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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an Son Mar 24. 2024

상호인정의 순서: 젊을 때 경험해 봐야 해요

어른용 성장

전제: 건강한 자아를 위한 자기비판?


중요한 것을 얻으려 한다면, 자기만족은 끔찍한 함정이다.
Amancio Ortega ZARA 창립자



상황: 수십 명의 삼사십 대, 오십 대 대화 참여자들 VS 단 한 명의 20대 발언자


실은 민망했다. 세대 간 소통이 어렵다는, 양 측의 입장에 공감하고 반영된 주제로 만들어진 음성 기반 소셜미디어인 클럽하우스의 한 대화방에서 실제 발언 의사를 밝힌 양 측의 참여자는 수십 대 일의 구조였다. 그나마 용기를 내어 발언을 하고 있는 단 한 명의 이십 대 여성은 이 열세의 상황 속 자신의 소신 어린 생각을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표현하려 애쓰는 한 편, 쉴 틈 없이 중간중간 끼어드는 어르신(?)들의 공감의 리액션에 의도했던 발언의 흐름마저 끊기는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 불균형의 절정을 이끌어낸 대화 참여자는 40대의 유명 연예인이었다. 부모님 또는 직장에서의 윗사람들과의 소통이 왜 어려운지에 대해 설명하던 20대 여성은 잠시 호흡을 고르는 듯했다. 목소리만으로 자신만의 공간에서 대화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수십 명이 실시간으로 자신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듣고 있는 상황 속 도무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 어른들의 다양한 반응 앞에 20대를 대표하는 의견을 논리적으로 전달하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그렇게 다음 표현을 정리하는 듯한 그 잠시의 침묵이 이어진 순간,


"너무 공감하고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의미죠?" 


그분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들을 20대라는 기준으로 단순화시켜 자신의 경험과 겪어온 과정에서의 느낌과 동일시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이어서 따라붙는 연예인으로서의 지난 10대, 20대의 경험, 최근 읽었던 책의 내용을 덧붙이며 그래도 이십 대는 많은 경험을 해봐야 한다 생각한다며 '그러니까 겁내지 말고 이것저것 부딪혀봤으면 좋겠어요 절대 포기하지 마요, 응원합니다'로 맺는 그의 주장은 꽤나 진정성이 묻어 있는 듯했다. 그렇게 발언권이 넘어간 뒤 대화방의 호스트인 40, 50대 분들의 덧붙여진 요약과 확인이 이어졌고 이에 대해 20대 여성은 침묵했다. 이제야 저도 좀 젊은 세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네요, 이런 솔직한 대화의 기회가 만들어져 너무 좋고 이런 기획을 해주신 호스트 분들께 감사드린다는 어른들(?)의 발언이 뒤이어 붙었다. 그렇게 십분 넘게 듣고 있던 20대 여성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아까부터 제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제 생각과는 다르게 전달되고 있는 듯한데요..."

"아 그래요? 뭐가..."

"그러니까 제가 전하고자 했단 이야기는..."


이후 다시 숨 고르는 순간이 찾아오고, 이를 다시 40대의 유명 연예인이 그 호흡을 가져간다.

"너무 공감하고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다시 몇 번의 반복이 시작되었다. 


현상: 누구를 향한 공감인가? 상대를 이해했다는 판단은 적절한가?


세대 간 소통이 왜 어려운가를 드러내는 현상은 이미 해당 대화방 안에서 실시간으로 확인되고 있었다. 


'이해한다'는 착각. 실은 불가능한 인간의 목표

많은 관계에서 나를 이해해 줄 줄 알았어, 나를 이해해 줬어야지, 나는 너를 이해해 등의 갈등의 상황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이해'다. 그리고 이는 '이해할 수 있다'를 전제로 하기에 상대방을 향한 그 기대와 자격의 논란에서 실체가 없는 불완전한 기준이 되곤 한다. 


그러나 원래 사람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하이데거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은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두 사람 즉, 부모님이 이루신 가정이라는 세게에 태어날지 우리는 몰랐다. 깨어나보니 존재하는 국가, 각각의 가정이라는 세계를 이루고 흐르는 규칙, 가치관, 규율 등에 적응해야 했고 성장해 가며 만나는 학교, 직장, 커뮤니티들과 그 속의 서로 다른 이들과 보내는 시간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자기다움을 서로 다르게 경험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간의 최선은 '이해한다'가 아닌 '이해하려 끊임없이 노력하겠다'에 가깝다.


실제로 컨설팅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첫 시작 지점에서 양측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명확하게 인정하는 데 있다. 서로의 오늘을 있는 그대로 확인하고 인정하는 전제, 그것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문제를 구체화하고 원활하게 해결책을 찾아가는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관계에서도 '알고 있지'에서의 시작은 불화의 단서들을 덮어 과정이 깊어질수록 그 균열을 더 키울 뿐 되돌리기에는 이미 감정적 골이 깊어진 상태를 확인할 뿐인 경우를 낳기 쉽다.


때문에 오히려 '나는 상대를 이해할 수 없다'에서 대화를 시작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판단과 평가를 시도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것이 더 명료해지고 이전보다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찾을 수 있다. 


40대 연예인분, 호스트 분들, 스스로가 상대적 어른이라 판단해 20대 여성의 반대 입장에서 대화에 참여한 많은 분들에게는 기본적으로 나는 당신의 상황을 알고 있다는 전제가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상대에게 부담을 주었던 건 아니었을지, 답변을 듣고 의견을 전하는 상황에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한 긴장감을 조성한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조언, 상대의 허락이나 요청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하는가

조언을 구하고 전하는 관계에서 가장 먼저 상호확인되어야 하는 건 조언을 구하는 쪽의 허락이다. 조언의 시작은 언제나 상대의 현 상황에 대한 평가다. 평가는 기본적으로 유쾌한 경험이 되지 못한다. 더구나 왜곡되고 부족한 정보를 기반으로 내려진 상대방에 대한 평가는 거의 언제나 초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불편한 긴장감을 만들어내는데 그친다. 


20대 여성은 어른들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40대의 연예인분은 그 흐름을 굳이 끊어낸 뒤 본인의 입장에서 진정성이 담긴, 어쩌면 상대의 입장에서는 부적절하거나 불필요한 의견을 건네었을 뿐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상대에 대한 배려나 존중이 없다 느껴질 수도 있는 태도이기도 하다. 조언을 구하고 건네는 상황에서 대화의 주제가 되는 건 '조언을 구하는 이의 삶'이다. 누구를 위한 조언인지를 곰곰이 고려해 보면 40대의 연예인분은 상대를 위하는 척했으나 실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는 의견을 던진 뒤 혼자 만족하고 스스로 쑥스러워 뒤로 물러섬을 반복했던 것일 수도 있다. 


세대, 나이가 아닌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대화에서 확인되는 전제는 '나의 20대와 너의 20대는 똑같이 버거웠다'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되짚어봐야 하는 부분은 그 두 20대 사이에는 '시대의 변화'가 엄정하게 놓여있다는 점이다. 국가의 성장 과정을 통해 바라보면 전쟁 이후 건물이 지어지고, 고속도로가 뚫리며 국가 기반 산업에 자본이 투입되던 시기에는 소위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률과 주택 마련에 대한 기준들이 현재의 성장 포화 시기와 비교했을 때 오히려 더 안정적인 삶의 기준이 되어준 점이 있다. 반면 현재는 20대부터 50, 60대에 이르는 전 세대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부동산, 비트코인 등의 투기에 가까운 투자로 몰리고 있음을 고려하면 각 시대의 흐름이야말로 세대의 특징을 구체화하는 핵심 기준이 될 수 있음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나이는 나이일 뿐이다. 지금의 20대는 그 이전 세대와 비교했을 때 누구보다 치열하게 무한 경쟁의 10대의 시기를 보냈고 20대가 되어 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취업을 위한 학점 관리에 집중해야 했던 이들이기도 하다. 대학만 가면 너 마음대로 해라라고 하던 부모님들의 위로는 이미 십수 년 전에 사라졌다. 이들의 치열한 10대, 20대를 살아보지 못한 40,50대가 어떻게 자신의 20대를 기준으로 그들의 오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자부하고 그들의 부족한 현재가 당연하다 판단할 수 있을까? 이런 착각은 어떤 면에서는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하는 면마저 있다고 보인다.


생각: 처음 사는 삶일 뿐이라는 자각이 우선된다면


미국에서의 연구이기는 하나 자녀들의 과외 선생님을 찾는 과정에서 확인된 건 부모님의 수치심과의 연관성이었다 한다. 부모로서의 정체성은 자녀의 성공 및 실패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에, 자녀의 성적 부진이 곧 자신이 부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실패의 신호로 해석될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그분들은 본인이 살면서 가지고 싶었거나 가까이라도 가고 싶었던 욕망을 금전적, 학력의 차이로 좌절하고 포기했던 순간들을 기억하기에 부모로서, 선배로서, 지나가던 나이 든 어른으로서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이전의 자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 유일한 20대 여성에게 대신 전달하려 시도를 한 건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이야기를 건네는 이의 진정성과 의도, 내용이 얼마나 진실했는지가 핵심은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에는 대화의 방향이 내가 아닌 이의 삶을 향해 있다는 점, 그렇기에 상대를 평가하고 판단하기보다는 말을 꺼내는 이를 조금은 바라봐주고 기다려줄 수 있는 여유를 보여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여유야말로 이 시대의 어른이라면 응당 갖추고 드러낼 수 있는 어른의 자세가 아닐까 싶었다. 


우리 모두 처음 사는 인생이다. 처음 사는 20대였고, 40대이며, 부모의 역할을 처음 경험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해를 해줄 것도, 이해를 바랄 필요도 없는 게 아닌가 싶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더욱더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돌아봄에 대한 얘기에 가까워 보인다.




장황하게 글로 적었지만, 비슷한 내용을 해당 대화방에서 직접 공유한 바 있다. 많이 긴장되었고 손이 덜덜 떨렸다. 나와 같은 연배인 40대 연예인 분의 활약(?)을 확인하는 내내 '아 살면서 정말 진심으로 이렇게 간절하게 내가 저분의 절친이었으면 좋겠다 바란 적이 있었나, 당장 전화를 걸어 저 대화를 끊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또 한편으로는 대화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그 순간의 나 또한 저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건 아닌가 라는 생각에 고민이 많았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이렇게 쉽게 판단하고 평가할 자격이 있는지 우리 스스로를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공유했고 이후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게 해당 상황에 대한 후회와 고민을 멈출 수 있게 해 준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했었다. 


이 분에게 있어 나의 불완전한 이야기 중 무엇이 감사하게 경험되었을까?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떳떳하다 할 수 있을까... 다시 생각의 회오리가 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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