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종이꽃 Oct 04. 2022

잔인한 일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

아침 늦게 일어난 딸이 방문을 열고 나오며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아! 수능 냄새 나!! 심란한 냄새, 가슴이 꽉 막히는 냄새”


씻으러 들어가는 딸이 더 이상 수험생이 아닌 게 그 순간 그렇게 감사했습니다. 이맘때의 그저 그런 글루미한 날씨는 그냥 아무 일이 없어도 사람 마음을 무릎 아래까지 끌어내리는 힘이 있는 거 같아요.


이번 주는 일 예약도 안 잡고 김치 수업 일정도 잡지 않은 채 쉬려고 맘먹고 있었습니다.


딸이 아침에 그런 말을 하긴 했으나 나까지 덩달아 기운이 내려앉아서 내 친구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었거든요.

심심해서 손가락 끝으로 유튜브를 끌쩍 끌쩍 건드리며 이것저것 보고 있는데 긴급 뉴스라면서 박수홍이 아버지에게 검찰 조사에서 폭행당한 기사가 뜨더라고요.


순간 내 몸이 소파 밑으로 파 묻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딸은 가을 공기에서 수능 냄새를 맡았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 소리가 귀에서 환각처럼 계속 들리던 아침이었었거든요.


“김정은 씨 되시죠? 여기는 북부지검 000입니다. 000님이 김정은 님을 형사고소하셨음을 통보해드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서면으로 우편 발송이 되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멍했던 거 같아요. 그 순간이 영겁의 시간이라도 되는 듯 느껴지다가 갑자기 메스꺼워서 찬 공기를 맡으려고 침대에서 기어 내려와 차가운 베란다 바닥에 얼굴을 대고 한참이나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그냥 머릿속에서 지난 몇 개월 동안 벌어진 일을 복기했던 거 같습니다. 아빠의 교통사고, 그리고 반신불수가 되어 본능만 남아있던 아빠의 처참했던 모습, 피투성이가 된 아빠를 수술실에 들여보내고 넋이 나가 있던 셋째 여동생 지연이의 피가 말라붙어있던 손. 그 손을 바라보던 나.


아빠의 몸을 강탈해간 막내 여동생이 아빠를 어디 요양원에 숨긴 건지 찾으러 다니던 일, 겨우 찾아간 병원에서 면회 거절로 문전 박대를 당하고 얼이 빠져 집에 돌아오던 날의 날씨와 공기의 냄새, 분명히 아빠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는데 아빠 이름으로 고소장이 날아들던 2년 전의 이 맘 때의 흔적이 아직 내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무늬로 남아있습니다


딸은 수능 냄새가 났던 아침이었고 나는 원인 모를 컨디션 저조로 일을 쉬고 휴식하고 있던 오후에 박수홍 씨의 뉴스를 접한 거죠.


평생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책무가 자신을 짓눌렀겠지만 그 가족들에게 필요한 존재이고 의지가 되는 존재라는 사실에 거룩한 책임감을 과도하게 끌어안고 살았을 겁니다.


나도 그랬으니까요. 아빠는 나에게 임플란트 치료비를 받아서 치료를 받으며 미안해했으나 돈이 없을 줄 알았던 촌부의 주머니에 숨겨져 있던 임플란트 비용은 아들에게 줬었습니다.

막내 여동생이 대학교에 대학원도 모자라 미국 어학연수까지 다녀온 일을 온 식구가 다 알아도 나만 몰라야 했더라고요.


할머니를 모시고 아빠를 모시고 동생들을 데리고 일본 여행을 다녀온 추억으로 한동안의 상실감을 메꾸고 살았습니다.


어떻게 나한테 그래? 소리도 안 나왔다가 아빠의 형사합의금을 뺏으려는 형사고소에 이어 민사소송까지 거치며 나중엔 모든 걸 다 손에서 놓게 되더라고요.


분명히 알아졌습니다. 나는 싸우기 싫어하는 사람이고 혈육과 싸우는 일이 이길 수 있어도 너무 나에게 치명상이 되어 내 심장을 찢어 놓을 위력을 발휘할 거란 사실을 알고 싸움을 하지 않겠다고 판사님에게 반론서를 써서 보냈고 마지막 조정 판결을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거기까지의 일들이 딱 일 년이 걸렸습니다. 그 사이 아빠를 휠체어에 태워 은행 쇼핑을 다니고 법원을 다닌 막냇동생과 삼촌들과 고모는 용인의 어딘가에 땅을 매입했다고 들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시골집이 팔렸고 땅이 팔렸고 아빠의 억대의 교통사고 합의금이 합해진 결과였죠.


이젠 남의 일처럼 복기가 가능한 일이지만 딸은 오늘의 공기에서 수능 냄새를 맡았고 저는 귀에 환청이 들렸던 날에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연예인의 뉴스에 내 몸과 마음이 함락되려고 하더라고요.


한 없이 소멸되는 느낌으로 누워있다가 이대로 계속 누워있으면 저녁에 식구들이 들어왔을 때 난 공기 중으로 사라질 거 같은 두려움이 생겨서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 등산화를 신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위로받으려 애쓰지 않을 거야.

하나님이 아시니까 난 괜찮아.

오늘도 내 기도를 해야지. 빼먹지 말아야지.


그렇게 또 나의 걸음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루 4.5킬로. 나의 기도의 걸음을 한 시간 걸으며 나를 또 세워봤습니다.


그 연예인도 자신을 포기하지 말기를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인간의 법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 하늘의 법으로 사필귀정으로 풀릴 거라며 위로해주고 싶었습니다.


오늘 그렇게 나의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내가 잔인한 일에 대처하는 법은 노여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하소연하지 않고 내 기도를 내 일상을 멈추지 않는 일입니다.


혹시라도 누가 그런 잔인한 일을 겪고 있다면 당부하고 싶습니다.


제발 나를 내가  포기하고 불쌍해하지 말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인스타 계정을 삭제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