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te to the Apron 04
주방에서 일 한지도 10개월에 접어들었다. 초반 6개월은 그야말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주방을 책임지던 총괄 셰프는 여러 구설수에 오르면서 결국 퇴사하고, 바통을 이어받은 수셰프는 관리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다 퇴사했다. 모든 게 불만으로 가득했던 나보다 7살 어린 경력직은 엉뚱하게 나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다른 지점으로 쫓겨났다. 그동안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그 와중에도 주방의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고 솔루션을 제시하며 입사 6개월 만에 연봉을 20% 올리기도 했다.
월급 20%, 어떻게 올렸을까?
중고...ㅇ ㅏ니 거의 고물상에 들어갔다 온 신입이기에 가만히 시키는 일만 하기엔 너무 부족한 게 눈에 거슬렸다.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 고민했다. 생산성 소프트웨어인 노션으로 주방 업무를 한 데 모아둔 플랫폼을 구축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셰프님께 제안해 만들어보겠노라 선언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앞서 접근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첫째로 일반 사무직과는 달리 주방에서는 책임자가 아니고서야 컴퓨터로 업무를 볼 일이 별로 없었다. 식자재 발주 업무도 대부분 폰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방 업무에 도움이 될 플랫폼을 만들려면 최대한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둘째, 주방은 생산성 소프트웨어 트렌드에 둔감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동료들에게 노션에 대해 아냐고 물었더니 대부분 처음 듣거나 어디선가 들어는 봤다는 정도였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서 한번에 들이밀면 거부감이 들기 마련이다. 학습하고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라 단계별로 천천히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전략(?)이다. 가장 먼저 손댄 것은 레시피 북! 신입 직원 교육을 위해, 복잡한 레시피의 계량을 위해 레시피 북은 자주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세 개의 지점을 운영하고 있는 만큼 언제, 누가 시키든 동일한 음식의 퀄리티를 위해 레시피 북은 중심을 잡아 줄 주방의 표준이기도 하다.
레시피 북 어떻게 구성했을까?
테이블에 각 메뉴의 레시피와 프렙을 함께 리스트업 했다. 여기서 프렙은 요리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식재료 전처리 작업하거나 소스류 등을 미리 만들어 두는 것을 말한다. 카테고리는 메뉴명, 파트, 관련 프렙리스트, 그리고 관련 재료로 구성했으며, 프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프렙명, 관련 레시피, 관련 재료로 구성했다. 레시피와 프렙을 한 테이블에 모아뒀지만 서로 구분해서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각 아이템을 클릭해 들어가면 상세 레시피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발주 업무도 노션으로!
발주는 매일 하는데, 매출이 높다 보니 발주량도 많은 데다 주방 구조상 길게 되어 있어 왔다 갔다 할 일이 많다. 기존에는 화이트보드에 발주 식자재를 적어둔 뒤 카톡으로 발주 업체에 전달해 주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발주해야 할 식자재를 빼먹는 일이 간혹 발생하기도 했다. 발주 체크를 다 한 뒤에도 항상 뭔가 빼먹은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 들곤 했다.
기존에 구축해 둔 프렙과 식자재 리스트를 활용하면 누가 발주를 보더라도 발주 시간을 단축시키면서도 발주 누락을 없앨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주 넣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먼저 다음 날 해야 할 프렙을 먼저 확인한 후 이에 필요한 식자재를 먼저 체크하고 이후 그 외 필요한 품목을 확인하는 식이다. 확인이 끝난 발주 리스트는 또 텍스트로 옮겨 적을 필요 없이 스크린샷을 찍어 그대로 공유하면 끝이다.
동료들의 반응은?
지금이야 완전히 정착해 사용하고 있지만 초반에는 동료들에게 사용하도록 설득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다들 어느 정도 레시피를 알고 있기도 했고 그냥 종이 레시피 북을 보는 게 편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래서 다른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들어가는 재료가 많은 소스류 같은 것은 만들 때마다 계산기를 두드려 종이에 적어둔 뒤 계량을 했는데, 이게 불편해 액셀로 계산기를 만들어 노션에다 공유했다. 이후에는 계속 동료들에게 틈만 나면 집착하듯 사용하기를 홍보하며 사실상 반강요를 하기도 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동료들이 하나둘 노션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꽤 뿌듯했다. 특히 규모가 커지는 만큼 새로운 직원들로 채워질수록 이 플랫폼은 교육 및 온보딩 효과를 발휘했다.
몰랐던 사실인데, 누군가의 문제 해결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고 사람들이 이를 사용해 주는 일을 내가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꽤 뿌듯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