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르소나 Sep 10. 2024

#31. 퍼스트 러브

3% 확률에 도전하다.

대학교 MT는 나에게 두 가지 처음 경험을 알려 준 중요한 모임이었다. 첫 번째는 고스톱을 배운 것이었고(#13. 도박, 참고), 두 번째는 첫사랑을 만난 것이었다. 인생에서 처음 경험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기에 낯설고 서툴기 마련이다. 나에게 사랑도 그랬다. 운동과 공부가 전부라고만 생각했던 나에게 갑자기 찾아온 사랑은 나를 "사랑에 빠져서"(fall in love)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게 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나에게 처음 사랑 이야기는 "이런 인생도 있습니다."의 축소판으로 도전과 실패의 또 다른 스토리이다. 이제야 20년 전에 나에게 다짐한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책꽂이 한구석에 먼지가 덮여있는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이었다. 책의 첫 페이지에는 교보문고에서 OO가 나에게 쓴 짧은 글귀가 적혀있었다.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데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때의 아련한 감정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와 나를 흥분시켰다. 마지막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도중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대학교 엠티(membership training)의 두 번째 날, 넋을 잃고 한참을 쳐다봤던 OO의 앞에 나였다.   


맑고 투명한 눈동자는 뜨거운 태양이 지중해의 푸른 물결에 비친 것처럼 빛났다. 입술은 잘 익은 앵두를 한입 베어 먹은 것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차분하면서도 정갈하게 빚은 머릿결은 고운 비단처럼 우아하면서도 부드러웠다. OO가 말할 때마다, 목소리는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듯 아름답게 들렸다. 나는 할 말을 잊은 채 넋을 잃고 OO를 쳐다봤다.    


사랑은 나에게 이렇게 예고하지 않고 찾아왔다. MT 이후 나는 기숙사에서 같이 지냈던 네 명의 동기 형들 그리고 OO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수업도 같이 듣고, 식사도 함께하면서 친해졌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볼링과 노래방도 같이 다니면서 시간을 함께 즐겼다. 여자에게만 날카로운 촉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나는 네 명의 형들 모두 OO를 좋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처럼 그들도 항상 OO 옆에 앉으려 했고, 서로 말을 시키면서 OO의 관심을 끌려고 했기 때문이다. 수컷 공작새가 형형 색깔의 깃털을 자기 몸 보다 크게 펼쳐서 암컷에게 구애하는 것처럼, 우리는 OO의 관심을 얻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정작 OO는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한 겨울이었던 것 같다. 늦잠을 자고 있는데 인터폰으로 전화가 왔다. OO가 나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나는 정신없이 옷을 챙겨 입고 1층으로 내려왔다. OO는 나에게 줄 것이 있다면서 상자 하나를 건넸다. 그 상자에는 로션과 스킨이 있었다. 나는 OO에게 왜 이 선물을 주느냐고 물었다.


"저번에 우리가 밥 먹고 헤어질 때 네 손을 봤는데 많이 텄더라. 그래서 생각나서 하나 샀어. 날씨가 추워. 손 관리 잘해."


순간 나는 할 말을 잊었다. 내 앞에서 말하고 있는 OO가 사람이 아닌 천사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얼굴도 이쁜데 마음마저 이쁜, 천사 중에서도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천사라고 생각했다.  


"나도 신경 쓰지 못한 손을 OO는 어떻게 봤을까? 왜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내 손등을 봤을까? OO도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분명해."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OO가 평소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OO가 하는 몸짓은 나를 위한 사랑의 언어로 보였고, OO가 웃는 모습은 남들 모르게 나에게 미소 짓는 것처럼 느꼈다. 사랑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것도 처음 사랑은 그 증상이 더 심하다. 나는 고스톱 사건 이후 처음 사랑의 후유증으로 하루 대부분을 OO를 생각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때는 핸드폰이 없던 때라 전화도 마음대로 할 수도 없었지만, 나는 틈만 나면 OO에게 전화해서 지금 무엇을 하는지, 학교에는 몇 시에 오는지, 밥은 먹었는지 등의 재미없는 주제를 주저리 늘어놓으면서 최대한 OO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려고 했다. OO는 단 1%의 관심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연애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내가 앞으로 사귈 사람은 곧 나의 배우자가 될 것이라는 환상이다. 나는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연애 경험의 횟수를 두 손가락으로 셈할 수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와 같은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사랑과 짝사랑은 내가 OO에게 더 집착하게 했다. OO의 사랑을 얻는 것은 내 운명을 완성하는 것이고, OO의 고백을 받는 것은 내 사랑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대학교를 일 년 빨리 입학한 나는 사랑을 하기에는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다. 진짜 남자가 되면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나는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해군에 지원했고, 빨리 제대해서 OO에게 정식으로 청혼하고 싶었다. (그때는 사귀면 결혼한다고 생각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2월 나는 OO와 친한 동기 형과 함께 진해 해군 훈련소로 향했다. 훈련소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OO는 내내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OO가 나를 좋아했기 때문에 훈련소까지 동행했다고 생각했다. 군대를 제대한 후 OO가 나를 역시 좋아했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 감정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정말 좋아하는 동생을 아끼는 마음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OO가 생각하는 감정을 이성적인 감정으로 바꾸어 보려고 수없이 노력했다. 그럴 때마다 OO는 말했다.


"너는 정말 내가 아끼는 동생이야. 만약 누가 아빠와 엄마를 빼고 가장 좋아하는지 사람을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     )이야 라고, 대답할 거야."


입대 전에도 그리고 군 생활 중에도 나는 OO에게 프러포즈할 수 없었다. 어떻게 고백할지도 몰랐고, OO가 나를 정말 사랑한다는 확신도 없었다. 나는 OO가 "나를 사랑하지만, 동생으로 정말 사랑하는," 이라는 제한적 사랑 앞에서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사랑하는 동생에서 동생의 타이틀을 빼고 그 자리에 사랑하는 (      )로 나의 자리가 생기기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OO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제대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시점에서 사랑 고백을 위한 준비와 다짐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돼버렸다.


나는 2학년으로 복학을 했고, OO는 졸업했다.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나는 가끔 OO와 통화를 했고, 서점도 같이 갔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진짜 사랑하는 동생이고, OO에게는 진짜 남자 친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친하지만, 예전처럼 친하지 않은 상황이 지속되던 어느 날 나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되었다. OO가 남자친구 때문에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고, 아픔을 잊기 위해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는 내용이었다. 정말 사랑하는 동생에게 단 한마디 말도 없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는 사실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OO가 떠난 후 나는 허무함과 허탈감에 사로잡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미국 유학을 위한 준비에도 힘을 낼 수가 없었다. 삶의 목적과 방향성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나는 모든 것이 싫었고, 모든 사람이 미웠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OO가 프랑스로 떠나기 전에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용기 없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에 내심 기대도 해봤지만, OO를 향한 내 사랑은 한순간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나는 시간이 나는 대로 OO에게 메일을 보냈고, 가끔 OO가 답장을 보내오는 날이면, 나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한 통의 메일이 왔다.


"나 12월 10일에 한국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