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절의 변화를 코와 눈으로 느낀다. 찬바람이 부는 10월이 되자 양쪽 콧구멍 번갈아가면서 막히기 시작했고 눈은 간질거림과 함께 눈물이 계속 나왔다. 비염과 안구건조증이 다시 올라왔다. 거북목과 라운드 숄더와 더불어 현대인의 상징과도 같은 질병이 계절의 변화와 함께 찾아왔다.
찬바람과 함께 찾아온 손님들을 빨리 내쫓기 위해날을 하루 잡고 병원 투어를 돌았다. 안과에 가서는 안압 검사를 위해 눈을 뜬 채로 기계에서 나온 인공풍을 맞은 뒤 인공눈물과 알러지약을 처방받고 이비인후과에 가서는 꼼꼼하게 봐주시는 의사 선생님께 항생제를 처방받았다. 자리 위에 항상 소설책이 놓여 있는데 언젠가 그 책이 무언지 물어볼 수 있을까? 이비인후과 대기줄이 퍽 길어서 시간은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아직 가야 할 병원이 하나 더 남았는데 그건 계절과 관계없이 사시사철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질 않는 한포진이라는 피부 질환 때문이다.
한포진은 군 시절 스트레스를 한껏 받아 가렵다고 긁어대던 손가락 사이의 물집이 질병인 걸 알아서였고, 안구건조증은 남자들이 우글우글한 남고 교실의 낮부터 켜대는 직접 조명 아래에서 흐르지 않는 눈물이 슬퍼서나오는 게 아니란 걸 알았을 때부터 였다. 그중 제일 오래된 질환인 비염은 내 삶을 기억할 수 있는 시기부터 나와 함께였다. 아마도 다섯, 여섯 살부터? 혹은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 그때는 축농증이라는 말이 더 유행했는데 코가 막힌 게 너무나 답답해서 코피도 아닌데 휴지를 둘둘 말아 코에 쑤셔놓았었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나와 함께 해온 오랜 동반자 같은 질병이다. 물론 원한다면 기꺼이 법원에 가서 이혼 서류에 사인할 수 있지만 여름이 찾아올 무렵 긴 휴가를 떠났다가 추우면 잽싸게 내 옆에 들러붙는다.
인구 80만 인 청주라는 도시에서 그것도 꽤 오래된 동네였던 율량동에(지금은 개발이 되어 오히려 번화가가 되었다 한다) 한 이비인후과가 있었다. 중딩 때부터 다니다가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다니면서도 비염이 도지면 굳이 청주에 있는 본가로 가서 다녔던 병원이다. 워낙 인기가 많아 새벽 5시부터 접수를 받는 그곳은 (무려 클리닉 기준 환자 수 전국 4위였다) 처음에는 한 명의 의사가 운영하다가, 두 명, 나중에는 규모가 커져 네 명까지 늘어났다. 그 처음에 시작한 조 씨 성의 의사 선생님은 드라마에 나오는 의사들 못지않게 깊고 큰 두 눈에 알랭 들롱 스타일의 고전 미남이었고, 목소리까지 굵직해 귀에 쏙쏙 들어왔다. 거기다 한 번 가면 두 시간은 기본으로 대기해야 할 정도로 인기 의사면서도 환자 한 사람을 붙잡고 5분은 넘게 설명할 정도로 열정적이고 성의 있는 진료를 하는 분이었다. 자주 오시는 어르신들에게는 하는 살짝 반말이 섞인 말투는 재래시장의 때 묻은 상인처럼 친근했다. 책상 한켠에는 사탕을 쌓아두고 코찔찔이 꼬맹이들이 오면 한 움큼씩 쥐어줬다. 살면서 봤던 제일 멋진 남자 중 5위 안에 들었다. 물론 의사 중에는 일등이다. 대부분이 불친절하고 눈도 안 맞추지는 의사들이 많기에 2위와 헤아릴 수 없는 격차가 있었다.
스마트폰이란 게 없던 때에는 긴 대기시간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책을 들고 가기도 했는데 러시아 소설에 한창 빠졌을 때였다. <죄와 벌>을 들고 대기실 앞에서 읽고 있을 무렵 의사 선생님이 그 책을 들더니 감탄하면서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이런 책을 읽어야 돼!'라면서 독서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특히나 고전 문학의 중요성을 얘기하면서 나에게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악>을 이야기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책은 내 취향은 아니었다. 사실 그 의사 선생님의 추천뿐만 아니라 책 추천이란 게 꽤 들어맞기 힘들다. 그 뒤로 열 권 정도의 책 선물을 받고 여덟 권쯤 책장에 장식처럼 꽂아둔 뒤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때 이후로 선생님은 나를 볼 때마다 요즘에는 무슨 책 읽는지 물어보곤 했다. 내가 읽는 다양한 책 중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고전 위주의 책 제목을 말했다. 이를테면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같은 거 말이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들고 갔을 땐, 이 책은 좀 더 나중에 읽으라 말했다. <자본론>은 얼마 안 가 덮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그때 병원에서 고전 문학을 읽던 소년이 집에서는 만화와 라이트 노벨에 빠졌던 건 알고 있었을까?
전역하자마자 복학하면서 학교 생활이 바빠 다니던 병원도 서울에 있는 대학 근처로 갈아타면서 그 병원에는 발길이 닿질 않았는데 생각해 보면 인사 한 번 정도는 드리는 게 맞지 않았나 생각을 한다. 그 정도의 인연은 되었을진대. 그런 식으로 사그라든 인연이 너무 많았다. 가끔씩 상상을 한다. 내 글이 언젠가 책이 되어 선물하면 어떤 반응일까? 부모님도 책과는 거리가 멀었고 학교에서는 소설책보다는 문제집 한 권 더 풀어서 좋은 대학에 가라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그때 유일했던, 내 주위에서 소설책을 읽으라고 해준 단 한 명의 어른이었다.
가을 손님 덕분에 그리운 얼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언제부턴가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최근에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라는 책을 읽으면서 과학적 사고에 관심이 많아졌다. 성공한 작가이자 지식인인 유시민은 환갑이 지나고 과학 공부를 다시 하면서 본인의 이과적 지식 앞에 무식함을 고백했다. 그리고 과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바라볼 때 세상은 달리 보인다는 걸 역설했다.
고등학교 때 물리학 운동의 법칙을 이해할 수 없고 시험을 위해 암기를 시작했을 때 나의 과학적 탐구는 멈췄다. 전공도 영문학과 경영학을 한 덕분에 내가 발을 땅에 딛고 사는 게 중력 때문이고 숨 쉬는 게 산소라는 게 아직 지구에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걸 아는 아주 낮은 수준의 과학적 상식만 갖췄다. 해가 지날수록 봄과 가을이 짧아지고 마른 하늘에 우박이 내리는 도깨비 같은 날씨에 놀라면서도 탄소가 어떻게 지구를 뜨겁게 하는지 그 원리는 알지 못한다. <오펜하이머>를 보고 감탄하고 극장을 나와도 핵분열과 핵융합이 무슨 차이인 지 알지 못한다.
사실 알지 못 한다가 아니다. 알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한 때 나는 수학 과목을 제일 좋아했었다. 공식의 원리를 이해하면 거기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문제들을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암기가 지식을 뇌 속에 억지로 새겨 넣는 느낌이라면 이해는 지식이 몸 안에 도는 혈액처럼 체화되는 느낌이다. 근의 공식을 제외하고 수학은 나에게 이해의 영역이었다. 암기력이 극도로 안 좋은 내가 공부란 걸 그나마 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언젠가부터 내 주위의 모든 걸 그냥 받아들이기만 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머릿속에 꾸겨 넣었다. 마치 문제풀이 학생을 지목하기 하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선생의 시선을 피하고 고객을 푹 숙인 모서리 끝 자리의 학생처럼 살았다. 그러다가 나를 지목하지 않으면 안도할 뿐인 삶.
그런 현타가 온 건 내연 기관의 K5를 운전하고 집에 들어갈 때였다. 내가 밟은 엑셀로 어떻게 이 차는 휘발유를 연소시켜서 시속 80km라는 움직임을 낼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저 요즘 기름값이 많이 올라서 최대한 브레이크를 덜 밟고 급가속을 하지 않으려는 것뿐이다. 어째서 유가가 상승하는지 모르는 건 두 말하면 잔소리다.
삶에서 필수적이지 않아도 그 원리를 이해하려는 자세를 앞으로 지향해보려 한다. 그 원리가 어쩌면 내가 몰랐던 삶의 진리에 지름길을 뚫어줄 수도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환갑이 아직 20년 조금 넘게 남은 남자의 깨달음이다.
날이 너무 좋아 전화를 했는데
간만에 일요일 휴가를 가고 데이트를 하러 천안으로 가는 길이었다. 햇볕을 반사하는 낙엽과 단풍의 빛깔 덕분에 시야에 다양한 색이 들어왔다. 어쩌면 올해 제일 좋은 날씨라고 해도 좋은 날이었다. 문득 이런 날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무얼 하는지 궁금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대학 시절부터 10년을 넘게 알아 온 악우는 5분 거리인 본가에 엄마밥을 먹으러 간다고 했다.
최근 삶의 1순위가 보드게임이 되어버린 100kg가 넘지만 입이 짧은 친구는 똥 싸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