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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oungKim Jan 12. 2021

"내 안의 아우성_내 마음도 육아처럼"

#5. 질투에 대하여



시기와 질투는 개인의 마음속에 내밀하게 숨겨두는 감정이다.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들키면 수치심이 인다. 수치심은 치욕을 받지 않으려는 방어기제이기도 하다. 스스로 남을 의식하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 조절하려는 심리에서 나오는 감정이라 했다. 그런 면에서 수치심이라는 마음에도 분명히 긍정적인 면이 있는데 내가 내 마음속의 질투를 오픈하여 얻는 수치심에는 어떤 긍정이 있을까. 나의 시기와 질투심을 말하려니 부끄러워 사설이 길었다. 각설하고 나의 못남을 고백하고자 한다.








나는 잘난 남편을 둔 여자들을 질투한다.

로맨틱한 선물도 주고 이벤트도 종종 하고 집안일도 잘 돕고 다정하고 돈도 잘 버는 남편을 둔 아내들을 질투한다. 이 중 한 가지만 갖추어도 질투 난다. 분명 어딘가 문제가 있을 거라며. 겉보기엔 좋아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문제가 있을지 모르며, 저 좋은 모습이 평생 가겠냐며 마음속으로 비웃는다. 겉으로는 "와~ 부럽네요." 하면서. 아니 겉으로 하는 이 말이 진짜 본심이면서 안 부러운 척 내 속마음을 속인다. 


돈 많은 부모를 둔 사람들을 보고는 부러워하면서도 그 많은 돈은 부모의 것이며 그것에는 모두 대가가 따르는 거라고 생각해버린다. 경제적인 도움을 자식이 받게 되면 얽매일 수밖에 없는 거라며 나는 독립한 어른인 듯 혼자 젠체한다. 그러나 건강한 부모를 둔 사람들은 질투하지 않고 부러워만 한다. 분명 부러운데 심술궂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부러울 뿐 질투의 감정이 나오진 않는다.


어떤 땐 부러워하며 어떤 땐 질투한다.

어떤 땐 부러워하다가 질투로 감정이 흐르고, 어떤 땐 부러워만 하며 끝난다.

무슨 차이일까. 

왜 돈 많은 부모는 부러워함과 동시에 질투하면서 건강한 부모는 부러워만 하고 마는가.


다른 상황을 대입해보았다. 아이 낳고 아이가 안겨만 있던 시기에 세수도 잘 못하고 살던 그때에는 화장하며 구두 신고 다니는 여자들이 너무 부러웠다. 나도 그랬던 때가 있었는데... 언제 다시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며. 그러나 그렇게 부러워만 했지 저 여자들에게서 어떤 결점이나 결핍을 찾아보려 하진 않았다. 굳이 저 여자와 나를 비교하고 나의 우월함을 찾아내려 하지 않았다. 그냥 부러웠다. 


또 생각해보았다.

나는 지금 전업 맘이다. 그리고 우리 독서모임에는 또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 중에 직장을 다니는 엄마도 있고 전문 직종도 있다. 그들이 부럽지만 질투하진 않는다. 그들은 직장생활에 만족하고 돈도 잘 벌고 아이들도 잘 키우고 있어 부럽다 생각하지만 거기서 끝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 일이 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도 직장생활을 해 봤고 하고 싶지 않고 그들의 직종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부러워는 하나 질투로 감정이 연장되지 않는 경우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이렇다.

나는 전업맘을 선택했고 지금 상황을 만족하기에 그들의 경제력과 커리어는 부럽지만 '직장생활' 자체는 부러워하지 않는다. 아가씨로 14년을 홀로 살았기에 누릴 만큼 누렸고 외로울 만큼도 외로웠다. 직장생활도 10년 넘게 했기에 징글맞게 했기 때문에 더는 바라지 않는다. 그들의 일부분은 부럽지만 전체를 바라지는 않는다.

건강한 부모 부분에 대한 것은 다른 문제다. 이런 경우는 절대로 건강한 부모를 가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질투조차 낼 수 없는 거다. 이건 또 슬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정리해보니 이미 경험했던 것, 충분히 해서 더 이상 미련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질투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가진 것을 응원해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절대로 이뤄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질투하지 않는다. 백만장자를 보고 우리가 질투를 느끼진 않지 않은가. 물론 본인이 십만 장 자라면 모를까. 비교 대상이 나와 별다를 것 없는 유사 수준의 사람이라면 질투가 더 폭발한다.

즉 어느 정도는, 정말 힘들어도 가능성이 있는 무언가를 갖고 싶은, 그러나 갖기 어려울 때에 우리는 질투를 느낀다. 


시기와 질투는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의 반향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싶은 마음의 투영이다. 

예전 신분제 때와 다르게, 지금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정말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믿기에 비교 대상이 훨씬 많다. 그렇기에 질투 대상도 너무 많아서 우리는 끊임없이 질투 상황에 놓인다. 일거수일투족이 SNS로 전파되는 요즘 질투하기도 너무 쉽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경쟁 속에서 남을 의식하며 살아온 우리는 마음속으로 비교하지 않으려 해도 남을 본 순간 자동적으로 비교하고 질투 거리를 찾게 된다.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다. 음료 버튼을 누른 순간 음료가 나오는 것처럼. 자판기를 본다. 남을 본다. 돈을 넣는다. 비교를 한다. 음료가 나온다. 질투가 나온다.


질투는 갖고 싶다는 욕망과 가질 수 없다는 현실의 충돌이다. 뇌에서는 갖고 싶다 와 가질 수 없다는 두 가지 의견이 충돌한다.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그 타협점이 질투를 하며 상대의 흠이나 단점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질투 안 하고 싶어도, 비교를 안 하고 싶어도 자동적으로 비교하게 되고 질투라는 감정이 튀어나오는데 어째야 하나. 그냥 그 감정을 느끼며 패배감을 느껴야 하는 것인가.

그러고 싶지 않다면 무엇을 해야 하나.








질투심은 우리의 진화 과정 중 필요해서 생겼을 것이다. 더 잘 살아남기 위해 생긴 감정일 것이다. 수렵시대에 생긴 이 질투심이라는 유전자 덕분에 우리는 더 잘 생존해왔을 것이다. 저 사람이 갖고 있는 돌칼이 맘에 들고 그의 사냥 실력이 질투 난다면 그건 내가 그보다 더 낫고자 함이 아니었겠는가. 그래서 그 사람을 물리치고 내가 일인자가 된다면 더 많은 이성과 부족민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겠지. 그 시대에는 폭력이나 비열한 수법으로 질투 나는 사람을 물리쳤을 수 있지만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남을 어찌할 수 없다면 결국 내 내면을 봐야 한다. 내가 뭘 원하는지 내 마음의 목소리를 들어주어야 한다.

욕망이 아니라 그 내면에 내가 왜 이런 마음을 일으키는지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질투를 느낀 다는 것은 내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달라는 소리니까.


예쁜 몸매의 아가씨가 활기차게 걸어가고 있을 때 그 여자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고 그 여자는 아직 철이 덜 들었을 거라는 혼자만의 망상을 한다면, 이 생각은 내가 저 아가씨의 어떤 점을 부러워함에 있다. 어떤 점일까? 날씬한 몸매? 활기찬 에너지? 아니면 자유로움? 질투에서 내 욕망을 들여다보게 되면 나의 상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게 뭐였을까? 아마도 그 활기찬 에너지와 자유로운 분위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의 저 에너지가 부러운 것인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 느낌이 부러운 것인가? 나에게 그 느낌을 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어떤 때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을 갖는가?를 생각해볼 때다.


돈 많은 부모를 둔 사람들이 부럽다면 왜 부러운가 생각해볼 일이다. 단순히 돈이 많길 바라는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지금 당장의 이 구질구질한 현실을 부모의 돈이 해결해주리라는 기대를 갖는 것인가. 그렇다면 돈 많으면 무엇부터 할 거지? 집 사고 차 사고 말고. 당장 돈에 얽매이지 않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아니면 돈 때문에 굽신굽신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건 아닌가. '돈 많은 부모'가 부러운 게 아니라 '돈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삶'이 부러웠던 것은 아닐까. 그럼 얽매이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가?를 생각해볼 때다.

위 두 가지는 나의 생각의 흐름대로 적어본 것으로, 각자의 상황은 다를 수 있다. 끊임없이 왜 그런 걸까를 생각해보고 생각해보면 진정한 나만의 욕구, 내가 진정 생각해볼 것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작년 언젠가 서평이 매일같이 올라오는 어떤 엄마를 질투한 적이 있다. 그녀도 아이 엄마 이건만. 서평이 자주 올라오고 심지어 책 사진도 스타일리시하며 내용도 잘 쓰니 공감도 많고... 그래서 이 엄마는 아마도 주위에 친정엄마가 아이를 잘 돌봐줄 거야 하는 혼자만의 스토리를 만들어 상상하곤 했다. 나는 그렇게 매일 서평을 올릴 수도 없으며 그렇게 사진을 잘 찍지도 못하고 내용도 중구난방이니까. 내가 그녀처럼 하려면 나는 기를 써서 전력 질주해도 힘들 것 같은 상황이니까. 내 멋대로 그녀의 스토리를 만들어 합리화를 한 이면에는 나도 저렇게 잘 쓰고 싶고, 많이 쓰고 싶다는 마음. 나도 많이 읽고 맘 편히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결론은?

그냥 어쩔 수 없는 건 포기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선에서만 계속했다. 그녀의 서평이 올라올 때마다 질투가 슬쩍 나왔지만 그렇군 하고 넘기고는 다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한다. 하지만 내 마음은 알아준다. 감정 먼저 받아준다. 아이를 키우는 육아 방법과 같다. 감정부터 공감해주고 그다음이 방법을 찾는 것이다.


내 감정부터 공감해준다.

그래 저게 잘하고 싶구나. 저게 갖고 싶구나. 저렇게 되고 싶구나.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러니까 일단 이것부터 하자라고. 아이만이 아니라 나 역시도 스스로를 공감해주면 마음도 누그러든다. 지금 내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도 없지만 그 엄마를 그다지 질투하지 않는다.


공감 후에는 할 수 있는 걸 찾는다.

당장 서평 능력이 느는 게 아니고 대신 아이 봐줄 사람이 없으니 있는 시간에서 최대한 해보는 거다.

자유로운 아가씨들이 부러우면 방법은 남편밖에 없는 거고, 돈 많은 부모가 부러우면, 아니 그 경제적 자유로움이 부러우면 돈을 벌 방도를 모색해야 하고(돈 공부 시작), 자주 가는 여행이 부러우면 여행 갈 방법이나 대리 여행이라도 가야 하고.(여행 티브이 같은 거. 세계 테마여행 같은)

그렇게라도 해주면서 나를 다독여준다.

그리고 나를 또 알아간다.


결국 내가 어떤 상황에 대해 드는 감정은 나의 목소리다. 내 안에서 알아달라고 소리치는 아우성이다. 그렇기에 같은 상황에 다른 감정을 느껴 누구는 질투를 일으키고 누구는 그냥 웃고 넘기는 것이다. 우리 내면도 아기들처럼 관심을 쏟아주고 사랑을 주고 귀 기울여줘야 성장하기 때문에 알아달라고 소리친다.


나는 지금 무엇에 질투를 느끼는가?

내 마음이 무엇을 알아달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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