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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꽃 Jan 26. 2024

05. 남겨진 사 남매

세상에서 어떤 관계가 제일 안전한 걸까요? 그러니까... 무슨 상황이 되어도 나라는 존재를 포기하지 않고 지켜주는 사람은 누가 되어야 하는 건지, 나는 요즘 그걸 생각합니다.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너무도 당연하게 보통의 사람이라면 부모님이라고 대답을 했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선뜻 그 대상을.... 그러니까 무슨 위험이 닥쳐도 어떤 고난이 닥쳐도 나를 포기하지 않을 사람의 존재가 주는 안정감을 부모에게서 느껴본 적이 없고 형제에게서도 배신을 당한 터라 말입니다. 그 대상이 나의 부모라고 대답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내가 지켜줄 사람의 대상은 명확합니다. 나의 남편과 나의 딸, 그 두 사람에게 어떠한 형태의 어려움과 고난이 와도 나는 그 두 사람을 버리고 나 혼자 편하겠다고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나는 왜 고작 아홉 살의 나이에 동생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평생 지고 살았어야 했나를 오래 생각했는데 요즘에서야 선명히 보이는 그날의 장면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날의 경험 이후 나는 동생들에게 다짐을 했었나 봅니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너희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여야 한다는 너무도 무거운 책임감을 아홉 살 계집아이가 멍에처럼 짊어졌던 그날을 글로 그려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글로 되새김질을 하는 일이 나에게 도움이 되어줄 거란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억하려 애쓰고 생각하려 애씁니다. 엄마가 없어졌던 날도 선명히 기억이 나고요. 그리고 집에 빚쟁이들이 왔던 날도 너무너무 징그럽게 기억이 잘 납니다. 조용하던 시골동네가 소란스러웠습니다. 구경거리가 생겼으니까요. 놀란 할머니를 보며 나는 감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태연해야 했습니다. 겁에 질렸어도 어린아이는 본능적으로 상황에 순응합니다.


아무 일 없는 거처럼 숨을 죽인 채 주변의 상황만 살폈습니다. 며칠 후, 술냄새에 절어 집에 온 아빠는 다짜고짜 나와 내 바로밑의 남동생에게 가방에 옷을 챙기라고 했습니다. 내일 학교에 가야 했는데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다며 얼른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서라고 채근하는 아빠에게서 큰 무서움을 느꼈습니다. 감히 말을 붙일 수도 없었어요. 학교를 가야 하는데 아빠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싶었으나 묻지 못하고 돌도 안 지난 막내여동생을 내가 업고 남동생과 셋째 여동생을 뒤에 따라오게 하고 아빠를 숨죽이며 따라가야 했습니다.


아빠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평소 왕래도 잘 없던 외갓집이었습니다.  외할머니는 표독스럽고 인정도 없던 사람이라 저 사람이 엄마의 엄마로구나로만  알았던 사람인데 그 집에 우리를 데려다 놓고는 아빠는 바로 되돌아가버렸습니다. 우리 사 남매는 인질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집을 나간 엄마가 우리 사 남매가 자신의 친정집에 맡겨진 걸 알면 찾으러 올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아빠의 기대와는 다르게 일주일이 지나도록 엄마는 오지 않았고 외할머니는 우리에게 밥도 주지 않고 그분도 어디로 없어져버렸습니다. 그 집에 어린애들 넷만 남아서 배를 굶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외할머니가 오지 않을 거 같더라고요. 외할머니댁 앞이 문방구였는데요. 제가 그 집주인분에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할머니가 우리만 남겨놓고 어디론가 없어졌다고 얘기를 하지 않아도 그 주인분은 사정을 아셨던 걸로 기억이 납니다. 조그만 시골동네였으니 소문이 벌써 났었겠죠.


500원을 빌려주셨고요. 학교를 다니는 나만 버스비를 내도 되었었기 때문에 버스 차장님께 물어서 시골 할머니집으로 가는 버스를 다행히 탈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나는 내가 헨젤이 된 거 같았답니다. 숲 속에 버려진 동생을 데리고 낮에 조금씩 버려둔 비스킷조각을 주워 먹으며 다시 자신을 버린 부모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야 했던 헨젤과 그레텔처럼 저는 제 기억을 총동원해 어린 동생 셋을 데리고 버스를 타고 내가 살아야 하는 할머니댁으로 되짚어왔습니다. 원평, 외할머니댁은 원평이었고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김제역 앞에서 내려서 신작로를 걸어 할머니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여름의 긴 해가 뉘엿뉘엿 지려하고 있었습니다. 신작로옆 밭에서 들일을 하던 할머니가 우리를 발견하고 멀리서 달려오며 통곡을 하셨습니다.


어린것들이 거지꼴을 하고 신작로를 걸어 집을 찾아왔으니 놀래기도 하셨을 겁니다. 내 등에 업힌 어린 막내여동생을 건네받고 눈물을 머릿수건으로 훔치며 신작로 흙먼지에 꼬질꼬질해진 우리 남매와 함께 대문도 없는 할머니집으로 다시 찾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술에 늘 취해있던 아빠는 다행히도 집에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빠가 집에 술에 취해있으면 어쩌나 조마조마했었거든요.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닙니다. 너의 동생들을 네가 큰딸이니까 챙겨야 한다고 나에게 호통을 치며 가리킨 게 아니었으나 나는 그날, 그 신작로를 걸어오면서 너무도 자연스럽 게 나의 동생들을 내 등에 업게 되었습니다. 다 커서 성인이 되었어도 동생들은 늘 나에게 안쓰러운 대상으로 만 남아있어서 내 형편 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도의 한계치를 늘 시험하며 그 아이들에게 보호자가 되어주려 애를 쓰며 살았었으니... 그런 고소장이 날아오고 당연히 나의 정신이 갈가리 찢길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나는 그 사건 이후로 사람들을 만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자조 섞인 냉소가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세상에, 누가 나를 버리지 않았지? 나는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형제에게도 이런 취급을 받았는데. 내가 누굴 믿을 것이며 누굴 만날 것인가’


나에게 타인이 다가와 친해지려 하는 것도 귀찮았고 내가 누구를 좋아해서 친밀한 감정을 나눈다는 게 너무도 무의미했습니다. 그렇게 내 마음을 언 땅 속 깊이 꽁꽁 숨겨버렸습니다.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았고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그렇게 살았습니다. 내 귀한 마음이 그렇게 빛을 잃고 언 땅 속에 파묻혀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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