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나지 않는 작은 성과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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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에서 이어집니다.
나는 아직 똥 멍청이인데 벌써 박사과정 고년차가 되었다. 학교에서는 이제 슬슬 졸업을 준비하라고 한다. (졸업이 늦어지면 내년부터는 펀딩을 안 준다는 공지가 날아왔다.) 그런데 나는 해놓은 게 없는데... 이대로 나가라고요? 너무 당황스럽다. 동기들은 발표도 하고 논문 퍼블리시도 하고 학교 홍보지에도 나오는데 나는 한낱 똥 멍청이일 뿐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나의 지난 박사과정 동안 연구활동이 성공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지난 4년 동안 학회 포스터 발표를 할만한 연구성과를 내지도 못했고, 논문을 퍼블리시한 것도 없다. 보통 학과에서 4년 차에 끝내길 권장하는 프로포절도 끝내지 못했다. 여태 뭐했냐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솔직히 살면서 이렇게 비생산적이고 성과 없는 세월을 보낸 건 처음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는 분명 열심히 했다. 교수님과의 관계도 원만하며, 매주 교수님과 미팅을 하고 매일 논문을 읽고 데이터를 돌렸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코스웍을 끝낸 후부터 정말 나름대로는 열심히 했다. 그런데 아직 나온 게 없다.
내가 유달리 게을렀던가?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자부심 넘치게 부지런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솔직히 딱히 게으르지도 않았다. 판데믹 기간에도 혼자 매일 아침 일어나서 책상 앞에 출근하고, 중간중간에 딴짓을 하긴 했어도 매일 뭔가를 해왔다. 자가격리 기간을 포함해 겨울 한 달간 한국에 갔다 온 걸 제외하면 휴가를 오래갔다 온 것도 아니고 연구를 쉬거나 미팅을 미루지도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면 내가 그렇게 일을 안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열심히 했던 작업들이 다 결과가 좋지 않아 소용없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럼 무능한 건가? 열심히 해도 성과를 못 내는 건가? 연구가 적성이 맞지 않는 걸까? 열심히 해도 성과가 없으면, 재능이 없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박사과정을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교수님이 아직 나를 놓지 않고 있으신 걸 보면 희망이 있는 건 아닐까. 아직 그만 둘 정도는 아닌 걸까?
온갖 생각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다. 자괴감에 빠져서 괴로워할 시간에 그냥 논문 하나라도 더 보고 데이터 하나라도 더 돌려보고 식 하나라도 더 세우는 게 낫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그렇지가 못하다. 그래서 처방받은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입안에 털어놓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분명 성과가 있었다. 새로운 논문을 계속 읽었기 때문에 내 분야에 대한 이해도 더 깊어졌고, 관련 분야의 논문을 읽을 때 더 빠르게 내용을 이해할 수도 있게 되었다. 한 분야의 논문을 이어서 문헌 연구를 하고 스토리를 만드는 스킬도 늘었다. 다만 보통은 2년 차에 코스웍 과정 중에 이 능력을 요구하고 발전시키는데, 나는 솔직히 그때는 잘 해내지 못했다. 이제야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다.
여러 논문을 읽고 생각을 하면서 빈틈을 찾아내고 새로운 연구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일도 처음에는 너무 막연하게만 느껴졌는데 요즘에는 점점 감이 잡히고 있다. 아직 끝난 연구는 딱히 없지만 새로운 연구 아이디어를 몇 개 시작하고 있다. 진행 중이 연구를 어떻게 발전시켜나가야 하는지, 지금 하는 연구의 결과를 어떻게 단단하게 다듬는지도 교수님과 함께 배워가고 진행하고 있다. 답이 안 나오는 연구를 그냥 때려치울 게 아니라 어떻게 방향성을 바꿔가며 뭐라도 되는 연구로 만드는 스킬은, 수업시간에는 배울 수 없고 정말 부딪쳐서 해봐야 하는 거니까. 그러는 과정에 온갖 데이터를 뒤지고 합치고 하다 보니 여러 데이터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고 내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셋도 많아졌다. 작업을 하도 많이 하다 보니 코딩 실력도 늘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냥 조금 늦은 게 아닌가? 그냥... 동기들처럼 빠르지 못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렸을 때도 배우고 이해하는 게 느려서 혼이 많이 났다. 하지만 이해를 완전히 하면 그 후부터는 잘 해내니까 어쨌든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나는 느린 사람인 거고, 연구 활동에도 그런 언젠가는 특이점이 찾아오지 않을까?
그리고 그동안 이것저것 많이 했다. 이수 학점이 가득 차서 더 이상 수업을 안 들어도 되지만 굳이 수업을 몇 개 더 들어서 새로운 방법론도 익혔다. 판데믹 기간 동안 집에만 있었지만 줌으로 미팅도 하고 티칭도 계속하다 보니 영어도 의외로 늘었다. 아직도 능숙한 건 아니지만 예전보다는 내 어휘력이 확장되고 상황에 맞는 표현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발음도 훨씬 좋아졌다는 걸 체감하게 된다.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주말과 휴가를 쪼개서 부업도 열심히 했다. (연구와 조교 일을 주 6일 간한 후, 나머지 1일은 부업에 할애하는 식이다.) 새로운 계약도 나오고 있고 원고도 쌓이고 있다. 이쪽도 나름대로 커리어가 잡히고 있다. 쥐꼬리만큼 이지만 매달 인세가 들어오니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을 것이다.
아직도 많이 불안하고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불신도 크지만, 그래도 조급해하지 않기로 생각해본다.
일단 남 탓을 해본다. 미국의 박사과정이 5-6년 안에 과정을 끝내기를 요구하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런 제도가 문제일 수도 있다. (미국에 포닥이 왜 그렇게 많은지 생각해보면, 박사과정을 5년 안에 끝내는 것이 과연 맞는 제도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독일도 학제가 바뀌기 전에는 디플롬까지 10년까지 걸렸다고 하는데.)
내 시야가 좁나 싶어서 주변도 둘러본다. 나의 미국 박사 동기들은 워낙 잘 나가긴 하지만... 내가 정말 온 세상의 모든 박사과정 생보다 뒤쳐지는 건가?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친구들은 박사과정 수료 후에는 사회 활동을 하고 생계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논문 작업을 해나가기도 한다. 어쩌면 그런 쪽이 나에게 어울리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해보니까 연구는 고시 공부하듯이 빠르게 몰아쳐서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될 때까지 그저 매일매일 성실하게 해 나가야 하는 고된 지적 노동활동인 것 같다. 이게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그러니 나도 그냥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낫지 않을까. 물론 이제는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굳이 빠르게 모든 과정을 완벽하게 이수한 뛰어난 박사가 되어야 하는 걸까. 그냥 얼레벌레 박사가 되면 안 되나? 얼레벌레 박사도 뭐 굶어 죽진 않지 않을까? 그만두는 것보단 낫지 않나?
물론 얼레벌레 박사가 되면 잡마켓에 나갈 때는 경쟁에 밀려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입신양명을 꿈꾸는 사람이 아니다. 박사과정은 정말 순수하게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것이고, 이것을 일종의 희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박사 과정을 통해 연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매우 만족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에 하나 박사학위를 결국 취득하지 못하더라도 세상이 무너질 정도로 절망적이진 않을 것이다. (물론 조금 아쉽긴 하겠지만...)
박사학위 취득 후 얻고 싶은 이득도 딱히 없다. 번듯한 교수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유명 연구소에 가서 돈을 잔뜩 벌고 싶은 것도 아니다. 내 박사과정에 대한 집안의 기대가 그다지 크지도 않고(왜지?), 가족이 나 때문에 큰 희생을 하지도 않았으며(말로 응원을 많이 해줬다.), 다행히 부양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장학금을 꾸역꾸역 받아 온 덕분에 많은 돈을 회수해야 하는 상황도 아니다. 기회비용이 크지 않았으니, 박사 후에도 그냥 연구하는 일로 입에 풀칠하는 삶을 살길 원한다. 물론 이것도 작지만 너무 이루기 어려운 꿈이고, 이 작은 꿈을 위해서 정말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한 선배가 해준 조언을 떠올려본다. 박사 과정 중엔 멍청해도 된다고. 하지만 일단 박사가 되어버리면, 어디 가서 뭘 모르면 문제가 되고 물어보기도 민망하니까 그냥 박사 과정 중에 많이 배우고 질문도 많이 하라고. 그리고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좋은 논문을 만들어 나오라고.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어 CV가 심심한 얼레벌레 박사가 된다면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어 슬프겠지만, 연구 능력 자체가 부족한 얼레벌레 박사가 된다면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것이다. 박사 후에 일을 할 때도 문제가 될 것이고.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매일매일 성실하게 연구하는 데에 좀 더 집중해보기로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과도 성과이긴 하니까. (솔직히 지금 마음이 조급해서 이런 글을 쓰고 있지만 자기 최면을 걸어본다.)
이런 이야기는 사실 부끄럽고, 자랑하고 내세울만한 것이 못된다. 보통은 성공적으로 박사과정을 마치고 좋은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글을 쓸 테니까. 나는 뭘 잘했다고 했다고 이렇게 똥 싸듯이 똥글을 남기는 걸까. 하지만 나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서 글을 써본다. 주변에서는 나같이 개고생 하는 박사 과정 이야기도 도움이 될 거라고 말을 해줬으니,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내년엔 좀 더 자랑할 만한 글을 가져올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