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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빛 Sep 16. 2020

직장인 임산부의 삶

일 잘하는 직장인 vs. 좋은 예비 엄마


    임신하기 전, 회사에서 나는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일에 욕심도 많고 또 그러면서 업무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 도전적인 업무를 받아 해낸 후에 성취감을 느낄 때도 있었고, 때로는 너무 힘든 업무를 받아 일하면서 짜증이 폭발할 때도 있었다. 회사일은 시간으로 보나 영향력으로 보나 나의 인생에 꽤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임신 후에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제  인생의 정의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임산부 직장인으로 살다 보면 상반되는 두 가지 죄책감에 꾸준히 번갈아가며 시달리게 된다. 일을 잘 못하고 있다는 직장인으로서의 죄책감과, 배 속 아가를 잘 챙기지 못하고 있다는 엄마로서의 죄책감. 비단 이것은 임산부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리라. 배 속에 아기가 생기는 순간부터 아이를 낳아 키우는 내내 이 두 가지 죄책감은 워킹맘에겐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직장인의 삶, Unsplash



[회사에 임신 소식 알리기]


    회사에서 겪은 첫 난관은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리는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부서 이동한 지 약 10개월 만에 임신 소식을 알리게 되었다. 이제 막 부서에 적응해서 본격적으로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게 되는 시점이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자꾸 뭔가 잘못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말로, 어떤 표정으로, 어떤 타이밍에 상사에게 임신 사실을 알려야 하는지 정말 어려웠다. 사람 대 사람으로 보면 부하 직원의 임신 소식은 축하할만한 기쁜 일이지만(실제로 감사하게도 나의 상사는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사실 회사의 입장에서는 대체 인력 계획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골치 아픈 일일 수밖에 없다. 상사에게 소식을 알리며 '죄송스럽다'는 표현을 한 세 번은 한 것 같다. 사실 죄송스러울 필요가 없는 일인데도 그 말이 계속 나왔다. 그런데 더 아이러니하게도 상사에게 '임신해서 죄송하다'라고 말하며 배 속의 아가에게 너무나 미안해졌다. 왠지 내가 배 속의 아가를 부정하는 느낌이었다.  순간엔 아가의 두 귀를 막아주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대신 상사와의 면담이 끝난 후 조용히 아가에게 말해주었다. "아니야 아가야. 네가 찾아온 것은 엄마에겐 오로지 기쁨이야." 우리 아가는 엄마의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임산부 직장인으로서 두 가지 죄책감의 굴레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임산부 근무시간]


    회사에 임산부로 등록하자마자 나는 더 이상 그냥 임직원이 아니었다. 이제 내 이름 앞에 항상

모성보호

라는 네 글자가 붙었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바로 근무시간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임산부는 정규 시간 외 초과로 근무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감사하게도 우리 회사는 이 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회사이다. 게이트 입출문 시간으로 근무시간이 리되기 때문에, 임산부는 하루 8시간을 채우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모두 덮어두고 사무실을 떠나야만 한다. 이 제도는 정말 좋은 제도이다. 이 법적 장치 없이 회사를 다녔으면 아마도 몸이 남아나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고충은 있다. 임산부라고 일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때문이다. 짧아진 근무 시간 내에 할 일을 다 하려니 몸이 너무 힘들었다. 때로는 식사를 거르기도 했고, 화장실도 제때 못 간 채 쉬지 않고 일에 몰두하기도 했다. 퇴근 후 사무실 밖에서 밀린 업무를 보는 적도 많았다. 사실  려면 적당히 할 수도 있었는데, '임신하더니 일을 엉망으로 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더 이를 악물고 열심히 다. 그런데 문제는 내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국가에서 괜히 임산부에게 초과 근무를 금지하는 게 아니다. 일 욕심에 조금이라도 무리를 한 날은 바로 몸에 신호가 왔다. 나의 에너지 대부분을  속에  생명을 만들어내는 데에 쓰고 있으니 몸에 이상신호가 오는 것도 당연했다. 배 통증이 너무 심해지거나 온 몸이 두들겨 맞은 듯이 아팠다. 숨 쉬기가 가빠지는 때도 있었다. 그렇게 몸이 아파오면 그때서야 후회가 됐다. "우리 아가는 괜찮을까. 내가 아가 생각 안 하고 또 무리를 했네."싶어서 아가에게 없이 미안해졌다.  


[단축근무와 재택근무]


    단축근무와 재택근무를 선택할 때도 비슷한 고충을 겪었다. 단축근무란, 임산부가 임신 12주 이전 그리고 36주 이후에 하루 6시간만 근무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임부 보호법이다. 본인 컨디션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일 욕심이 많은 나는 웬만하면 단축근무 없이 회사를 다니고 싶었으나 임신 초기에는 몸이 너무 피곤해서 도저히 8시간을 채워 근무할 수가 없었다. 다들 한창 바쁘게 일하는 4시에 혼자 유유히 사무실을 빠져나오려니 너무 민망했다. 임신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기도 했지만 일찍 퇴근해도 뭐 대단한 걸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 도착하면 몰려오는 피로감에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잠만 잘 뿐이었다.


    재택근무를 신청할 때는 더 힘들었다. 임신 중 코로나 바이러스가 심해지며 우리 회사는 임산부에게 재택근무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었다.  속에 아가를 생각해서 바로 재택근무를 하고 싶었지만, 의무 사항이 아닌 선택 사항이 되니 결정이 어려워졌다. 같은 부서에 있는 다른 임산부 동료 한 명은 눈치가 보인다며 재택근무를 안 하겠다고 했다. 나도 그냥 재택근무를 하지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재택을 선택하면 확실히 업무 진행에 지장이 많을 것 같았다. 고민을 털어놓자, 지인 한 명은 나를 심하게 질책했다.

"아가를 생각해야지. 지금 회사를 생각할 때니? 회사는 아무것도 책임져주지 않아. 너 면역력도 지금 약한 상태고, 코로나 걸려도 약도 못 쓰고, 고열은 태아에 치명적인데 어떻게 하려고 해?"

모두 맞는 말이었고 나를 위하는 진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도 사정이 있는 건데 너무 질책을 받으니 의기소침해졌다. 그리고 반대로 재택근무를 희망하는 임산부들을 질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쩌다 회사 익명게시판을 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이런 댓글을 발견했다.

"임신한 게 벼슬입니까. 코로나가 무서우면 재택근무 말고 회사를 그만두거나 무급으로 휴직을 하세요. 일은 하기 싫은데 돈은 벌고 싶습니까."

나는 코로나로 우리 아가에게 영향이 있을까 봐 무서울 뿐인데. 일을 안 하고 싶은 건 전혀 아닌데. 저 사람 의견의 옳고 그름의 여부를 떠나, 재택근무하려는 나를 이렇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이런 두 가지 상반된 의견들을 보며 나는 선택이 무척 괴로웠다.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할 것 같았다. 기나긴 고민 끝에  주중에 일부만 재택근무를 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렸다.  좋은 소리를 듣기 싫어 일은 오히려 재택근무 전보다 많이 더 열심히 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매 순간 두 가지 죄책감에 시달린다.


[임산부 스트레스]


    직장에서 업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에도 난 자유롭지 못하다. 하루는 엄마와 통화하다가 회사 일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받는다고 한탄을 했더니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스트레스 받으면 안 돼. 네가 느끼는 것 아가도 그대로 느껴."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가를 생각하면 은 생각만 하고 싶다. 보통 때라면 "맞아 맞아. 긍정적인 생각만 해야겠다 엄마."라고 힘을 냈겠지만,  날은 왠지 모든 것이 짜증 났다. "아니 내가 스트레스 받고 싶어서 받나? 회사 다니면 스트레스 받을 수도 있지. 나는 아가에게 스트레스를 느끼게 한 죄인인가?"라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스트레스 지수가 더 올라가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뭐라도 사 먹으려고 옆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평소 나의 넘버원 스트레스 해소제였던 맥주 캔들이 4캔에 만원 표시를 달고 웃고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먹을 수 없었다. 단거라도 사 먹으려고 했더니, 과자 칸에 맛있는 건 죄다 초콜릿류의 과자뿐이었다. 오늘 카페인 할당량을 이미 다 섭취해서 (임산부가 하루 200mg 이상의 카페인을 섭취하면 태아에게 위험하다) 그 날은 더 이상의 카페인은 먹을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스트레스 받는데!!! 스트레스를 받아서는 안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해도!!! 먹을 수 있는 것도 없다!!!!!! 난 편의점에서 혼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순간엔 그냥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너무 서러웠다. 임신 중 호르몬 영향도 있었으리라. 나중에 엄마가 이야기해줘서 깨달은 사실이지만, 임신 중 스트레스 받을 때는 편의점은 가는 게 아니다. 그럴 때는 빵집에 가야 한다. 이 날 빵집에 가서 딸기 타르트나 치즈케이크를 사 먹었다면 금방 스트레스가 풀렸을지도 모른다. 그걸 몰랐던 이 날의 나는, 퇴근한 신랑이 토닥토닥 어르고 달래줄 때까지 계속 어린아이처럼 울고 또 울었다.

    


    사실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기 전에 남 탓도 많이 다. 조금 더 임산부를 효과적으로 보호해주지 못하는 회사를 욕하기도 했고, 이 모든 과정을 여자만 겪도록 인간을 창조한 조물주에게 원망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고충과 죄책감은 나에게서 비롯되었다. 무엇이든 대충 하지 못하는 나의 골치 아픈 성격, 그리고 직장인으로서의 프로페셔널리즘과 예비 엄마로서의 모성애 중 어느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욕심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아기의 건강만을 생각해서 임신을 아는 순간 바로 직장을 그만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커리어를 쌓기 위해 아예 아이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죄책감 굴레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물론 스웨덴 같이 여성의 출산과 육아에 대한 정책이 잘 갖춰진 국가에서는 이런 죄책감을 덜 느낄 수는 있을 거다. 그러나 그곳이라 한들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일이 쉬울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은 언제나 어려울 수밖에 없다. 둘 다 잘하고 싶은 내가 잘못된 걸까? 둘 중 하나는 어느 정도 포기를 해야 하는 걸까? 늘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이 글의 결론을 "임산부 직장인을 보호하는 더 많은 법률과 제도가 생겨야 한다."라는 식으로 내고 싶지는 않다. 사실 우리 회사만 해도 복지가 좋은 편이라 한국의 다른 워킹맘들에 비해 이미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겪는 죄책감과 고충은, 제도적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마음가짐을 바꾸며 해결해야 . 그나마 지금은 임산부로서 법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이 정도이지, 출산 후 본격적으로 육아와 회사를 병행하면 더 힘들어질 것이다. 앞으로 아마도 평생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제, 부디 내가 현명한 해결책들을 찾아 나가기를 바란다. 해결책은 둘 중 가지에 욕심을 조금 덜어내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두 가지의 죄책감이 두 가지의 자부심으로 바뀌는 것일 수도 있다. 아직도 나는 고민과정 속있기에, 이 어려운 과제는 지금보다 훨씬 성숙해져 있을 미래의 나에게 넘겨본다. 결국은 세상 제일 애매한 결론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다. 더 많은 경험 후에 더 좋은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현명한 결정을 내릴 미래의 나에게 큰 소리로 파이팅을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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