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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센짱 Oct 30. 2022

키보드 전쟁

2020년 8월이었다. 집 밖에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 햇볕에도 불구하고, 집 안 곳곳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따뜻하고 안락한 인테리어가 무색하게도, 거실엔 둘 이상 좀처럼 모이지 않았다. 앞으로 한 달 후, 9월 16일이면 우리가 후암동으로 자리 잡은 지 1년이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과연 1주년을 기쁘게 기념할 수 있을까? 기념과 축하는 무슨, 저주를 퍼붓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같이 살면 싸우지 않냐고? 당연히 싸웠다. 둘이서만 사는 부부끼리도 갈등이 있는데, 우린 오죽하겠는가. 크고 작은 갈등을 겪었는데, '키보드 전쟁'은 우리 커뮤니티 역사상 가장 큰 갈등이자 그만큼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집안의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사소한듯 하면서도,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에서 시작된다. 이 땐 기계식 키보드가 문제였다. 





우리 집 거실엔 거실이라면 응당 있어야할 소파와 대형 TV 외에도 커다란 작업용 책상도 있다. 크리스마스 파티 같은 행사가 아니라면 여기서 식사를 하진 않는다. 식사를 위한 다이닝 테이블은 주방 옆 공간에 따로 비치되어 있다. 소파와 반대편 면에 위치한 아카시아목 책상은 꽤 커서 4명이 동시에 작업할 수 있다. 소파의 사이즈나 코워킹 구역의 사이즈나 비슷비슷 대등하다. 오로지 휴식 하는 공간도 아니고, 일하는 사람들 만을 위한 공간도 아닌 2중 정체성을 지닌 거실은 그때 그때 그 공간의 사람들의 암묵적 합의에 따라 얼굴을 달리했다. 어떨 때는 모두 진지한 얼굴로 업무를 하고 있다가, 어떨 때는 모두가 한자리씩 차지하고 넷플릭스를 보다가, 어떨 땐 누군가 작업을 하는 동시에 누군가 소파에서 널부러져 있기도 했다. 


엄격한 룰이 필요 없었던 건 누구에게도 거실이 유일한 업무 공간 선택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에겐 다른 옵션이 존재했다. 창업가인 A는 참여하고 있던 창업 보육 프로그램의 의무사항으로 강남 특정 공유 오피스에 출근해야 했고, B는 어디에서나 일해도 상관이 없었는데 거실만큼이나 카페에 나가 일하는 걸 좋아했다. C와 나는 재택이 불가능한 직장인 노예였기에 퇴근 하고 온 주중 저녁 시간 또는 주말에만 거실 코워킹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 해 여름 새로 우리집 식구가 된 진하는 주로 집에서 일하는 파였다. 어느날 그가 책상에 앉아 세팅하는데 못보던 키보드를 꺼냈다. 레트로한 디자인이 귀여운 키보드는 보통 키보드보다 차칵차칵 하는 소리가 더욱 크게 나는 기계식 키보드였다. 그전에 살던 집에서부터 애용해오던 물건이었는데, 이제야 짐을 정리하고 꺼낸다고 했다. 기계식 키보드 특유의 소리가 집중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단다. 다만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다. 


션은 완전히 반대였다. 반 정도는 거실에서, 반 정도는 카페에 나가 일하는 션은 기계식 키보드의 소리가 괴로웠던 모양이다. 다만 바로 이야기 하긴 어려웠던 모양인지, 다음 타운홀(가족회의)가 되어서야 그는 그 이야기를 꺼냈다. "기계식 키보드 소리가 나한테는 좀 괴로워. 이용을 자제해줬으면 좋겠어."  


진하는 떨떠름해하는 얼굴을 하면서도 알겠다고 했다. 이후 션이 거실에 일하러 내려올 때마다, 진하는 다이닝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이닝룸과 거실은 꽤 거리가 있어서 소리가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닐 거라 생각한 거다. 진하 나름의 배려와 존중의 제스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션에게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았다. 참을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서자 션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하가 있는 다이닝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공용으로 비치되어 있던 다른 키보드를 손에 들고선. 

  

“이걸로 좀 바꿔서 써줘.” 

션 나름대로는 배려를 담은 요청이었다. 하나, 안타깝게도 또 한 번 배려의 마음은 상대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배려는커녕 오히려 반대로 읽히게 됐다. 


“션이 키보드를 '신경질적'으로 '들이밀어서' 당황스러웠어.” 

진하는 짜증스럽고 불공평하다 생각했지만, 부러 불화를 만들고 싶진 않아 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문제는 일단락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계식 키보드를 좋아하는 것은 진하뿐만이 아니었다. 


2020년 8월, 코로나가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가능한 모든 조직들이 재택으로 전환했고, 머피가 참여하고 있던 창업 인큐베이션 프로그램도 예외가 아니었다. 덕분에 주중 낮시간에는 보기 어려웠던 그와 하루 종일 함께 하게 됐다. 언제 다시 오피스를 사용할 수 있게 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가운데, 머피는 코워킹 존에 자신의 업무 환경을 하나씩 손 봤다. 거대한 사무용 의자를 시작으로 뭔가 자꾸 구비하던 그가 마지막으로 들인 것은 다름 아닌 기계식 키보드였다(아, 안돼....!). 


"가성비도 좋고, 소리도 그리 크지 않은 타입이라 골랐어! 어때, 이쁘지???" 


머피는 키보드를 내게 보여주며 한껏 기뻐했다. 오, 예쁘네 -라고 대꾸했지만 불안하고 조마조마해 안면 근육이 부분적으로 마비가 되는 듯 했다. 션을 생각하니 마냥 같이 기뻐해 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머피가 드디어 첫 타자를 칠 때 긴장한 채 귀를 기울였다. 사각사각... 오, 다행히 소리가 그닥 크지 않았다. 일반 키보드보다 아주 약간 큰 정도였다. 이 정도면 기분 좋게 느낄 수준이었다. 게다가 션과 머피는 상대적으로 더 친해 보였다. 연령대나 출신 지역도 가까운 편이니,혹시라도 키보드 때문에 갈등이 생기더라도 알아서 서로 잘 해결하겠거니 - 우려를 내려놓았다. 그래, 뭐 알아서들 협의하겠지. 다 큰 애들끼리 ^^; 


콰-앙!!!!!!!

그런 기대는 문 닫는 소리와 함께 와장창 깨졌다. 방에서도 들린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나가보니, 머피가 울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머피의 새로운 키보드로 인해 션이 폭발한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머피가 역으로 션에게 배려와 양해를 요청한 것에 꼭지가 돌아버렸다. 


'이미 한차례 건의했건만 또또 기계식 키보드라니, 얘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건가?' 새로운 기계식 키보드 등장에 좌절감을 느낀 션이었지만, 그래도 용케 화를 누른채 다시 한번 부탁했다. “그 기계식 키보드 사용하지 말아 줘. 필요하면 그냥 내가 일반 키보드를 사줄게!” 목소리엔 짜증이 묻어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놀란 머피는 우선 알겠다며 키보드에서 손을 뗏지만, 이제 막 새로 산 따끈따끈한 키보드를 완전히 포기하기엔 아쉬웠다. 거기다가 뭔가 좀 억울한 기분도 들고. 기계식 키보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그 소리에 예민한 건 션 한 사람뿐이다. 다른 모든 이들이 바꾸길 종용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바뀌면 되는 거 아닌가. 그가 이어폰을 끼거나, 자기 방에서 가서 일하면 될 것을! 이런 머피의 생각에 진하는 당연히 동의했고, 내가 봐도 일리가 있다 생각했다. 진하의 키보드는 내게도 조금은 시끄러웠는데 머피의 키보드 소리에까지 신경질 적으로 반응하는 건 션이 과하게 예민하단 생각이 들었다. 좋았어. "그럼 내가 타이밍 좋을 때 션에게 직접 이야기해 볼게. " 두 사람의 동조에 힘입은 머피는 며칠 후 드디어 그에게 이런 의견을 제시했는데, 여기에 션이 폭발해버린 것이다. 


"It's just FUCKING keyboard!(아니 키보드, 이게 뭐라고!!!!)" 

이렇게 폭발 후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 자신의 방문을 쾅! 하고 세게 닫았던 것이 내가 나왔을 때까지의 상황이었다. 곧이어 짐을 챙겨서 나온 션은 아예 밖으로 나가고, 나는 울음이 가라앉지 않는 머피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우리 문화에서는 절대로 저렇게 문을 꽝 닫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아. 말도 안 되는 상황이야. 금방 너무 놀랐어.. 너무 무서웠다고.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 대해 개인적으론 트라우마가 있어서….” 


나도 유년기에 자꾸 욱하고 화내는 다혈질 아빠로 인해 유사한 트라우마가 있기에, 더욱 안쓰러운 마음에 오랫동안 곁에 앉아 다독였다. 한편으론 막막하기도 했다. 앞으로 어떻게 풀지. 알아서 화해할 수 있을까. 중재해야 하나? 어떻게? 가능한 참거나 갈등을 회피해가는 평화주의자인 내가 직설적이며 감정적인 그 세 사람 사이에서 중재한다라. 상상만 해도 후덜덜하고 기가 빨렸다. 


한바탕 있은 후로 거실은 마치 예약 대관제 공간처럼 돌아갔다. 션이 일하고 있으면 머피와 진하가 나오지 않았고, 머피와 진하가 있으면 션이 나타나질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이 골치 아팠던 나는 누가 있건 거실에 나가지 않았다. 말은 안 했지만 서로 이런 메시지를 내뿜고 있는 것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갈등이 최고조로 달한 집 안은 어색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슬픈 일이기도 했다. 나름의 리스크를 부담하고, 많은 시간을 들여 시작한 커뮤니티가 고작 이런 모습이라니. 한달 뒤면 1주년을 앞두고 있었기에 더욱 만감이 교차했다이런 상태로 계속 살 수 없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집중 타운홀을 제안했다. 


내가 논의를 위한 초안을 준비하기로 했다. 초안 없이 자기 생각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사람들과 논의했다간 그저 감정만 더 상할 게 뻔했다. 하지만 어떤 방안이 모두가 이만하면 공평하다고 수긍해줄 수 있을까. 누구 하나로부터 거절을 당하거나, 누구 하나 실망시키는 데 두려움이 많은 성격이었지만, 더 이상 물러갈 곳이 없었다. 퇴로가 없는 군인처럼 꽤나 비장한 마음으로 질문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기계식 키보드 소리를 싫어하는 사람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 때 싫어하는 사람 한 명을 위해 기계식 키보드를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과연 공평할까?'

'아니면 키보드 소리가 싫은 사람이 이어폰을 껴서 적응해야 할 문제일까? 이어폰을 종일 끼고 작업하는 것도 너무 큰 불편이 아닌가?'

'기계식 키보드 사용이라는 특수한 애호를 어디까지 수용해야 할까? 집 안에서 내가 쓰고 싶

'기계식 키보드라고 다 똑같지 않으니 허용 범위 데시벨 기준을 정해서 허용 가능한 키보드와 허용할 수 없는 키보드 종류를 나눠서 중간선을 찾아야할까? 션의 기준은 좀 너무 과한 것 같아. 머피가 산 키보드 정돈 보통 괜찮다고 할 수준인 것 같은데 - '


완전히 사무실이거나 공공 공유공간이 아닌, 집 안에 있는 고작 네다섯이 함께 쓰는 공유 작업 공간이라는 성격 때문에 초안을 잡기 매우 난감하게 느껴졌다. 앗, 잠깐 - 보통 공유 오피스에서는 보통 어떻게 하지? 일반 사무실이나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기계식 키보드를 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금 갈등에 관여된 멤버들이 외부 코워킹 스페이스에 나가 일하는 경우라면 어떨까? 이들은 그럼에도 기계식 키보드를 그대로 들고 가서 일하려고 들까? 아닐 거란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내 집 안에서 내가 쓰고 싶은 장비도 못 쓰냐?" 라는 게 주장 중 하나였으니까. 거기서 힌트를 얻어 나는 초안을 잡았고, 식구들을 타운홀에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한명씩 나와 소파에 걸터 앉은 이들을 환영했다. 서늘하고 어색하지만 차분하게 시작된 회의를 잘 진행되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휙하고 휘청거렸다. 머피와 진하는 션의 요구가 일방적이다고 비난했고, 션은 머피와 진하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주장했다. 머피는 션이 화낸 방식이 모욕적이라고 느꼈고, 자신의 문화권에서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무례한 방식이었다며 성토했고, 션은 그건 네 문화권의 문제이고 자신의 문화권에선 이게 보통이라며 맞받아쳤다. 


마치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은 산에 작은 불씨가 큰 화염으로 번지듯, 서로의 감정이 폭발했다. 개입해서 막을 새가 없을 정도로 급속도로 악감정이 불타올랐다. 언성이 높아지더니 머피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소파의 구석 자리에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그가 흐느끼며 말했다. "못하겠어. 나 정말 못하겠어."


아....
‘다양성’이니 ‘다문화’니, ‘공존’ 같은 - 그런 가치를 평소 많이 주창하고 다녔는데, 이 가치의 실제를 이렇게 코 앞 거리에서 가까이 들여다보니, 생각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다양성은 어지럽고, 다문화는 대혼돈이며, 공존이란 실제론 전혀 편안하지 않은 것이었다. 개념으로서의 '다양성', '다문화', '공존'이 아닌, 삶으로서 살아내는 이 세 가치는 사실 내가 제일 제일 싫어하는 '갈등'과 영원한 세트라는 것을 그제사 보게 됐다. 


신혼 첫날밤에 신부 얼굴을 처음 확인했는데 너무 못생겨서 서방이 그 길로 집을 나가 (너무 했다...) 돌아오지 않았다던 옛날 설화처럼, 내가 벌린 이 짓의 실제가 아름답지만은 않은 맨얼굴을 보고 너무 놀라 당장 이대로 문을 박차고 나가 멀리 떠나고 싶단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었다. 집 계약이 아직 1년 이상 남아있었다... ㅜ 심지어 내 이름으로. 그렇지 않았다면 이 대환장 파티를 기점으로 나는 떠났겠지만, 모두가 떠나더라도 남아야하는, 스스로 내린 저주를 받아들이며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집중력을 모았다. 밀려오는 피로에 따라 팽팽하하게 선 긴장의 끈 위에서 나는 머피에게 다가가 말했다. 


"머피, 자 봐봐. 괜찮아. 숨 쉬자. 쭉 깊- 이. 너 피곤한 거 알고 그래서 미안한데, 오늘 회의 여기서 끝내지 못해. 조금만 더 노력해보자." 



사진: UnsplashGilbert Pelleg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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