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테르 파울 루벤스 <마리 디 메디치 연작>
2000년대 초반 스마트폰에 탑재된 카메라는 이전까지 필름 카메라를 써왔던 내게 "세상 좋아졌네" 라는 말을 하루에 열 두 번 씩 외치게 만들었다. 마치 거울을 보듯 카메라 속 나를 보며 사진을 찍을 수 있어 편했지만 나이든 내 모습을 마주하는 일이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러다 각종 필터와 뷰티 효과가 탑재된 카메라 앱이 우후죽순 개발되고, 필터와 각종 효과로 성형된 내 모습을 보는 일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뽀샵세례를 한 내 얼굴 사진을 핸드폰의 배경에 넣어놓았다. 볼때마다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지인이 마을 도서관을 열었다. 내가 속한 동아리 회원 여럿이 개관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 몇 시간의 행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가방에 핸드폰이 없었다. 부랴부랴 다시 도서관으로 가 뒷정리를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혹시 핸드폰을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한 사람이 핸드폰을 들고 말했다. "아! 이거 선생님 폰이구나! 누구 폰인가 했네". 핸드폰 배경에 내 얼굴이 버젓이 들어가 있는데, 누구 폰인지 몰랐다니, 나는 폰을 터치해 내 얼굴을 보여주며 "여기 내 사진 있는데 모르셨어요? 호호호" 하자 돌아온 답변은 "봤어요. 그런데 어머! 그게 선생님이었어요? 난 보고도 몰랐네" 핸드폰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나인데 어떻게 몰라볼 수 있지? 얼굴이 조금 하얘졌기로서니, 턱이 조금 뾰족해지고 팔자 주름이 좀 지워졌기로서니 어찌 몰라볼 수 있단 말인가? 헨리 8세에게 시집 안 간 게 다행이긴 하다.
2024년 오늘도 카톡 프로필에는 오직 자기 눈에만 자신으로 보이는 수많은 셀카들이 끊임없이 업데이트되고 있다. 그런데 400년전에 그려진 이 그림을 본다면 우리가 하는 포샵은 아주 귀여운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미술사에는 수많은 위대한 화가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위대함은 시대와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평가 요소가 달라지겠지만 화면 구성과 연출력이라는 기준으로 본다면 으뜸은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견해다. '화가들의 군주, 군주들의 화가'라 불렸던 루벤스는 어떤 주문이든 의뢰인의 기대를 200% 넘게 충족시켰던 화가였다. 그는 의뢰인이 미처 인식하지 못한 숨겨진 욕망까지 찾아내어 "당신이 원하는 게 바로 이런 그림일 겁니다." 라고 제안하는 스타일이었다. 그의 작품은 판타지, 드라마, 멜로, 스릴러가 모두 어우러진 종합 서사극 같았고, 오늘날로 치면 각종 필터와 포샵, CG까지 완벽하게 적용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621년에 그린 <마리 드 메디치의 마르세이유 입성>을 보면 단박에 루벤스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루벤스만의 스타일이 있다는 뜻이다. 얼핏 복잡하고 진부해 보이는 그림이지만 루벤스의 그림은 정말이지 읽는 재미가 있다. 보는 재미가 아닌 읽는 재미라고? 그렇다. 이야기는 글로서 쓰일 수 도 있지만 그림으로도 그려질 수 있다. 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한 당시 상황을 간단히 살펴보자.
1600년 11월 3일, 프랑스 마르세유 항구로 한 척의 화려한 배가 입항했다. 배의 아치에는 여섯 개의 공이 새겨진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달려 있어, 이 배가 피렌체에서 출발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배에 탑승한 이는 바로 메디치 가문의 공주, 마리 드 메디치였다. 그녀는 토스카나의 대공 프란체스코 1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딸 요하나 사이에서 태어난, 말 그대로 금수저 중의 금수저였다. 이제 스물일곱의 나이로, 프랑스의 왕과 결혼하기 위해 마르세유에 도착한 것이다. 그녀의 앞에는 축복일지 비극일지 알 수 없는 새로운 운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리의 결혼 상대는 이미 47세에 이른 프랑스의 왕, 앙리 4세였다. 그는 첫 번째 왕비였던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이혼한 후 두 번째 결혼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으나, 왕족의 결혼이란 언제나 그렇듯 단순한 애정의 서약이 아니었다.
16~17세기 유럽은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끝없는 종교 전쟁으로 피폐해졌고, 프랑스 역시 종교 분쟁으로 민심이 곤두박질쳤다. 이런 혼란 속에서 프랑스를 통합하고 부르봉 왕조를 연 인물이 바로 앙리 4세였다. 그는 1598년 낭트 칙령을 반포해 유럽 최초로 종교적 관용을 인정하며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오랜 내전으로 국가 재정은 바닥난 상태였다. 이 위기를 해결할 방법은 이탈리아의 부유한 메디치 가문과의 혼인을 통한 재정적 지원이었다. 마리 디 메디치와의 결혼은 앙리에게 꼭 필요했던 정치적 선택이었던 것이다.
역사 속 왕들은 그들의 통치 스타일, 업적, 성격에 따라 다양한 별칭을 얻는다.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가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용맹함으로 '사자왕'이라 불린 것처럼, 앙리 4세는 개혁과 관용의 상징으로 ‘선량왕’이라는 칭호를 얻어 프랑스 역사에 길이 남았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호색왕'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었다. 50명이 넘는 여인들과의 로맨스는 그의 정력적인 삶을 증명했으나, 정작 공식적인 왕비였던 마리에게는 무관심했다. 특히 프랑스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던 마리의 고독은 더욱 깊어만 갔다.
그러다 1610년 앙리 4세가 암살당하게 된다. 낭트 칙령을 통해 종교적 평화를 추구했던 그와 달리, 마리 드 메디치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로서 개신교 귀족들과 정치적 갈등을 겪어 왔었다. 이로 인해 남편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으나,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다. 당시 왕위 계승자였던 루이 13세는 겨우 아홉 살이었고, 마리는 섭정왕후로서 프랑스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녀의 섭정 기간 동안 프랑스의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인물은 콘치노 콘치니였다. 이탈리아 출신의 외교관이자 법률가인 그는 마리와 함께 프랑스로 와 그녀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권력 남용은 결국 성인이 된 루이 13세에 의해 종결되었고, 콘치니는 1617년 처형되었다. 루이 13세는 어머니의 정치적 영향력을 줄이고 자신만의 독립된 통치를 구축하고자 했고, 결국 마리는 블루아 성에 유폐되는 굴욕을 겪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1620년 극적인 탈출과 화해를 이루었으나, 이미 그녀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리에게 예술은 정치적 복권을 위한 강력한 무기였다. 메디치 가문의 후손으로서 예술이 지닌 상징성과 그 정치적 힘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그녀는, 자신의 생애와 업적을 화려하게 기록하고 이상화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권력의 정당성과 명예를 다시 한번 선언하고자 한 것이다. 이 중요한 임무를 맡길 인물로 선택된 이는 바로 플랑드르의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였다.
루벤스에게 이 작업은 단순한 예술적 도전을 넘어, 세심한 균형과 정교한 연출이 요구되는 과업이었다. 그는 마리 드 메디치의 삶을 이상화하고 그녀의 위상을 드높이면서도, 그녀를 견제하던 루이 13세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신중함을 기해야 했다. 정치적 긴장 속에서 서로를 경계하던 그들의 복잡한 관계는 루벤스에게 지속적인 고민과 도전으로 남아, 작업 내내 어려운 과제가 되었으리라.
루벤스는 총 24점의 작품을 구상했으나, 실제로 제작된 것은 21점이었다. 각 작품은 평균 3.94 x 2.95미터에 달하는 웅장한 크기로, 그중 가장 큰 작품은 높이 4.94미터, 폭 7.19미터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나 이 연작의 목적은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마리가 정치적 반대 세력에 의해 결국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그녀의 권력 회복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서의 기능은 퇴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들은 여전히 그녀의 삶과 이상을 대변하는 예술적 유산으로 남았다.
이 연작은 마리의 생애를 시간 순으로 그렸다. 그 중 여섯 번째 작품이 <마리 드 메디치의 마르세이유 입성>으로, 마리가 프랑스에 입성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실제 마리 드 메디치와 앙리 4세의 결혼은 마리가 마르세이유에 도착하기 한달 전 인 1600년 10월 5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결혼은 마리와 앙리 4세가 직접 대면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대리인이 대신 결혼식을 치르는 대리 결혼 형태로 진행되었다. 실제 마리와 앙리 4세가 직접 대면한 것은 그림 속 그 날이 아니라 마리가 프랑스에 도착하고도 한 달이 지닌 1600년 12월 17일 이었다.
이제 작품을 감상해보자. 작품 속에서 마리는 황금 자수가 새겨진 흰 공단 드레스를 입고, 숙모 크리스티나 공작부인과 언니 만투아의 엘레오노르와 함께 배에서 내려오고 있다. 마리의 긴 여정을 호위한 몰타 기사와 선원들은 그녀의 입성을 축하하며 나팔을 분다. 화면 전체를 압도하는 화려한 색채와 루벤스 특유의 역동적인 구성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서 마리 드 메디치의 위엄과 권력을 과시하는 시각적 선포로 기능한다. 이 순간, 그녀의 삶은 프랑스 땅 위에서 새로운 장을 열고 있었다. 루벤스는 그 위대한 순간을 캔버스 위에 영원히 남겼다. ‘위대한 순간’ 이란 표현은 순수하게 이 그림에서 보여지는 묘사를 의미한다. 실제로 그리 영광스럽지는 않았던 마리의 마르세이유 입성을 루벤스 표 포토샵으로 감상해보자.
배에서 내리는 마리의 머리 위로 명성의 여신이 날고 있다. 명성의 여신은 고대로부터 권력자나 영웅들의 성공을 칭송하며 그들의 업적을 신화적,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되어온 도상이다. 마리의 앞으로 무릎을 숙이거나 두 손을 들어 올려 공손히 그녀를 맞이하고 있는 인물이 있다. 투구를 쓰고 푸른 망토를 걸친 남자는 프랑스를 의인화한 인물이다. 망토에 그려진 플뢰르 드 리스(fleur-de-lis), 즉 세개의 꽃잎을 가진 백합은 프랑스를 상징하는 문양이다. 그 옆에 두 팔을 들어 올리고 있는 여인은 마르세이유를 의인화한 인물이다. 도시의 모양을 한 황금왕관을 쓴 그녀는 한 손을 가슴에 얹고 다른 손을 높이 들어 올려 마리의 도착을 열렬히 환영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마리를 향한 환영은 비단 의인화된 프랑스와 마르세이유로 끝나지 않는다.
캔버스의 하단에 그려진 많은 인물들을 보자. 루벤스의 전매 특허인 풍만하고 생동감 넘치는 세 명의 누드 여인은 바다의 요정 네레이드다. 가운데 있는 여인의 다리에 연결된 인어의 꼬리가 파도 사이로 보인다. 네레이드들은 배를 정박하기 위한 밧줄을 잡고 선착장을 떠받치며 마리의 안전한 하선을 돕고 있다. 마리의 항해를 도운 이들은 또 있다. 삼지창을 든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뱃머리를 붙잡고 있다. 그 아래 은빛 긴 턱수염을 가진 프로테우스가 보인다. 포세이돈의 부하이자 미래를 알고 있는 프로테우스는 만물을 변화시키는 존재다. 마리가 프랑스를 변화시킬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 아래서 뿔고동을 부는 인물은 포세이돈의 아들 트리톤이다.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내 감정이 그림의 분위기와 같은 결을 이루기도 하지만, 반대로 상충하는 감정이 들기도 한다. 이 작품은 마리 드 메디치에의 영광이나 성공이 읽히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위대함을 역사에 남기고자 하는 절박함이 느껴진다. 화려하게 포장된 그림 속 장면들과 달리, 실제로 그녀의 삶은 그렇게 영광스럽거나 성공적이지 않았다. 이 연작은 그녀가 '영원히 기억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자신을 역사에 각인시키고자 하는 몸부림처럼 보여 애틋하다.
당시에도 이 연작은 루이 13세에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던 루이 13세는 그림 속에 가득한 어머니의 정치적 야망을 읽으면서도 루벤스의 능력에는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만약 루벤스가 이 연작을 그리지 않았다면, 이 시리즈가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루벤스는 당대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는 화가였으며, 그의 작품은 단순히 예술적 성취를 넘어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을 상징했다. 다른 화가가 이 연작을 맡았다면 마리 드 메디치의 위상을 충분히 높이지 못했을 것이고, 더 나아가 후대에 이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보존되었을지도 불확실하다. 루벤스의 회화는 역동적이고 극적인 구성, 인물의 생생한 표현, 그리고 웅장한 서사로 인해 그 시기 유럽 궁정 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에, 그의 손을 거치지 않았다면 이 시리즈의 역사적 가치는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결국, 루벤스의 이름과 작품의 예술적 가치가 프랑스 왕실과 유럽 전체에 영속적인 유산으로 남을 수 있었던 핵심 요소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루벤스였기에 그는 스페인의 펠리페 3세와 4세, 영국의 찰스 1세, 네덜란드의 알브레히트 7세의 궁정화가로 활동하며 외교관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작품에는 개인과 국가의 흥망성쇠, 영광과 과오 등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화가들의 군주이자 군주들의 화가였던 루벤스가 남긴 이러한 예술의 정수를 우리가 오늘날까지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