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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KCHIC Feb 18. 2018

08

<카페에서>

2017, Synaesthetic Imagery, Samsandong, Ulsan



뭐부터 해야 하나.



 책 사이에 꽂아둔 A4 용지 두 장을 펼쳐본다. 첫째장 상단에 <해외여행 준비물 체크리스트>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다. 네모 체크 박스들 옆으로 대략 10 포인트 정도 되는 글씨들이 차곡차곡 제 자리에 정렬되어 있다. 여권부터 상비약까지,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적혀있는 셈이다. 이 리스트를 모두 체크하면 떠나도 될까.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아도 될까. 사표는 이미 냈다. 지난주엔 송별회도 두 차례나 했다. 내 손으로 낸 사표인데 내 자리를 잃었단 기분이 드는 건 왜 일까. 다달이, 두둑하진 않지만 마음 한 구석 든든했던 월급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기 때문일까. 대학 4년, 인턴 2년의 시간들을 바친 경력이 아까워서 일까. 아니면, 둘 다 일까.


 퇴사의 이유가 단순히 세계일주를 떠나기 위함이란 걸 전해 들은 동료들은 처음엔 용기가 대단하다며 나를 치켜세우다가도, 이내 다녀와서 어쩔 생각이냐며 나의 무모함을 힐난했다. 떠나는 건 나인데 주변인들의 떠들썩한 반응 때문에 나의 선택이, 그 선택에 대한 나의 신념이 자꾸만 균형을 잃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주변인들이 뭐라 하든 나는 다음 주에 떠난다. 이미 티켓팅과 숙박 예약 및 환전이 다 끝난 상태다. 어머닌 뭘 그렇게 급하게 준비하냐고 하셨지만, 이번이 아니면 나의 닻은 영영 사회란 항구에 정박해 그저 지평선을 바라만 보는, 심심하고 한심한 인생을 살 것만 같았다. 무서웠다.


 입사 3년째, 정시에 출근하고 잦은 야근을 하던 어느 날, 지하철도 끊긴 시간에 회사를 나섰다. 그리고 택시를 잡아 탔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50여 년이 지나더라도 지금의 삶이 별로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자리와 환경이 바뀔 뿐 그 주체이자 알맹이인 내가 바뀌지 않는 한 똑같은 삶을 살 것임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문득 아쉬워졌다. 어차피 똑같이 살아갈 인생 딱 일 년은, 딱 일 년 정도는 평소와 달리 살아도 되지 않을까. 좀 늦어지더라도 그 방향은 바르게 맞춰지지 않을까. 아니 더 솔직해지자면, 여행을 통해 혹여 그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마음 한 켠에 움텄다.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가득 채워졌다.


 그때부터인 것 같다. 그때부터 난 회사에 쏟을 열정을 세계일주에 모두 쏟았다. 업무 중에도 끊임없이 서치 하고, 쉬는 날엔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과 어울리며 정보를 얻었다. 생각보다 다양한 인생과 경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나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나, 가슴이 시키는 일을 빠르게 행동으로 옮긴 이들. 쫓고 싶은 동경의 대상들. 그리고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쫓기고 싶은 그런 원인 모를 욕심들.


 다녀온 여행을 추억 삼아, 연료 삼아 나머지 인생을 열심히 살겠단 원대한 다짐 따윈 애초에 없었다. 누구든 꿈꾸는 버킷리스트인 세계일주 나는 못해보나, 라는 치기 어린 마음이었고, 퇴근 후 챙겨보던 <세계테마기행>에 나오던 곳을 직접 밟고 싶단 뜨거운 아드레날린이었으며, 수많은 여행자들 무리에 뭉쳐 인생과 사유를 공유하며 기존의 나에게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통로, 그것이 전부였다.


 옆 테이블을 보니 여행을 떠나는지 두 여자가 노트북을 켜놓고서 여행책을 이리저리 뒤적거리고 있었다. 얼핏 엿들어보니 밤도깨비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금요일 밤에 갔다 일요일에 돌아오는 여행. 어쨌든 정해진 기간이 존재하는 여행. 그냥 그 기간 동안 충분히 즐기다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여행 전과 후 내 인생이 전혀 피해 입지 않는 - 아니 사실 경제적 피해는 조금 있는듯한 - 안전한 여행. 하지만 나는 아니다. 사실 지금 많이 두렵다. 어떤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는 꽤나 불친절한 여행. 정확한 루트도, 계획도 세우기 힘든 위험한 여행. 하지만 확실히 알고 있다. 안전하다는 건 분명한 안정감을 주지만, 덧붙여 한 곳에 고여 있단 자괴감까지 건네받는 것을. 굴곡 없는 평지를 걸으며 삶을 후회로 점철하느니, 조금, 아니 좀 많이 굴곡 진 산맥과 산맥 사이, 강과 바다를 건너며, 견뎌내며, 살아있음에 감사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집중하여 준비물 리스트로 다시 시선을 옮긴다. 사람들의 온기로 가득한 아늑한 이 카페의 공기가 갈등과 갈등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나의 결심을 예열한다. 얼마 남지 않은, 그래서 감사한 한국의 밤이다.


#공간그리고사람 #BYPAKCH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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