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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딸랜드 Nov 17. 2019

그리움이 깊어진 이유가 촉각을 느낄 수 없어서라니

세상에 무슨 기러기 아빠도 아닌 기러기 엄마 같은 삶이란 말이냐.


1990년대에 우리나라에 등장한 이 단어는 그저 나와 무관한 신조어였을 뿐이다.

엄밀하게 기러기 엄마는 아니지만 유사한 기러기 엄마의 삶을 살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가족과 한시적으로 지내다가 다 같이 한국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라 가족들과 생이별하며 지낸다. 이미 마음의 각오를 하고 시작한 생활이라지만, 어찌 이것이 단단히 마음을 다지고 악착같이 살겠다고 다짐한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상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생활이던가! 대안이 없어서 떠밀려서 손 내민 선택이고, 최악을 막기 위한 차악의 선택임을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결정한 것일 뿐이다. 오로지 명분은 최악을 면하기 위함이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쉽지 않은 나날들이었다.


시차 때문에 날마다 새벽에 아이들과 통화를 한다. 그때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어가는 시간이라 잘 자라고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다. 고정적인 대화의 시간이다. 


함께 사는 시부모님께서 종종 그런 말씀을 하신다. 


화상통화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시부모님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태어나신 분들이다. 그분들은 현대사의 어려움을 몸소 겪으시며 감내하시고 살아오신 분들이다. 뼈아픈 현대사가 개인사보다 더 크게 적용된  인생살이를 고이 짊어지고 사신 분들이시다.  현대사 측면에서 보면 지금은 시부모님의 시대보다 다방면에서 많이 발전된 살기 좋은 세상이다. 

스카이프, 페이스타임, 페이스톡이라는 용어보다 그분들에게는 화상통화가 입에 착 붙는 표현이다.


그런 줄 알았다. 아니 그러하기를 바랐다. 

얼굴 보고 통화하고 애들 목소리라도 듣고 지내면 잘 살 줄로 기대했다. 

내 마음과 감정을 더 들여다보면 인내와 고통의 역치를 넘어설 것 같아서 적정선에서 적당히 기대하고 바라면서 무뎠으면 하는 심장을 가지고 하루살이를 이어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한국 상황에서 보면 큰 딸은 중3, 둘째 딸은 중1, 셋째 딸은 초5, 막내딸은 초2학년.

작은 아씨들 집안이다. 그중에서 가장 아들 같고 당찬 둘째는 작은 아씨들 둘째 조와 닮은 구석이 있다.


요새 울 아이들은 언니들 셋이 똘똘 뭉쳐서 막내에게 잔소리를 한다. 엄마도 잘 안 하는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언니들 눈에 막내는 한없이 부족하고 실수 많은 골칫덩어리인가 보다. 

언니들도 나름 명분이 있고 이유가 있어서 잔소리를 하겠지만 기댈 언덕 없이 언니들의 폭풍 잔소리를 감당해야 하는 막내딸은 그저 우는 것으로 저항을 할 뿐이다.

페이스타임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눈물을 닦아 주고 싶은데,

껴안아 주고 싶은데,


얼굴 본다고 다가 아니었다.

목소리 듣는다고 다가 아니었다.


공간을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직접 어루만지고 안아주지 못하는 절대 한계에 서있었다. 


부모님을 포함해서 너무나도 사랑한 사람들과의 사별을 경험한 이들이 그 사람들과의 추억을 간직하는 것이 있다. 사진과 녹음된 육성과 촬영한 동영상 자료와 손때가 묻은 물건 등등.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과 숨결을 느끼고 몸을 만질 수 있는 촉각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 그리움을 증폭시키는 결정요인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방학 때마다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그곳에 가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거침없이 와락 아이들 안아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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