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의 밤...> 들어가는 말
강경화 외교부 장관처럼, 멋있는 삶을 누구든 안 꿈꿔봤으랴. UN에서 일하던 시절 이것이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아시아인이고, 한국인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겪는 것인가 질문해본 적 있다, 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일이 잘 풀린다면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고, 일이 잘 안풀린다면 그런 생각들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상대의 말을 두, 세번 곱씹지 말라고 했다. 성공한 사람이 편견을 극복해 온 멋진 말과 서사. 그러나 나는 별로 노력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억울하고 울컥하기만해서, 맥주나 와인을 잔뜩 사서 마셔버리고는 새벽에 쓰린 속과 헛헛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런 실패한 유학 경험기를 다루고 싶었다.
분명 홍세화는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에서 프랑스인들이 ‘똘레랑스’가 있다했다.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 편>에서 프랑스인들이 가난해도 세 가지 음식은 꼭 먹고 다섯 가지 코스는 기본이라는 부분을 읽으며, 나는 그들이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대학은 평준화 되어 있고, 아이를 낳으면 지원금을 주며, 월세를 낼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줄 뿐더러, 비싼 월세에 쫓겨나지 않도록 세입자를 보호하는 제도도 있다했다. 이런 쏟아지는 설명들 속에서 프랑스는, 모두에게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고 살기 좋은 환경이라고 믿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현실은 어떤가? 레스토랑에서 앙트레-쁠라-디저트 세 가지 코스를 다 시키는 프랑스인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일반’ 대학은 평준화되어있으나 대학 위의 대학 ‘그랑제꼴’이 존재한다.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는 ‘체류증’이 있어야 하는데 체류증을 받으려면 적어도 3달 전부터 인터넷으로 첫 번째 ‘항데부(만남)’을 준비해야 하고, 준비해야 하는 서류 목록에는 6개월치 이상의 생활비가 담긴 잔고 증명서가 있어야 하며, 그런 서류들을 꾸역꾸역 준비한 첫 번째 만남에서 불법 체류자가 된 듯한 모멸감도 견뎌내야 하는데, 그렇게 신청한 체류증은 적어도 1달은 걸려야 손에 쥘 수 있고, 그마저도 운이 없으면 몇 번이고 거절당하는 일이 발생하고-아무도 이유는 모른다-, 이렇게 만들어진 체류증이 모든 서류의 기본이 된다. (은행, 보조금, 보험 등을 얻기 위해 이를 반복한다.) 여담으로, 인터넷으로 항데부를 신청할 수 있는 파리는 매우 운이 좋은 편이며, 파리 외곽의 지역에서는 항데부 날짜를 받기 위해-그렇다, 면담도 아니고 항데부 날짜를 위해!- 새벽 5시부터 줄을 서야 한다. ‘합법’적으로 존재하는 과정은 이토록 고난하다.
월세를 지원해주고, 세입자를 쫓아내기 힘들기 때문일까. 월세방 얻는 것도 미션임파서블이다. 통상적으로 집을 얻기 위해서는 ‘보증인’이 필요한데, 혈혈단신 도착한 프랑스에서 본인의 재직증명서나 3개월 치 (얼마 이상의) 월급명세서를 선뜻 내주며 기꺼이 보증을 서줄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유학생 중에는 집을 구하는 사이트에서 장문의 구구절절 편지를 써서 집을 구했다는 사람, 엘리베이터 없는 6층을 매일 오르락내리락 하는 하녀방에 묵으면서도 100만 원의 월세를 내는 사람, 정부지원금을 받지 못하는 한국인의 집이라도 운 좋게 구한 사람 등 집 구하는데 저마다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다.
‘셰익스피어 인 컴퍼니’에서 재회한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처럼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고, 퐁네프의 연인들처럼 파리의 그 멋진 풍경들을 배경으로 낭만적인 사랑을 나누고, 나 자신은 아멜리에처럼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것만 같았지. 도로를 달리는 차에서 고딩들의 기분 나쁜 야유를 맞이하거나 우버를 타고 가다 다른 유색인종에게 뜬금없는 세레나데를 듣거나 아시아에 갔다온 적 있는 60대 할아버지의 데이트 신청을 받는 게 로맨스의 전부일 줄 누가 알았을까.
모두가 비루한 현실을 잊기 위해 판타지를 꿈꾸고 산다. 매우 단편적인 모습에서 기원한 환상들 때문에 많은 이들이 해외로 향하는데, 파리는 그 환상의 도시 중에도 항상 원탑에 속한다. 나는 지독하게 ‘파리 증후군’*을 앓았다.
나는 파리에 있을 때 줄곧, 한국 책방을 여는 상상을 하곤 했다. 한국어로 된 책으로 전공서라도 구할 수 있는 서점, 한국어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시집으로 마음이 몽글몽글 해지고 소설책과 철학책을 읽으며 다양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살롱, 막막하고 힘든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할 수 있는 구심점을 열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 공간이 누구보다 나에게 너무 필요했으니까.
이 책을 시작으로, 파리를 꿈꾸고 스쳐간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다. ‘파리’는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인지,‘어떤 판타지’ 때문에 파리를 꿈꿨는지, 파리는’판타지’였는지, 실제로도 만족스러운 곳이었는지, 그 곳에서는 저마다 어떤 사연이 펼쳐졌는지. 또 다들 나만큼 힘들었는지, 그런데 왜 서점의 책들은 파리가 낭만적이라고만 얘기하고 있는지, 싸구려 와인을 마시면서 미친듯이 외로워 한 건 나뿐이었던건지, 그걸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건 무엇인지, 프랑스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변화시켰는지 등. 많은 사람들과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 파리증후군이란, 다른 문화에 대한 적응 장애의 하나이며, 문화 충격의 하나이다. 프랑스를 ‘유행의 발신지’ 라는 이미지로 동경해서 파리에서 살기 시작한 외국인(주로 일본인)이 현지의 관습이나 문화 등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 정신적 균형감각이 붕괴되고, 주요 우울증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는 상태를 가리키는 정신의학 용어이다.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