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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네오 Oct 15. 2020

꼬마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행복의 방향을 찾아가고 있는 지금


초등학생 때 발행했던 '학급 문고' 2권을 발견했다.


오랜만에 만난 민주는 12년 전 문고에 적었던 그대로 간호사가 됐다.

궁금해졌다. 12년 전의 난 무슨 말을 써놨을까?

그때와 난 얼마나 달라졌을까?



<12년 전 민주와의 추억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 1편 -

- 2편 -



가장 보고 싶었던 주제는 '나의 장래희망'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을 <동시>로 적게끔 했다. 당시 어린이들에게 '하고 싶은 일=직업'이었으므로 아이들 모두 특정 직업을 주제로 시를 썼다.


문고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대학 교수가 되겠다는 동시(?)아닌 짧은 글.


놀랐다. 내 꿈이 대학 교수였다니. 나처럼 교수가 되고 싶다고 적은 애들은 한 명도 없었지만 어딘가 진부하다.(교수라는 직업이 진부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아이에게서 나올 법 한 천진난만함이나 무모함은 어딜 갔단 말인가. 교수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고 쓴 건지 과거의 나에게 묻고 싶을 정도다.


무엇이 저 직업을 선택하게 만들었을까 잠시 고민해보니 답이 나왔다. 그것도 명쾌하게.

바로 외삼촌의 직업이었던 것이다.

이 패턴은 중고등학교에 가서도 바뀌지 않는다. 더 이상 진로 희망에 교수를 써넣지는 않았지만, 대신 막내 삼촌의 직업인 회계사를 주야장천 써 놓았다. 특별히 관심 있는 직업이 없기도 했고, 외삼촌들의 잘 사는 모습이 교수와 회계사에 관한 좋은 이미지 형성에 영향을 미쳤던 게 아닐까. 그렇게 난 삼촌들의 직업을 빌려 써먹으며 진로 탐색에 소홀했다. 그저 눈 앞에 닥친 것만 열심히 하다 보면 알아서 길은 보이겠거니 믿었다.(매거진 '가만히 놔두면 잘될 줄 알았다'가 탄생한 배경이다.)


좀 더 창의적이면서 발랄하고 개성 있는 직업 선택을 기대했던 터라 약간 실망했다. 그에 비해 민주는 무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장래희망을 쭉 가져와 실천했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뭘 좋아하고,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민주를 부러워하다 끝날 줄 알았으나..


내게도 학습되지 않은 꿈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희망의 불씨를 발견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간 나의 10년 뒤 미래는?

*10년 뒤를 예상한 나의 예언이 얼마나 맞았는지 체크해봤다.(이뤄졌거나 현재 진행 중이면 그대로, 이뤄지지 않았거나 잘못된 정보는 취소선을 그었다.)

고려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나는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누나는 지금 선생님이 되었고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있다.

사람들은 각 가정마다 다기능 차를 한 대 씩 가지고 있는데 물론 우리 집에도 한 대가 있다.

하늘과 땅, 바다를 마음껏 다닐 수 있는 다기능 차는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것 때문에 요즘 환경문제가 아주 심각하다.

정부에서는 아직까지 믿을만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데 나는 작가가 되어 이런 환경문제를 쓸 생각이다.

하루빨리 이런 공기를 벗어나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


<첨삭>

특정 대학교를 언급한 건 아빠의 영향이다. 아까의 대학 교수는 어디 가고 이번에는 작가를 써놓았다. 그래서 아주 마음에 든다. 학습되지 않은 솔직함이 보인다. 누나의 미래를 정확히 맞췄다. 이유는 다르지만 환경 문제는 심각해졌다. 특히 깨끗한 공기를 언급한 점은 훌륭한 예측이었다.




작가의 꿈을 밝힌 점은 내가 문고에서 찾아낸 최고의 소득이다. 그 밖에도 20년 뒤 동창회를 예상한 한 친구의 글이 가관이었는데 '네오는 민주와 결혼하여 오래 잘 살아가고 있다.'는 낯 뜨거운 문장을 써서 날 당황시켰다. 아마 나와 민주가 서로 좋아한다는 걸 눈치채고 쓰지 않았을까. 오랜만에 펼쳐본 학급 문고는 마치 타임캡슐 같았다. 그때와 난 분명 달라졌지만 크게 바뀌지도 않았다.


다시 민주와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우린 12년 만에 만난 지난번 만남 이후 두세 번을 더 봤다. 준비하던 에세이 공모전 마감을 앞두고 민주의 조언을 받기도 했다.(브런치 세 번째 발행 글인 '불규칙 바운드'가 그 결과물이다.) 트렌드였던 자기 계발 에세이를 나보다 더 많이 읽어봤기 때문인지 임팩트 있는 문장이 부족함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 부분을 수정해 공모전 '은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교내에서 열었던 작은 대회였지만 에세이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점, 상장과 소정의 상금을 받았다는 점이 감격스러웠다. 상금턱은 민주와 만날 빌미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민주를 만나면 꼭 하고 싶었던 게 있었다. 바로 선물하기.

서로 다른 반이 됐었던 6학년 때 생일 선물을 받기만 하고 챙겨주지 못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그리고 그걸 12년이 지나서야 줬다. 어떤 선물을 주면 좋아할까를 고민하다 책을 골랐다. 공통의 관심사이기도 했고, 딱 와 닿았던 책이 있었다. 「연금술사」 앞으로의 꿈과 방향을 설정하는데 큰 용기를 심어준 책이다. 민주는 책 선물은 처음이라며 좋아했고, 나도 묵혀뒀던 마음의 빚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것 같아 기뻤다.


시간이 맞았던 어느 주말 오후, 민주와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관보다 집에서 영화보기를 좋아하는 나지만, 함께 볼 사람이 있다면 장소가 무슨 상관일까. 마침 좋아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한 영화가 있어서 약속을 잡았다. 3D 전용관이라 의자가 조금 불편했지만 영화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연인이 아닌 이성친구 사이에 보기에는 썩 추천할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왜 하필이면 '완벽한 타인'이었을까.

영화가 끝나고 집 근처 빵집에 들렀다. 민주가 추천해 준 곳이었다. 딱히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그냥 헤어지기엔 뭔가 아쉬웠다. 그 날이 마지막이라서?


민주와의 연락이 점점 뜸해지다 결국 끊겼다. 서로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나 악감정이 생긴 건 아니었다.(이 부분은 민주의 입장도 들어봐야 정확하겠지만)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고 즐거웠지만 동시에 느꼈던 불편함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존재에 관한 경계심에서 시작해 작게는 연락 빈도의 불일치까지. 그동안 벌어져 있던 틈을 단번에 메우는 건 쉽지 않았다. 1, 2년도 아닌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가 맺었던 관계와 겪었던 경험은 분명 달랐고 큰 차이를 만들었다. 민주는 장래희망을 이뤘고 난 장래희망을 잃었다. 민주는 그 시절의 나를 좋아했지만, 나는 그 시절의 내가 자랑스럽지 않았다.


장래희망을 이뤘다고 했지만 민주는 직장에서 태움*을 당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마땅한 공감을 해주지 못했다. 태움이라는 단어의 심각성을 잘 몰랐고, 직장 생활 경험도 부족했다. '아직도 그런 일이 있구나. 힘들겠다.'라고 말해주는 게 전부였다.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일을 하는데 선배에게 괴롭힘까지 당해야 하는 민주의 심정을 난 절반이라도 이해했을까. 꿈을 찾았지만 원하던 꿈에 감춰진 이면을 알게 됐을 때 민주는 얼마나 허탈했을까. 꿈을 잃어버린 자는 상상할 수 없었다. 몇 개월 뒤 민주는 직장을 그만두고 남미로 떠났다.


*태움: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으로, 선배 간호사가 신임 간호사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저지르는 정신적·육체적 괴롭힘을 말한다.


스물셋에 결혼한다던 꼬마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졸업하면 알아서 잘 되겠지라고 믿었던 꼬마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솔직한 꿈을 향해 손을 뻗는다. 내게 소중한 추억을 남겨준 다른 꼬마는 이미 새로운 꿈을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땐 우린 그때보다 서로를 더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다. 스물여섯의 나와 너를 한 번이라도 만나봤으니까.




p.s 2부작으로 계획했던 '스물셋에 결혼한다던 꼬마 이야기'를 세 번에 걸쳐 마무리합니다. 풋풋하고 사랑스러운 연애담을 기대하셨던 분들을 속인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이 글은 연애담이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스포가 될 것 같아 꾹 참았습니다. 라이킷을 눌러주시고 소중한 댓글을 남겨주신 작가님들 고맙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어제 발행이 목표였으나 게으름을 피우다 하루 늦어졌습니다.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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