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용 성장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평생 지속되는 로맨스이다.
Oscar Wilde
듣다 보니 이상했다. 실은 누구보다 결혼에 관심 있어 모임에 나왔을 법 한데, 정작 결혼에 대한 본인들의 생각은 결혼에서 파생된 상황들을 미리 가정하고, 매우 성실하게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소개하고 있었다. 가부장적인 한국의 결혼 문화가 여성들의 전반적인 삶을 위축시켰다고 주장하며 비혼의 타당성을 이야기하는 남성이 있는 반면, 자신의 어린 시절과 주변 친구들의 최근 육아와 관련된 대화를 토대로 자신이 왜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인지를 설명하는 여성도 있었다. 논의는 꽤나 뜨거웠고, 참석한 인원들은 크게 공감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내게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들 모두가 현재 만나는 이가 없는 '싱글이라는 사실'이었다.
결혼은 두 사람이 만나 함께 하는 거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지켜봐 왔고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인지,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생각해 왔다.
다음은 'AI시대, 우리가 신체와 맺는 관계의 변화'라는 주제의 리서치 프로젝트를 진행할 당시에 조사 참여자와의 대화를 원활하게 이끌기 위해 준비해 갔던 자료 중의 하나다. 이 표는 신체를 통해 우리가 삶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 및 가치 구조를 제한된 시간 안에 빠르게 전달하고 이를 예시 삼아 참여자의 경험과 인식을 이끌어내는 대화의 촉진제로 제공되었다. (참고: 이해하고자 했던 주제는 섹스어필, 노화 및 부패에 대한 경험 변화, 신체 감각을 활용한 전문성의 의미 변화 등이었다.)
'순결'이 중요한 사회적 가치로 인정받던 70년대를 기준으로 구성된 위 예시 가치 구조에 나는 크게 공감하는 편이라 할 수 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선크림이나 아이크림을 20대 때부터 챙겨 바르고, 자신만의 옷 스타일을 구축하려 애쓴 과정들은 내가 앞으로 만날 누군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매력적인 이성으로 비치면 좋겠다는 바람을 바탕으로 했고, 한 분야에서 인정받는 전문가가 되고자 노력해 온 커리어에의 집중은 관계를 지켜나가기 위한 재정적 안정감을 위한 투자라 여겨왔다. 즉, 이 모든 노력의 정점에는 앞으로의 삶을 함께 걸어 나갈 누군가와의 관계, 나이 들어서도 이어질 '로맨스'가 놓여 있다 표현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지고, 사귀기로 결정하고, 그러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아이를 낳을지, 낳는다면 언제가 좋을지 등을 고민하게 될 것이라 생각해 왔다. 그리고 이 같은 인식은 나만의 것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조사가 진행되면서 확인된, 또한 싱글 모임에 참여한 이들과의 대화에서 다음의 공통된 패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높은 기대와 멀어진 연애
아파서 병원에 혼자 입원해 있던 시간 동안 누군가가 옆에 있어주면 좋겠다를 절감했다던 한 여성은 요즘 많이 외롭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키나 외모, 연하 등의 잠재적 이성에 대한 기대를 언급할 뿐 현재의 본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관심을 가지고 다가와 주기를 바라는, 수동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렇게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연애에 대한 이상은 커졌으나 본인은 이상적인 연애 상대인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곤 했다.
두려워진 결혼, 개념화되다
조사에 참여한 이들이 저 위의 두 노인이 서로 의지하며 걸어가는 사진을 보고 보인 반응 중 많은 부분이 의외로 결혼에 대한 불편함, 두려움이었다. 결혼이라는 표현은 사전에 중요하게 제시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난 그저 왜 결혼이 먼저 떠올랐을까가 궁금해졌었다. 왜 솔로인 남성과 여성들이 비혼 및 각방의 장점에 대해 토로하고 결혼한 부부가 주로 참여하는 딩크족들의 모임에 참석해 아차 싶었다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을까? 이와 관련해 사회, 정치적으로 분석해 놓은 기사와 소위 말하는 전문가들의 의견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그 외에 내가 그나마 가장 크게 공감했던 의견은 한 라이프 플래너 분의 이야기였다.
"수십 년간 고객들의 크고 작은 재정적 고민들을 들어보니 요즘의 젊은이들은 결혼에 대해 두려워하는 듯해요. 내가 이상적인 결혼 상대로서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하고 끝없는 두려움."
그 때문일까. 실제로 연애를 하는 대상이 현재 없음에도 사회적 제약, 사회적 제도로서 결혼의 의미에 대해 논하고 아이를 갖는 것, 키우는 비용의 부담에 대해 설명하는 이들에게서 나는 왠지 모르게 이들 모두 오히려 연애와 결혼에 대해 진심이 아닌가를 느꼈다. 너무 원하는 만큼 다가가기 두려워하는 반응처럼.
결국 우리는 나를 위해 옆에 있어 줄 누군가를 찾는다. 그리고 그렇기에 내게 없는 부분을 채워줄 상대에 대해 기대를 한다면 이는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상대방에게 있어 그들이 간절히 옆에 머물기를 원할만한 사람인지.
살면서 아 이렇게 외적으로 매력적인데 학벌도, 집안도 좋은 사람이 있구나 생각하게 한 이들이 몇 있었다. 그리고 관심을 못 받거나 무시를 당해도 업무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도움을 주면서 어렵게 어렵게 함께 밥을 먹거나 대화를 나눌 기회를 만든 적이 있었다. 그 한 번의 기회들은 어떻게든 만들어낼 수 있었으나 정작 상대가 당시의 나를 보고 앞으로도 내 곁에 머물고 싶은 만한 상태였을까를 돌이켜보면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던 자신을 발견하고는 했다.
내가 원하는 누군가가 있고 그 사람과의 나이 들어서도 이어질 관계를 상상하고 기대한다면, 내가 먼저 상대에게도 같은 상상과 기대를 안겨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목표는 그래서 내게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었다. 그 때문인지 이번 조사를 통해서 그리고 이전의 솔로 모임을 통해 만난 이들에게서 현실에서의 연애 앞에서는 작아지고 상상에서의 결혼에 대해서는 개념화하고 분석하는 적극적인 반응을 확인한 건 어떤 면에서는 씁쓸하고 어떤 면에서는 흥미로웠다 할 수 있겠다. 물론 나 또한 현재 솔로이기에 이에 대해 마냥 당당할 수 없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망과 현재에 대해 솔직해질 필요는 있는 듯하다.
"만약 블랙핑크 제니가 2년 뒤 결혼을 전제로 오늘부터 사귀자 하면 어떡하실 건가요? 아 저는 비혼주의자라 시작도 못하겠네요 미안합니다. 이렇게 답하실 건가요? 만약 배우 박서준이 와서 당신 닮은 딸을 낳고 싶다며 결혼을 전제로 사귀자 하면 어떻게 할 건가요? 저는 딩크족이라 사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답할 수 있나요?"
농담 반, 진담 반 섞어 던진 질문들에 그들은 모두 한참을 웃기만 했다.
결혼이나 아이를 낳을지 말지에 대한 고민은 눈앞에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때 진행되는 관계의 과정들 안에서 비로소 떠오르는 상대적, 상황적 질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 같은 내 생각이 모두에게 정답이 아닐 수 있다. 다만 그들의 말을 잃은 반응은 관계의 과정으로서의 결혼에 대한 내 생각이 마냥 틀리지만은 않구나라는 기준은 되어 주었다. 결혼이 새로운 시작이 될 수는 있으나 목표일 수는 없다. 오히려 이후에 이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과 나는 어떻게 얼마나 맞춰가며 살아나갈 것인가가 더 현실적인 고민이 되지 않을까.
예전 드라마이긴 하나 '연애시대'의 마지막 장면에서 손예진은 유산의 아픔으로 헤어졌다가 돌아 돌아 다시 만난 두 사람 사이에서 새롭게 태어난 아이와 뛰어노는 남편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독백을 남긴다. (물론 나는 결혼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이 이상 전할 수 없다. 다만 충분히 경험해 알 것 같은 시간도 순간으로 남을 뿐 관계라는 미지의 상태를 유지해 가는 것의 어려움과 기대에 대해서는 충분히 표현한 듯해 공유해 본다.)
'고통으로 채워진 시간도 지나고 희귀한 행복의 시간도 지나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가끔 싸우기도 하고 가끔은 격렬한 미움을 느끼기도 하고 또 가끔은 지루해하기도 하고 자주 상대를 불쌍히 여기며 살아간다. 시간이 또 지나 돌아보면 이때의 나는 나른한 졸음에 겨운 듯 염치없이 행복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가 내 시간의 끝이 아니기에 지금의 우리를 해피 엔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