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킹의 빅 퀘스천에 대한 간결한 대답> 11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
내가 처음으로 종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것은 대학생 때였다. 어떤 모임에서 종교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기독교 대학을 나온 한 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교 또는 종교에 대한 희미한 인상만 가지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한 명의 유신론자와 나머지 사람들과의 대화로 흘러갔다.
우리는 다수였기에 대부분의 문제는 어떻게든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우주의 시작, 빅뱅이었다. 그 이후로도 운이 좋았던 나는 종교에 대해 이야기해 볼 기회를 종종 가졌는데 신의 존재를 배제하고 우주의 시작을 얘기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게 느껴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부터 흥미를 가진 부분이 바로 이 질문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빅뱅의 발생을 허용하는 양자 법칙은 신이 창조했는가?" 책은 아주 초반부터 내가 대답하지 못했던 질문에 대해 최대한 설명해 주려고 했고, 나는 그것을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기 위해 이 책을 다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그냥 넘기려고 하지는 않았다. 챗 지피티랑 씨름하며 노트에 그림도 그려가는 등 노력했다. 하지만 물리학을 외면하며 오랜 기간 살아왔기에 총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독후감을 쓸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야기를 풀어볼 수 있는 토픽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 그 모든 것에 대한 고정관념
빅 퀘스천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감명 깊은 점은 물리학에 대한 지식이나 거대한 우주의 비밀을 엿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한 의심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빅뱅에 대해서 얘기하면서도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고정관념이고, 우주가 존재하기 위한 원인이 있다는 것도 우리의 직관에 갇힌 사고일 수 있다. 인간은 인과관계에 익숙하지만, 자연의 법칙에 따르면 빅뱅의 원인이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블랙홀 안에서는 시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 자체는 철학적 문구처럼 느껴지며, 우리 삶에 실재하는 문장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고, 밤 11시를 넘어가는 것을 내가 보고 있으며, 어제가 존재했다는 것을 나는 기억하고, 내가 죽지 않으면 내일 해가 뜰 것을 나는 안다. 이것은 내가 보는 나의 세계이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인간들이 느끼고 경험하는 세계이다. 그래서 나는 블랙홀 안에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텍스트로는 읽지만 진정 이해한다고 할 수 없다.
블랙홀 자체도 이해가 안 되는데 겨우 '블랙홀의 중력은 너무 강해서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텍스트로 머리에 넣었다. 그런데 사건의 지평선 근처에 한 쌍의 가상 입자가 생성되면 한 입자는 블랙홀로 떨어지고 다른 입자는 탈출하여 열복사를 방출한다는 호킹 복사에 이르면, 물리학에서 얘기하는 입자의 크기가 엄청나게 작을 텐데 그게 어떻게 반으로 나뉜다는 것인지. 이제는 텍스트를 그냥 입력하는 것도 쉽지 않다. 입자가 분리될 수 있는 이유를 찾아보니 '양자역학적으로는 허용된다'라고 하니 통탄할 노릇이다.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은 고전 물리학이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이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예측 가능한 결정론적 세계가 아닌, 확률론적의 세계라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경험과 직관에서 벗어나며, 수학적 증명을 곁들이지 않는 경우에는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다.
- 주사위 놀이
<커뮤니티>라는 미드에서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주인공들은 다 같이 한 방에 모여있고, 주사위를 돌려서 각자가 선택한 숫자가 나오는 사람이 피자를 받으러 가는 것이다. 이때 주사위에 따라 6가지 타임라인이 생성되는데, 그에 따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에피소드는 6가지 타임라인에 대해 하나씩 검토하면서 마치 각각이 똑같은 1/6 확률을 가지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이 책에서는 "특정 미래에 대한 특정 확률이 있다"라고 한다. 불확정성의 원리에 기반한 내용인 것 같은데, 우리는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고, 대신 위치와 속도의 특정 조합에 대한 확률을 부여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니 사실상 6명이 피자를 가지러 가는 각각의 타임라인이 발생할 확률은 모두 다르고, 아주 최악으로 치닫는 타임라인의 경우에도 매우 낮은 확률이지만 어쨌든 존재할 가능성은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내용이긴 하지만, 블랙홀이나 다중 역사, 웜홀 등의 내용도 꽤 많이 나와서 무척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미 앞서 흥미를 느낀 많은 이들이 이를 활용해서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 왔다. 조금 아쉬운 점은, 비전공자를 위한 이런 설명서라도 앞서 읽어보았다면 콘텐츠를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영화를 볼 때 스토리만 보는 것이 아니라 미장센까지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커뮤니티> 에피소드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그 악명 높던 <테넷>을 다시 볼 생각이다.
- 왜 내가 물리학을 알아야 할까?
'왜 내가 물리학을 알아야 할까?' 이는 나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11번째 퀘스천이다. 문이과를 이분법적으로 굳이 나눠본다고 했을 때, 내가 가장 어렵다고 느끼는 분야가 바로 철학과 물리학이다(잘 몰라서 하는 얘기가 맞다). 어떤 부분에 이르러서는 '손도 못 대겠다' 싶은 순간이 오기도 하는데 이 포인트가 오히려 그 분야를 배워가는 사람들에게는 즐거운 순간이기도 하다. 막상 손을 대고 휘젓다 보면 뭔가 닿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부터 서서히 도파민이 샘솟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호킹은 너무 친절해서 번역본, 축약 등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 잠깐은 그런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물론 겉핥기이므로 공부가 더 깊어지지 않는 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는 그런 짧은 고진감래 외에도 우리가 왜 과학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었다.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생각해 보면 소수의 과학자와 자본가가 다수의 사람들의 위에 서지 않던가? 호킹은 과학과 기술을 소수 엘리트만 이해하는 세상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어떤 일을 선택하든 과학을 익숙하게 느끼고 자신감을 가질 만큼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디스토피아가 되더라도 피지배층의 입장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는 언더독 역할의 반란군 정도는 되고 싶다. 개고생 하면서 힘들게 살더라도 빨간 약을 먹는 삶을 선택하고 싶다. 거창하게 말하면 그렇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SF 장르의 영화나 책을 좀 더 재밌게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테넷>을 보고 1회 차 때보다 좀 더 재미있다고 느낀다면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들인 시간에 대한 보상은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