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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만 Jan 07. 2024

나는 왜 딱딱하고 건조하게 말했을까?

부대찌개 끓여놓은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출근 준비하느라 분주한 아침. 간단히 먹을 아침을 준비하고 나서, 저녁때 먹을 부대찌개까지 끓였다. 간을 보고 불을 끈 후 남편에게 말했다. 


"부대찌개 해놨어. 있다 저녁때 먹어"


내 말투는 부드럽지 않았다. 모래알처럼 까끌거리고 건조했다. 왜지? 말을 꺼내놓고 나서 남편이 대답을 했는지 안 했는지 귀에 안 들어왔다. 왜 나는 부대찌개를 끓여놨다는 이 별거 아닌 사실을, 잔뜩 힘을 주고 건조하게 말했을까? 안 돌아볼 수가 없었다. 다정하게 말해도 됐을 텐데. (올해 목표가 '다정한 사람 되기'라서 그렇지 않은 부분들을 일상에서 하나씩 찾아내 돌아보고 빼기하는 중이라..)


바쁜 아침에 부대찌개까지 끓여둘 정도로 내 할 일 했다는 당당함 두 스푼, 당신은 매번 배달이나 시켜 먹으려고 하고 음식을 해볼 생각도 안 하는 게으른 사람이지만 난 그런 당신과 다르다는 잘난 체 1스푼. 퇴근하고 집에 오면 남편은 아무것도 하기 싫을 만큼 피곤해한다는 것을 아니까 내가 대신해줬다는 동정심 1.5스푼. 이 3가지 때문에 그 짧은 내 말은 무겁고 딱딱하고 건조해진 거였다. 


그 말속에 담긴 감정들이 무엇인지는 알았지만 그래도 찜찜했다. 남편에게 부대찌개를 끓였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은 나를 지키는 방패 같았기 때문이다. 왜 내 말은, 이런 감정들이 뭉쳐진 방패처럼 느껴졌을까? 옷장을 열고 옷을 꺼내면서 옷을 보는 건지 내 생각을 고르는 건지 모를 사람처럼 손동작이 느렸다. 


 '방금 전 부대찌개를 끓여놨다는 내 말은 왜! 나를 지키는 방패 같았을까?' 


옷을 꺼내놓고 의자에 털썩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깊게 돌아봤다. 이 순간을 바로 돌아보지 않으면 출근해서 일하느라 정신없이 또 넘어가게 될 게 뻔했다.


오늘은 늦게 퇴근한다. 늦는 것에 대한 죄의식을 덜기 위해서였다. 왜 죄의식을? 내가 늦는다고 남편도 뭐라 하지 않고, 애들도 하루종일 나만 기다리는 유아가 아니다. 청소년들이다. 퇴근하고 책을 읽어줘야 할 것도 아닌데, 왜일까. 


밤늦게 집에 들어가는 것. 그 자체에 대한 자책감과 두려움이 있었다. 그게 잘못은 아닌데 무엇 때문일까? 내가 뭘 잘못했다고? 회사에서 일이 있어서 늦는 건데? 그게 왜 자책감을 가질 일일까? 왜 나는 늦으면 안 되지? 이상했다. 살아온 삶의 기억되어 있는 생각들을 또다시 떠올려 더 깊게 돌아봤다. 


여러 번 봤던 영화를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듯이 살아온 삶을 다시 봤다. 처음 기억나는 것부터 20대까지의 기억된 생각. 20대 초반까지 부모에게 들었던 말. 그 영향이 남아 있었다.


"여자가 집에 일찍 일찍 들어와야지! 어딜, 밤 10시가 넘도록 안 들어와!"


부모의 이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내 세포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나름의 이유를 변명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더 혼나니까 아무 말 못 하고 고개 숙이고 잘못했다는 말만 했다. 다른 친구들은 다들 늦게 들어가도 괜찮은데 왜 나만 일찍 가야 하는지 모르겠단 억울함도 있었다. 남동생은 늦어도 별말 안 하는 데다가 '남자는 늦을 수도 있다'는 납득할 수 없는 말 때문에 그 당시의 내가 여자인 것도 싫었다


그런 부모를 원망했었다.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그때의 어린 내 입장에서 납득이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부모의 순수한 자식 걱정을, 나는 왜곡시켜서 받아들였다. 원망과 억울함, 변명조차 할 수 없어서 갑갑했던 순간 때문에. 꼴랑 그런 감정 때문에. 그때는 그 감정이 온통 내 인생을 휘감을 정도로 컸지만, 벌써 30년이 넘은 지금, 다시 돌아보니 참 시답잖은 거였다. 


부모는 나를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죄를 짓고 온 사람'으로 대한다는 생각. 그 생각을 내가 만들어서.. 가지고 있었다. 차고 날카로운 고드름 같은 생각이었다. 부모가 나를 그렇게 대했듯이, 아니 대한다고 여기고 '나도 나를 죄인 취급'하며 닦달하며 살게 됐다. 


사회 생활하면서도, 시댁에서도 동네 마트에서도 어딜 가도, 뭘 해도 '죄송한데요~ , 죄송하지만 이것 좀,  어머니 죄송한데요 제가.. ' 딱히 미안해할 일이 아닌데도 습관처럼 '죄송'을 먼저 꺼냈던 결정적인 이유였다. 


'부모가 정한 시간보다 늦으면 잘못을 넘어 죄인이 된다'. 이 생각은 내 삶에 너무 깊이 꽂혀있던 가시였다.

이 가시로 나도 찌르고 남도 찔렀다. 지각하는 사람을 보며 한심해했고 항상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하는 나는, 언제나 늦는 너네들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착각도 내 삶 구석구석에 찐득한 곰팡이처럼 피어있었다.


겨우 20~30분 늦은 일로 부모에게 나는 죄인까지 됐으니, 그보다 더한 실수나 잘못한 일을 말했다가는 아예 호적에서 파내고 버려질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까지 만들어냈다. 그 생각으로 실패나 실수하는 나를 나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했고 더 모질게 대했다. 내가 나를! 


부모의 걱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20살짜리 내 입장에서 만든 자기중심적인 '그 생각'하나가 정말 많은 종류의 감정을 만들어냈다. 그 감정은 28년이 넘도록 내 몸에 배어 습관이 됐고, 그 습관대로 오늘 아침에 난, 다정하지 못했다. 아니 이제서 캐치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내가 왜 남편에게 부대찌개 끓였놓았다는 말을 그토록 딱딱하고 건조하게 말했는지 뿌리까지 찾았다.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말하지 못하게 방해했던, 그 가시 같은 생각과 습관이 반복되지 않도록 진짜 다 빼기하고 싶다. 최소한 올해 마지막 날엔, '자기야 나 저녁 때 늦어. 부대찌개를 끓여놨어~애들이랑 맛있게 머겅' 다정하게 말할 수 있도록! 





사진 출처:photo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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