 고쳐 쓰자는 주의다. 같은 물건이라도 꼼꼼하게 관리하는 것과 방치하는 것은 천지 차이가 있다.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금세 물건이 못 쓰게 되어 다시 사는 수가 생긴다. 그런데 때때로 관리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새 물건을 사야 하는 경우도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내게도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새 안경을 사 버린 것이다. 충동구매는 아니었다. 아내가 내 오른쪽 귀 뒤쪽 피부에서 진물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기겁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발견 즉시 내 손을 잡아 시내 안경점으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당일 현장 구매. 어째서 멀쩡하던 피부에서 진물이 나오는가. 사정은 있다. 안경 수리가 그 시작이었다.


새 안경을 사기 전까지 나는 안경 두 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2016년에 구매한 동그란 프레임의 금속 안경테 '리버티', 다른 하나는 2018년에 마련한 하금테 안경 '블루문'이었다. 브랜드는 모두 젠틀몬스터. 하금테 안경이란 전체적으로는 뿔테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렌즈의 아랫부분을 금속테 처리한 모델을 가리킨다.


나는 하금테 모델인 '블루문'을 압도적으로 자주 썼다. 특별히 '리버티'보다 예뻐서 그런 것은 아니다. 금속 프레임이 잘 어울리는 복장이 분명 있다. 그렇지만 '리버티'를 쓰면 두통이 왔다. 첫날은 괜찮은데 둘째 날부터 가 문제였다. 오른쪽 귀 뒤쪽이 눌리면서 빨개지더니 일주일 후에는 진물까지 나왔다. 아프고 쓰라렸으며 마침내는 어지러워졌다. 보기 좋자고 사람 잡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일주일에 여섯 날은 '블루문'을 쓰고, 하루 정도만 '리버티'를 썼다. 리버티를 쓰는 날에는 특별히 안경과 잘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었다. 나는 크림색 코튼 니트에 리버티를 자주 매칭했다. 블루문과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서 리버티 비중을 늘리고 싶었으나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리버티를 쓰고 있노라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길게 잡아서 하루가 한계, 이틀은 절대불가.


리버티 구입 이 년 만에 블루문을 구입하게 된 계기도 고통 때문이었다. 집에서만 끼던 보급형 학생 안경테가 엉덩이에 깔려 박살 난 것이다. 그 말인즉 365일 24시간 리버티 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처절하게 열흘을 버텼다. 그간은 밖에서 리버티를 착용하고, 집에서는 실내전용 안경을 쓰는 방식으로 고통을 덜어왔다. 밖에 나가있는 시간이라 해 봐야 길어도 10시간 남짓이었다. 상처가 생기기 전에 회복할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불의의 해프닝으로 나를 두통으로부터 막아준 보호구가 파괴되고 만 것이다.


리버티 두통을 안고 살아가던 열흘 째, 나는 항복하고 말았다. 편한 안경을 낄 수만 있다면 간이며 쓸개도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급적 기존의 물건의 쓰임이 다하지 않으면 새로 사지 않는다는 신념을 깨버렸다. 마하트마 간디는 모자 쓰고 모자 사러 가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나는 그 말을 좋아했다. 그러나 '리버티'는 그 이름과 달리 내게서 편안함이라는 '자유'를 깡그리 앗아가 버렸다. 나는 살기 위하여 안경점에 갔다.


금속테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두통의 원인이 금속테에 있다고 찰떡 같이 믿었으니까. 검정 뿔테를 집어 들고 결제를 하려다 금속테의 영롱함에 미련이 남았다. 그래서 절반은 뿔테, 절반은 금속인 '블루문'을 손에 들었다. 내가 안경사 분께 주문한 것은 단 한 가지. 이 안경 편한가요? 무조건 편해야 해요.


강요하듯 편안함을 요구하는 나를 보며 안경사 님은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것 같았다. 눈을 마주치며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 다시 한번 끄덕, 내 얼굴을 유심히 보셨다. 그리고 확신하듯 말씀하셨다. 무조건 편하실 거예요.


십 분 뒤, 도수 렌즈를 삽입한 '블루문'이 등장했다. 안경사님은 직접 내 얼굴에 블루문을 씌워주었다. 첫 느낌은 가벼움. 뒤이어 쏴아아 빛이 쏟아졌다. 귀에 난 상처에서 따가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맞아, 안경은 부드러운 면 티셔츠처럼 편안해야 하는 것이었어. 블루문이라는 마법에 홀린 나는 그 뒤로 6년 가까이 새 안경을 맞추지 않았다.


자동차의 엔진오일을 만 킬로미터마다 교체하듯 안경도 관리를 해 주어야 한다. 나는 이 년 간격으로 젠틀몬스터 수리 서비스에 블루문을 맡겼다. 수리비용은 택배비를 포함하여 만 원. 깔끔한 박스포장으로 돌아온 안경은 새 상품과 다름없이 반짝였다. 코받침은 새것으로 바뀌었고, 금도금 부분도 깔끔히 벗겨내고 다시 금칠이 되어 있었다. 템플과 팁도 아세테이트 폴리싱이 되어 윤이 났다. 수리 기간은 일주일 내외. 번거롭긴 해도감내할 만한 수준이었다.


이번에도 일주일을 예상하고 블루문 수리를 맡겼다. 하지만 며칠 뒤 전화로 들려온 청천벽력 같은 소식. 고객님 블루문 모델은 단종되어 다리팁 전면교체는 힘듭니다. 소모품 교체와 폴리싱을 본사에서 가능하나, 금도금 작업은 외부 위탁 서비스를 맡겨야 합니다. 기간은 한 달 이상 예상됩니다. 그래도 진행하시겠습니까? 참고로 비용은 삼만 원입니다.


나도 모르게 이마를 탁 짚었다. 플라스틱 폴리싱만 맡긴다면 금방 돌아오겠으나, 도금 부분 손상이 워낙 심했다. 최대한 조속히 진행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린 뒤 수리 비용을 냈다. 떨리는 마음으로 리버티를 착용한 나는 주문을 외듯 다짐했다. 제발, 잘 부탁해.


'리버티'는 일관성 있는 친구였다. 이틀째부터 슬금슬금 압박을 해오더니 마침내 아흐레가 되던 무렵 진물을 분출시켰다. 알코올 스왑으로 귀 뒤를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던 그날 나는 아내에게 발각되어 새 안경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고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는 존재이지 않던가. 나는 귀가 아파서 새 안경을 맞춘다는 본래의 목적을 망각하고 아주 멋지고 위험한 녀석을 골랐다. 어쩐지 훗날 귀가 아플 수도 있을 것처럼 생긴 검정 뿔테였다.


모델명은 '쿠보' 기존의 리버티, 블루문에 이은 역시 젠틀몬스터 제품이었다. 나에게는 충실한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하는 브랜드가 중요했다. 디자인은 역대급으로 발군, 당연히 착용감도 리버티보다 나았다. 오른쪽이 약간 끼는듯한 느낌이 있었어나 괜찮았다. 나흘까지는.


닷새째 되던 날 세수를 하려 안경을 벗다가 "아야!"하고 소리 내고 말았다. 리버티와 정확히 똑같은 위치에서 따가움이 밀려왔다. 안경의 저주가 시작된 것이다. 블루문 수리가 끝나려면 보름이나 남았는데 어떻게 살으란 말인가. 나는 진심으로 나의 덜떨어진 선택이 통탄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왜 근사한 안경은 내게 맞지 않는가. 나도 멋진 안경을 즐겁게 쓰고 싶단 말이다.


쿠보는 리버티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래도 오른쪽 귀 뒤편이 몹시 성가셨다. 가만히 있어도 따끔거리는 느낌이 났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신세. 내가 선택한 안경이었고, 사서 하는 고문이라 해도 할 말 없었다. 그래도 쿠보를 계속 끼고 다니기에는 곤란했다. 정말 마음에 쏙 드는 외형이기는 하지만 얼굴을 찡그리면서까지 고집을 부리는 바보는 아니었다.


안경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번에야 말로 기필코 아프지 않은 안경을 사겠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묻는 안경사 님의 인사말에 나는 대답했다. 얼마 전에 안경을 맞췄는데 너무 아파서 다른 모델을 보러 왔다고. 그러자 고개를 갸우뚱하던 안경사는 나를 진열장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안경을 벗어보라고 했다. 저기, 피팅이 안 맞았나 봐요. 다시 봐 드릴게요.


안경을 빼앗긴 나는 시력이 흐려져 뿌옇게 보이는 세상에서 생각했다. 피팅? 셔츠 고를 때나 고민하던 용어 아닌가. 설마? 안경도 피팅이 되는구나! 사람마다 이목구비가 다르니까.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뇌 안에서 몰아쳤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복귀한 쿠보는 단정한 평안 그 자체였다. 쿠보는 불편한 안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문가의 손길을 통과한 쿠보는 내 얼굴에 들어맞았다. 왜 진즉 이 좋은 세상을 모르고 살았을까.


나는 이십 년 간 안경을 써 왔음에도 안경점에서 처음 맞춰준 그대로 썼다. 그래서 어떤 안경은 괜찮았고, 어떤 안경은 흘러내렸으며, 또 다른 녀석은 나를 공격하듯 옥죄었다. 나를 괴롭히는 안경을 두고 나는 '나쁜 안경'이라고 비난했다. 사람이 계속 쓰고 다녀야 하는 물건을 이런 식으로 만드는 법이 어디 있어.


삼십 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나는 '피팅'의 세계에 눈 떴다. 하긴 돌이켜보면 나는 참 둔하고 미련스러운 인간이었다. 군대에서도 이병에서 상병이 꺾이던 호봉까지 전투모 사이즈 58호를 고집했다. 꽉 찬 58호. 들어가기는 하지만 어딘가 위화감이 드는 사이즈. 그러다 병장 진급을 앞두고 우연히 동기의 59호 전투모를 써 보았다. 아, 모자가 이렇게 자연스러운 착용감을 주는 물건이었던가. 당장 사이즈를 1호 올렸다. 그렇게 마지막 군생활을 개운하게 장식할 수 있었다.


피팅이 된 쿠보를 쓰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허탈함과 놀라움이 뒤섞인 감정. 나는 리버티를 떠올렸다. 혹시 그 녀석도 그리 나쁜 안경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집으로 돌아가 리버티를 꺼냈다. 쿠보와 나란히 두고 비교해 보았다. 리버티의 오른쪽 템플이 왼쪽보다 더 안쪽으로 휘어져 있었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부분이었다. 당장 리버티를 들고 집 앞 안경점으로 갔다. 리버티를 구입한 곳은 아니다. 그래도 피팅은 가능하지 않을까.


예전에 렌즈를 한 번 교체한 적이 있던 까닭에 안면이 있는 안경사님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거절당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각오로 들어갔다. 걱정과 달리 흔쾌히 피팅을 맡아주시겠다고 했다. 익숙한 안경점 기계음이 몇 번 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리버티가 돌아왔다. 뭐 별 거 아니었다는 뉘앙스로.


나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리버티를 꼈다. 템플이 귀에 걸릴 때 반사적으로 눈이 찡그려졌다. 팔 년 간의 습관이었다. 어, 이상하다. 아프지가 않다. 거울 속의 나는 동그랗고 차분한 안경을 끼고 있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디자인이었다. 나는 밝고 또렷한 금속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리버티를 샀었다. 바로 그 느낌 그대로 가볍게, 리버티는 내 코와 귀에 걸려있었다. 자유롭게 그 무엇이라도 눈에 담을 수 있다는 듯이.


세상에 나쁜 안경은 없다. 무신경하고 사려 깊지 못한 주인이 있을 뿐. 리버티와 블루문 그리고 쿠보를 오래도록 고쳐 쓸 것이다. 피팅은 필수로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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