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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May 14. 2022

chapter 2. 편지를 보내요

두 번째 편지 ㅡ 사춘기 딸

휴대폰 알림음이 울려요. 

“00 스터디 카페, 5월 14일, 6천 원”

딸이 무사히 스터디 카페에 도착했다는 알림이예요.

점심으로 먹고 싶다는 사케동을 두둑이 먹이고, 스타벅스에서 민트 콜드 브루도 한 잔 사서 딸애 손에 들려 올려 보냈어요. 오늘의 저희 모녀는 지금, 오후 두 시까지는 맑음입니다. 저녁엔 또 어떻게 변해있을지 모르겠지만요.


딸은 중2입니다.

북한군도 무서워서 못 쳐들어온다는 그 중2병이 우리 딸에게도 온 걸까요?

딸은 해 쨍쨍과 토네이도급 태풍 사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갈팡질팡 해요. 집안의 분위기가 제일 쪼꼬만 이 녀석 때문에 좌지우지됩니다. 제가 사춘기 땐 오락가락하는 딸 기분에 집안 분위기가 좌지우지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말이죠. 저는 자식 교육을 잘못하는 걸까요?  ‘그놈의 공부가 뭐라고, 공부하는 게 뭐 유세라고, 지 공부 지가 하는데!’라고 생각하지만 차마 그 말을 입에 내뱉지는 못해요. 딸 앞에서는 더더욱 말이에요.   

  

지난 월요일엔 저녁 내내 딸이 대성통곡을 했어요.

네, 딸은 중2입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그날 있을 수행 평가 마무리 준비를 하고, 학교 끝나고 와서 독서 수업을 하고, 잠깐 저녁을 먹고 십 분만 자겠다고 했어요. 십 분만 있다가 깨워달라고. 너무 푹 잠들어서 일어나지 못할까 봐 딸은 침대에 눕지도 못하고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서 좋아하는 강아지 인형에 얼굴을 푹 파묻고 잠들었어요. 지난 주말 연휴 내내 1박 2일의 여행을 다녀와서 하루도 못 쉬고 밀린 공부를 하고, 새벽같이 일어나 학교에 다녀온 딸에게 월요일 저녁 낮잠 10분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어요. 저는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딸을 깨우고, 못 일어나는 게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삼십 분이든 한 시간이든 더 잤으면 하는 마음에, 아예 그냥 쭉 자고 개운하게 내일 학교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계속 십 분만 더를 중얼거리며 딸은 두 시간을 내리 잤습니다. 푹 자고 일어났더니 열 시였어요. 푹 자고 개운하게 일어났으니 잘됐다 생각했는데, 웬걸요, 딸은 일어나자마자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 낮잠 자고 일어나 잠투정할 때만큼이나 우렁찬 목소리로 꺼이꺼이 울어 젖혔어요. 잠깐 그러다 말겠지 했지만 중2면 울음 끝도 길어지는 건가요? 딸은 정확히 46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울었어요. 눈 뜨자마자 우는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만했어요, 생각보다 너무 많이 잤고, 할 일은 산더미고, 하자니 너무 피곤하고 하기 싫고, 안 하자니 그럴 위인이 못되는지라 울고불고, 또 울고 했습니다.


저는... 그냥 있었어요.

컸다고 이제 달래는 것도 싫어하고, 위로 할 말도 빈약하고, 대신해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만 좀 울라고 큰소리를 낼 수도 없으니 그냥 있어야죠, 뭐.

저번엔 이렇게 힘들면 그냥 조금 안 해도 된다, 못해도 된다고 했다가 괜히 불똥이 저한테 튀어 갖은 신경질은 다 내고 끝났거든요. 힘들면 하지 말란 말도 섣불리 하지 못해요.

지도 답답한지, “학교도 안 가고 싶어, 학원도 다 그만두고 막 살고 싶어!” 하며 울어요. 반은 진심이고, 반은 아니란 걸 저도 알아요. 하지만 오늘은 그만큼 힘들고, 다 그만두고 싶다는 뜻이라는 걸요.

딱히 할 말이 없는 저는 정말 힘들면 다른 방법도 많이 있다고 얘기해요. 하지만 그 방법이 뭔지는 딸애도 저도 모릅니다. 공부가 너무 힘들면, 그래서 니가 죽을 거 같으면 니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해도 된다고, 어차피 인생 길다고,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또 무슨 방법이 분명히 생길 거라고... 저는 이런 별로 도움도 안 되는 얘기를 해요. 하지만 열네 살이 보는 세상에선 그저 공부가 전부인 거죠. 인정받을 길이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 열네 살은 조바심과 불안함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누구보다 자기를 통제하며 관리해요. 그걸 지켜보는 저는 내심 대견하다가도, 이게 정말 이럴 일인가 싶어서 한숨이 나와요.  


이거, 대치동 얘기냐구요?

그럴 리가요.

그럼, 목동이나 중계쯤 되는 학군지 얘기냐고요?

아니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그냥 서울 변두리와 경기도 초입에 걸쳐진, 학군 같은 말도 어색하기만 한 작은 동네 얘기예요.

그럼, 애가 상위 몇%라 공부를 되게 열심히 하고 그런 얘기냐구요?

아니요, 그 또한 그렇지 않아요. 그냥 평범하게 학교 다니는 학생 얘기예요. 그저 평범한 학생이 되기 위해 아이는 엄청 애를 쓰고 있어요. 저는 돼지엄마처럼 아이 손잡고 앞장서서 끌고 나가지도 못하고, 이건 아니다! 며 레인 밖으로 아이를 꺼내 주지도 못한채 어정쩡하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어요. ‘어차피 그건 니 인생이다!’고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쿨하게 애를 바라보기도 아직 내공이 부족합니다. 잘하는 애를 응원하는 것도, 못하는 애를 받아주는 것도 부모 몫인데, 잘하면 너무 힘들까, 못하면 실망할까 봐 전전긍긍해요. 우산장수 아들을 둔 엄마처럼 말이죠.     


그렇다면, 이건 아이 문제가 아니라 제 문제일지도 몰라요. 

일주일에 두 세 개씩 빽빽한 수행 평가도, 실수로 틀린 한 두 문제도, 체력 관리 못해서 피곤한 애 컨디션도 어차피 전부 제 탓은 아닐 텐데요. 저는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길래 아무도 내 탓이라고 하지 않는 일도 전부 내 탓인 것처럼 생각이 돼서 중2 딸애의 감정 널뛰기에 저까지 덩달아 난리인 걸까요? 감정은 요동치고, 저도 똑같이 퍼붓고 싶을 때도 많아요. “그러게 일찍 자랬지. 미리미리 했으면 되는 거잖아.”같은 말을 하고 후련해지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런 말은 꾸역꾸역 삼켜둬요. 달콤한 위로는 어떠냐고요? 그것도 늘 통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조용히 방문을 닫아 두고, ‘어차피 내 일 아님!’이라고 중얼거립니다.


네네~ 이건 내 일이 아니에요. 이건 쟤 일이에요.  

웬 무책임이냐구요? 그러게요, 저는 언제부터 “이건 내 탓 아님” 을 외치는 엄마가 된 거죠?

하지만 아이는 엄마가 내 일처럼 나서는 것도, 그렇다고 완전히 모른척 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 매우 예민한 시기인 걸요.

14년 동안 꽁꽁 잡은 우리의 두 손을 놓기 위해 딸애의 기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요동을 치나봐요. 폭풍과 비바람이 , 별안간 난데없는 뜨거운 태양이 하루에도 몇 번을 들고 나며 우리의 앞을 비춰줍니다. 영영 안 볼 사이처럼 멀어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서로가 전부인 관계가 되고 싶지도 않아요. 우리는 나란히 걷는 방법을 배우는 중인가봐요.   

사춘기의 터널을 진입하며 생각해봐요, 이 터널의 끝은 어디쯤일지.     


2022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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