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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현 Mar 15. 2020

기다리는 게 싫지 않은 건, 아마 처음

서핑 에세이 [파도의 법칙]

아직 어른이 덜 돼서 그런가 모르겠는데, 기다리는 것을 잘 못하는 편이다. 뭔가 기다리는 게 있으면 자꾸 거기에 신경을 쓴다. 가령 택배는 좀 덜한데, 하고 싶은 말이나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문자가 갑자기 안 온다거나, 45분 이내로 도착하기로 한 페페로니 피자가 도착하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해진다. 오다가 미끄러지셨나, 페페로니가 다 떨어져서 옆집에 빌리러 가셨나 별 생각을 다 한다. 그렇다고 전화를 해서 따지거나, 배달원에게 오다가 미끄러지셨는지 묻거나 하지는 않는다. 일단 오면 웬만하면 다 잊어버리고, '페페로니 피자 맛있겠다. 식기 전에 어서 먹어야겠다.' 하는 생각만 남게 된다. 그치만 기다리는 동안에는 좀 약 오른다고 해야 하나, 뭔가를 기다리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은 기다리기로 데드라인이 뒤로 미뤄지거나, 기다리는 시간이 고될수록 강화된다. 


약 오르는 정도 = 기다리는 시간 x (기다리기 힘든 정도)*10 x (추가된 시간)*100


내 경우는 대충 이런 식이 성립한다.


택배를 기다리는 건 별로 힘들지 않은 이유는 기다리는데 들이는 수고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페페로니 피자를 기다리는 건 조금 수고롭다. 음식을 시킬 때는 보통 배가 고프고, 무엇을 시켜먹을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배고픔이 버프를 받는다. 그런데 만약 45분 이내 도착할 예정이던 배달원이 초보라 우리 집을 못 찾겠다며 집 밖으로 마중을 나와달라고 한다면? 한겨울에 슬리퍼만 신고 나왔는데 집 앞에 한쌍의 커플이 뽀뽀를 할랑 말랑 하는 오묘한 상황이고 나는 기다려야 하는데 자꾸 내 눈치를 본 다면? 이때는 약 오르는 강도가 중간 세기가 된다. 그런데 피자집에서 전화가 와서 가게에 페페로니가 다 떨어져서 옆집에 빌리러 갔다 오겠다고 한다면? 자주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약이 아주 바짝 오르게 된다.


다시 생각해도 약이 오르는 것 같으므로, 시원한 설원을 기억을 해보겠다. 예전에 아마 내 생전 처음으로 눈썰매장을 갔었을 때의 일이다. 나는 눈썰매라는 게 정말 신나는 놀이라고 새삼 감탄했다. 같은 눈썰매였지만 삼촌이랑 아버지랑 눈 쌓인 가야산에서 비료포대로 타던 눈썰매랑은 차원이 달랐다. 중간중간에 박힌 돌멩이에 엉덩이가 멍들 수 있다는 걱정을 할 필요 없이, 풀 가속할 수 있었다. 눈썰매에 달린 끈도 한몫했다. 그걸 당기면 왠지 더 빠른 느낌이 들었다. 비료 포대에는 없는 것이었다. 뒹굴어도 좋았다, 눈이라서.

하지만 항상 너무 짧았다. 썰매를 타고 내려가는 건 순간이고, 다시 타려고 언덕을 오르는 건 너무나 길었다. 가끔 줄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내리막만 있는 눈썰매가 존재한다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꾸준한 취미로 삼기에 눈썰매장의 오르막과 기다림은 너무나 큰 단점이었다. 


다른 거의 모든 것들이 그렇겠지만, 서핑을 하기 위해서도 기다림이 필요한 것 같다. 서핑을 할 시간을 낼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서핑을 할 수 있는 파도를 기다려서 바다에 도착해도 기다림은 끝나지 않는다. 온종일 바다에 나가 있더라도 실제로 파도를 타는 시간은 무척 짧다. 좋은 파도가 충분히 오고 라인업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지 않아도 괜찮은 곳이라도, 밖으로 밀어내는 해안 파도를 피해서 파도타기 좋은 라인업까지 힘차게 가야 하고, 내가 타기 좋은 파도가 올 때까지 발을 움직여서 바다에 떠있어야 한다. 바람이 많이 불거나 희한한 조류가 있는 곳에서는 금세 이상한 장소로 떠내려가기 때문에 꾸준히 팔과 다리를 저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핑을 하면서 기다리는 것은 별로 힘들지 않다. 어떤 때는 기다리는 걸 재밌어하는 자신을 목격하기도 한다. 실제로 파도를 타려면 대략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


언제 바다로 여행을 갈 수 있을지 재어보는 것
그냥 여행을 가는 것
바다에 가는 것
물 위에 가만히 떠있는 것
물에서 노를 저어서 바다로 나아가는 것
바다에 둥둥 떠있는 것
바다에 둥둥 떠서 어떤 파도가 오는지 지켜보는 것


사실 파도타기를 위한 기다림은 왜 싫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적어본 글인데, 가만 보니까 파도타기 위해 하는 일을 적고 보니, 이건 내가 싫어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다. 하나도 힘 들이지 않고 오히려 즐겁게 할 수 있다.


이제야 알겠다. 왜 제대로 된 파도를 하나도 못 탄 날에도 별로 아쉽단 느낌이 들지 않고, 자꾸만 꼬꾸라지면서도 서핑이라는 취미가 오래 지속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를!


갖고 싶은 서핑 용품이 가득했던 만리포 어느 서핑 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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