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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Apr 09. 2024

절제와 궁상의 공포

한국은 세계 3대 명품 소비국이다. 중국, 일본과 더불어 럭셔리 시장의 주요 고객이라고 한다. 체면을 중시하는 동아시아 3국이 나란히 명품 소비에 앞장선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나는 명품을 잘 모른다. 그나마 사용하는 브랜드라고 해 봐야 결혼하면서 마련한 오리스 다이버 워치. 나의 유일한 기계식 손목시계다. 건전지를 교체할 필요가 없어 편리하다. 매우 거칠게 다루어도 고장 없이 째깍째깍 시간을 알려준다. 이 시계만 10년 넘게 찼다. 시계 브랜드 중에서는 롤렉스 이상부터 명품의 반열로 인정한다고 하니 나의 오리스로는 명함을 내밀 수 없을 것이다.


왜 우리나라 사람은 명품을 좋아할까. 명품이 주는 자기 만족감도 있겠지만, 남에게 보이는 부분을 신경 쓰는 문화도 한몫하지 않을까. 나는 막연히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단서를 확보했다.


최근 아내와 함께 쓴 <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원고 마지막 교정을 마쳤다. 책은 4월 중하순에 서점에 깔리게 될 것이다. '미래의 창' 출판사에서 책 홍보를 위해 갖은 애를 다 썼다. 인맥이 좁은 우리를 대신해 '고금숙' 작가님께 추천사를 받아주었다. 또 <기후위기인간>을 쓰고 그린 '구희' 작가님께서 우리 책의 삽화를 맡아주도록 연결해 주었다. 이루 다 말씀드리기 힘든 수고로움을 담당 편집자님과 마케팅 팀에서 감당했다. 그중에는 유튜브 촬영도 있었다.


유튜브 채널 이름은 하우투. '하루를 우리에게 투자한다면'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멀리 서울까지 가야 하는 줄 알았으나 촬영 장소는 강릉 MBC 스튜디오였다. 집에서 차로 10분이면 벚꽃을 느긋이 감상하며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하우투'는 영동 MBC에서 운영하는 채널이었다. 구독자가 40만에 달하는.


촬영에 앞서 PD님이 참고하라고 보내준 영상 리스트를 확인했다. 위가 움찔 놀라고 말았다. 김승호 회장, 오은영 박사, 김민식 PD 같은 유명 인사들이 다녀간 자리였다. 가까워서 좋기는 한데, 촬영 중 어버버 거리다가 채널에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우려스러웠다. 그래도 책이 나오기까지 너무나 많은 분의 진지한 노고가 있었다. 인간 된 도리로 촬영을 백 번 하라고 해도 군말 없이 나가야 했다.


거대한 스튜디오 가운데 나와 아내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작은 세트장을 예상했다. 하지만 그곳은 객석도 있고 (이번 촬영은 관객이 없이 진행했지만) 클래식 실내악 공연쯤은 열 수 있는 무대였다. 나도 모르게 코끝을 찡긋하고 말았다. 약간은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공간. 조명이 얼마나 밝고 촘촘한지 빛줄기로 몸이 씻겨나가는 상상을 했다. 내가 스튜디오에 얼이 빠져있는 사이 촬영 준비가 끝났다. 촬영 방식은 단순했다. 앞에서 PD님이 질문을 하고 우리는 대답을 하고.


PD님은 프로였다. 우리가 긴장하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해 주셨다. 마침 같은 동네 주민이기도 해서 간단한 아이스브레이킹 후 카메라에 집중했다. 관절인형처럼 입이 열리고 말이 나갔다.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대화의 주제는 미니멀한 친환경 라이프가 어떻게 가정 경제와 지구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했다. 고탄소 과소비 생활에서 벗어나 저탄소 친환경 소비 생활을 합시다. 그러면 자연스레 지출이 줄어들어 계좌에 돈이 쌓입니다. 친환경 생활은 지구에 최대한 흔적을 덜 남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족한 듯 살지만 그래서 결국 안정을 찾게 되죠. 가계부도 그리고 지구도.


나와 아내가 번갈아 가며 열심히 이야기했다. 그런데 PD님이 반복해서 던진 질문이 있었다. 보통 질문은 한 번 하고 끝나는데 약간 방향을 틀어서 반복되는 심화 질문이 있었던 것이다. 절약이나 절제하는 모습이 좋기는 한데 궁상맞다, 왜 그렇게 사냐 이렇게 보는 분들은 안 계시던가요? 그렇게 살면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짧게 대답했다. "그러실 수도 있겠지만, 저희는 주변 분들께 항상 도움과 격려를 받으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변형 질문이 재차 들어왔다. 이때부터 살짝 당황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절제된 삶은 인생을 평안으로 이끄는 단단한 길인데 움츠러들 이유가 어디 있나. 타인이 절약하는 나의 모습을 안 좋게 볼까 봐 걱정할 필요가 있나. 내 삶을 내 방식대로 살겠다는데. 그런데 정말로 '궁상의 공포'는 대단한 것 같았다.


가끔 외부 매체에 기사나 칼럼 형태로 친환경 라이프, 소박한 절제를 주제로 글을 쓰면 악플이 달린다. 악플의 절반은 조롱이고, 절반은 비난이다. 지리리 궁상 어쩌고 저쩌고. 인생 한 번 살면서 그런 식으로 왜 사냐.


우리는 그냥 웃고 만다. 악플은 해당 독자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지표다. 그분의 감정은 그분의 것이니 내가 받지 않으면 그만이다. 힘든 건 오직 악플러 본인이다. 생면부지 남에게 악다구니를 쓸 정도로 감정이 어지럽고 들쭉날쭉하니 사는 것이 얼마나 고될까. 그래서 우리는 블로그처럼 권한이 우리에게 있을 경우에는 조용히 악플을 삭제하고, 기사일 경우에는 무응답으로 넘어간다. 그렇게 쭉 살아왔는데 이번 촬영장에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된 것이다. 흐음, 세상의 일부는 단순하고 검약하는 라이프를 '궁상'으로 보기도 하는구나.


만일 내가 구멍이 나고 천이 닳은 옷을 지저분한 상태로 입고 돌아다닌 다면 부끄러울 것이다. 그러한 의생활은 물건을 소중히 대하지 않고 관리하지 않음을 나타내니까. 하지만 나는 물건을 자주 많이 사지 않을 뿐 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세심히 보살피며 지낸다. 스파를 찾아다니지는 않지만 매일 샤워를 하며 청결히 생활한다. 의류와 침구류를 정기적으로 세탁하고 햇볕에 말린다. 로션과 선크림도 챙겨 바른다.


붉은 고기를 덩어리째 대량으로 사 먹지는 않는다. 다만 채소는 비싸더라도 유기농으로 구하고, 품질 좋은 과일을 넉넉히 즐긴다. 유제품을 매일 섭취하지는 않지만, 첨가물이 들어가 있지 않은 두유는 박스로 마련해 두고 있다. 집에 TV가 없는 대신, 그 자리에 책장과 화분을 놓았다. 식물 돌보기를 좋아해서, 율마와 뱅갈고무나무를 비롯해 꽤 다양한 초록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나는 현재의 라이프 스타일에 만족한다. 다들 나름대로 잘 살듯이.


세상에는 우리처럼 타고나기를 소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 절제하며 살아도 충분히 좋은데 그런 분들이 외부의 시선, 사회적 압박에 의해 '과시적 소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월 수입을 고려하면 소형차를 끌어야 하는데 무시당할까 봐 대형차를 사는 분, 아이가 못 사는 집 아이 취급을 당할까 봐 무리해서 백화점 명품 코트를 사 입히는 학부모님, 국내 여행도 괜찮은데 지인의 SNS 해외여행 인증 사진에 수준을 맞추려고 비행기표를 예약하는 충동구매. 우리 삶의 곳곳에는 물건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완고히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믿음은 절약과 단순함을 부족함의 증거로 몰아붙인다.


한국인의 명품 열광은 일반적인 과시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명품은 폭력적인 세계에서 나의 자아를 지켜주는 심리적 방패다. 고가의 물건을 사용해야 '좋은 인생'이라고 인정해 주는 세상에 맞서 주눅 들지 않기 위하여 방패를 드는 사례가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물건으로 사람을 존경하지 않지만, 편견과 불안이 '과소비 조장 현실'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현상만큼은 진짜다.


우리 가족 이야기를 책으로 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몹시 감사하면서도 신기했다. 지극히 평범한 사고방식을 지닌 우리가 단행본을 낼 정도로 의미 있게 살았나.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절약 궁상' 악플이 말해주는 것 같다. 이 세계는 여전히 '없어 보이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고. 그러니 아무 이야기라도 좋으니 명품 방패 없이 살아도 참으로 행복하게 하하 호호 살고 있습니다,라고 확신에 차 말해달라고.


이쯤 되면 <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출간의 일등 공신은 악플러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바란다. 악플러도, 선플러도, 조용히 읽고 지나가는 독자님도 모두 부디 지금 계신 곳에서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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