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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센짱 Oct 30. 2022

이상한 가족의 보통의 나날

오전 


아침 8시. 거실에 제일 먼저 도착한 건 나였다. 곧이어 누군가 화장실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린다. 여정이다. 오, 일어났구나. 요즘 우린 매일 아침 8시에 거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늦으면 3만원 빵. 독일에 있는 본사의 근무 시간에 맞춰 일하다보니 생활리듬이 무너진 그녀에게 내가 제안했다. 이왕 먼길(?) 행차해 거실까지 왔는데 바로 헤어지면 서운하니, 짧게나마 운동도 같이 한다. 내가 TV대의 위치를 조정하고 새천년체조 영상을 찾는 동안 여정이 테이블과 소파를 조금씩 밀어내 운동할 공간을 만들었다. "잘 잤어?" 인사를 주고 받은 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운동. 같이 헉헉대고, 킥킥 거리다보니 빠르게 7분이 지났다. 딱 1분이 남겨두고 둘다 고비를 맞는다. 고작 8분 운동인데 고비가 있다는 게 조금 슬프긴 하다. 포기하기엔 서로 면이 안서서 꾸역꾸역 끝까지 몸을 움직인다.
 
흐느적 거리며 고비를 넘기고 있을 때쯤 우리 머리 바로 위에 위치한 방에서 샐리가 원격으로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곧 그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나지만 우리는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는 곧장 주방으로 향해 아침을 준비한다. 따뜻한 차, 그릭요거트와 그래놀라. 보지 않아도 보인달까. 운동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마냥 거실을 원상복귀한 여정과 나는 각각 방으로 향한다. 다시 내가 다이닝룸에 돌아왔을 때 샐리 식사를 거의 끝마친 상태였다. 나는 식기세척기에서 세척된 그릇과 컵들을 꺼내 제자리에 돌려 놓기
 시작했다. 이번 달 주방 관리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뭐 배웠어?”

덜 깨어있는 뇌와는 상반되게 손발은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샐리와 몇마디 주고 받는다. 수업 때문에 일찍 기상한 탓에 평소보다 더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다. 차와 아침 거리를 챙겨와 샐리의 맞은 편에 앉자 그가 자신의 그릭요거트를 권한다. 사악한 가격 때문에 쳐다도 보지 않는데, 먹어보니 꽤 괜찮다. 앉은 채로 장을 보면서 그릭 요거트를 추가했다. 동거인들은 내게 어느 유명 인플루언서보다 더욱 강력하고 실질적인 영향을 끼친다. 


샐리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출근을 준비하러 가자, 이번엔 출근 준비가 다 된 은하가 나타난다. 그는 밥 먹을 틈도 없이 나갈 준비를 한다. 아침 식사 뒷정리를 하면서도 스치는 그의 피곤한 얼굴이 보여 안부를 확인한다. "피곤해보이네." "2시간 밖에 못 잤어." "아이구…" 실내화를 벗고 신발로 갈아신는 잠깐동안 몇 마디를 나눈다. "좋은 하루 보내!" "응, 너도 좋은 하루!" 있는 힘껏의 에너지를 끌어내 굿데이!라고 외치는 그에게 나도 역시 좋은 하루를 빌어준다.


마실 차와 물을 챙긴 나는 다시 내 방 - 내 동굴에 돌아온다.
 흩어지는 집중을 붙잡기 위해 세션이라는 뽀모도로 앱을 열어두고 딱 25분만 써보자고 스스로 다독인다. 거실의 코워킹 데스크에 자리 잡은 여정도 역시 같은 앱을 사용하며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추천인은 나였다. 나는 생산성 툴이나 다용도 기기, 장비들을 적극 활용하고 커뮤니티 내에서 추천하고 전파해오고 있다. 


점심


방문을 여니 아래층 거실에서부터 현아와 빌리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 오늘 볶음밥 대결하는 날이지.
 "여정이랑 점심 먹기로 했는데 같이 먹을 사람?" 현아가 디스코드에 올린 글에 빌리가 합류하겠다고 답장했었다. 중국에서 성장한 현아가 중식을 요리한다고 하니 중식 요리에 자신이 있는 빌리 역시 
볶음밥을 만들겠단다. 우리는 좀 쓸데 없는 데서 경쟁심을 표출하곤 하는데, 이런 요리 경쟁은 늘 반길 수 밖에 없다. 

오늘 요리에 참여하지 않는 나는 미리 앉혀놓은 현미밥을 내놓았다. 현아 역시 계란과 참치를 헌납했다. “혹시 쪽파 있을까? 없으면 없는 대로 하면 되는데..” 먹는 것에 진지한 빌리가 쪽파를 찾았다. 
중국식 볶음밥에 쪽파가 안들어가면 섭한데..... 혹시나, 하는 얼굴로 다른 친구들을 쳐다보고 있을 때 마침 여정이 냉장고를 열고 하나를 쑥 꺼내더니 묻는다. “이거 쪽파 맞지? 대파인줄 알고 샀는데 아닌 것 같더라구. ” “아, 맞아! Yees!!!" 우리는 짧게 환호했다. 냉장고에서 말라버릴 운명이었을 쪽파는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빌리표 볶음밥에 화룡점정을 찍음으로서 쓰임새를 다하였다. 마침 집에 있었던 소피아도 점심에 합류하게 되면서 수저 세팅을 도왔다. 곧이어 두 사람이 요리한 참치양배추 덮밥과 볶음밥이 나란히 놓인다. 우리 다섯 사람도 둘러 앉는다. 딱 봐도 매워보이는 볶음밥을 한숟가락 퍼서 먹어본 현아가 너무 맛있다며 극찬한다. 


현아, 매울 줄 알았는데 딱 좋은 맵기다!

여정 그래? 나한텐 생각보다 더 매운데 하하 빌리 넌? 

빌리 음, 이렇게 맵게 할 의도는 아니었는데. 좀 맵게 됐네! 


우리는 볶음밥 하나를 두고도 우리가 이렇게 다르게 감각한다는 것이 새삼 웃겨 파하하 웃었다. 내가 한숟갈 떠서 먹자, 관심이 나에게 쏠린다. “너는 어때? 매워?” 밥알을 다 삼킬 때까지 조용하게 있는 나의 다음말을 기다린다. “이게 뭐라고 왜 긴장 되지?” 누군가 던진 말에 다들 파하하 웃는다. “아, 음, 맵네. 매운 걸 잘 못먹지만 딱 좋아. 난 스트레스 받을 때 매운 걸 먹어. 불닭볶음면 같은 거.” 나는 고통을 통해 다른 고통을 잊는 나의 스트레스 해소법에 대해 소개한다. 장난과 진지함 사이를 오고가며. 


식사가 끝나고 얻어 먹은 사람들이 뒷 정리를 맡아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오후에는 카페에서 일해볼까 고민하는 내게 여정이 최근에 발견한 카페를 추천한다. “여기 커피 맛있었어! 마침 원두 사러 갈 건데 같이 갈까?” 안그래도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커피가 맛있다니 안 갈 수가 없지. 여경도, 빌리도 따라 나섰다. 해야할 일이 많은 소피아는 집에 남아 일하기로 했다. 


이미 가본 적 있는 여정과 빌리가 앞장 섰다. “여기가 입구 맞아?” 뒷골목으로 가다보니 카페로 이어지는 뒷문이 있다. 혼자라면 가지 않았을 경로다. 3년이나 살았음에도 아직 걸어보지 않은 동네 길이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란다. 카페에 들어서 매장을 슥 구경한 후 다 같이 주문대 앞에 섰다. 결정 하는 데 걸린 시간도, 고른 메뉴도 제각각이었다. 대체로 산미가 있는 원두를 택했지만 디테일이 미묘하게 조금씩 달랐다. “맛 좀 봐도 돼?” 가지 않은 길들에 다들 궁금해 텀블러에 커피가 담겨 나오자 한모금씩 나눠마셨다. 


오후
 

카페인의 힘도 받았겠다, 집에 돌아와 작업을 시작했다. 오전과 달리 오후엔 코워킹 스페이스에 내려와 일한다. 점심을 먹고 나면 딴 생각이 많이 들고 집중력이 흩어진다. 주위에 사람이 있는 편이 더 생산적이라, 오늘 따라 북적이는 거실이 반갑다. 코리빙 멤버 3명과 이제는 동네이웃인 2명의 친구들까지 다섯 명이 오늘의 따로 또 같이 일하는 동무다. 아, 빌리와 현아는 지금 같이 살고 있는 하우스메이트가 아니다. 과거에 같이 살았던 동문들(!)이다. 각자 다른 연유로 이젠 한집 살이를 하진 않지만 서울눅스에서 가까이에 산다. 현아는 3분 거리, 빌리는 한 10분 거리. 


옆에서 여정이 개발 업무를, 대각선에 앉은 소피아가 마케팅 업무를, 마주 앉은 빌리가 사업 운영 업무를 하고 있다. 
오후 4시가 다 되어 화상 인터뷰 일정이 있어 내 방으로 다시 이동한다. 소파에서 일하고 있던 현아에게 내 자리를 넘겨주었다. 미팅은 한 시간 만에 마무리됐다. 다시 거실로 돌아오는 길에 계단에서 일을 마치고 올라오는 소피아와 마주쳤다. “인터뷰 어땠어?” 가볍게 일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고 소피아는 방으로, 난 거실로 갈라졌다. 그 사이 빌리는 PT 받으러 나가고 없다.
 

“날이 너무 좋으니 산책 가려고 하는데, 갈래?” 초가을 볕과 바람이 거실 한켠으로 슥 하니 들어와 산책을 부른다. 나도 모르게 산책을 제안했다. “좋아! 그럼 잠깐 옷만 갈아입고 올게.” 앗, 금세 동행이 생겨버렸다. 이제 진짜 산책을 가야할 당위성이 생겼다. 아마 혼자였다면 산책하기 좋은 날씨라고 생각하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해야할 일에 대한 압박과 게으름 콤보로 산책은 다음으로 미뤘을 거다. 그리고는 아쉬워했겠지. 날씨가 이리도 좋은데 산책 잠깐 할 시간 못 내냐고 스스로를 비난했겠지. 밖으로 나와 걸으면서 산책을 하게 되어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저녁


저녁을 간단하게 먹고 난 후 나도 다시 자리에 앉아 일을 재개한다. 이 시각에 코워킹 존에는 나와 여정 뿐이었다. 저녁에 일하는 사람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건 큰 위로가 된다. 따로 또 같이 각자의 일에 집중한 채 저녁 시간을 보낸다. 머지 않아 9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각에 행복한 표정의 샐리가 돌아온다. 회사에서 막 퇴근해서 왔을 때와 정반대의 얼굴을 하고서. 검도를 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검도가 뭐길래, 저렇게까지 행복해질 수가 있는 걸까. 매일 보면서도 여전히 놀랍다. 샐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여정은 그의 귀가가 그날 업무 종료 시각을 결정하듯 노트북을 덮었다. 


오늘은 둘이 'House Of Dragon(하우스오브드래곤)’ 시리즈를 같이 보는 날이다. ‘왕좌의 게임' 시리즈의 팬인 두 사람은 최근 시작된 프리퀄 시리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같이 보이는 소모임을 만들었다. “이 시리즈가 왜 그렇게 재밌어?” 왕좌의 게임 1화를 보다 그만 둔 내가 신기한 표정으로 묻는다. “다른 작품들은 주인공들이 아무리 역경을 당해도 살아남을 거라는 걸 알고 보잖아. 이건 그렇지 않아. 아무리 중요했던 인물들도 가차없이 죽거든. 예측할 수 없는 전개 때문에 판타지인데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고 몰입하게 돼.” 두 사람의 열정적인 설명에 감명(?)해 나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그들 옆에 앉았다. 여정이 사온 떡복이와 순대를 나눠먹는다. 


"우와아- 멋있다!!!" 여주인공이 멋지게 용을 타고 등장할 때 함께 환호했으나 잔인한 장면이 나오자 극렬하게 반응이 갈렸다. “굳이 저 장면이 들어갈 이유가 있었나?” “무슨 소리야! 그 장면이 있어서 좋았는데?” 그러는 사이 시간이 후루룩 가고 곧 자정이 되었다. 일찍 출근해야 하는 샐리가 먼저 자리를 떴다. 야근을 하는지 은하의 귀가는 아직이고, 친구들을 만나러 한껏 차려입고 이태원에 나간 소피아 역시 당장 집에 들어올 것 같지 않다. “그만 - 자러가자!”이 말을 먼저 꺼낸 것은 나였다. 2년전에만 해도 TV를 보다가 소파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리곤 하던 내가. 혼자였다면 분명 그날도 위험했다. 소파에 축 늘어진 상태에서 괜히 아쉬운 마음에 뭐 볼만한 거 없나 뒤적뒤적 더 찾아봤겠지. 함께 있을 때 나는 왜인지 더 부지런하다. 


여정이 욕실을 쓰는 동안, 나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방 청소를 한다. 밤 11시에서 12시 사이에 종종 동시에 욕실 이용을 하려는 경우가 있다. 오늘 같이 같은 활동을 하고 난 날이면 특히나 그렇다.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이제 내 차례다. 오래된 집이라 화장실 문을 꼭 닫으려면 끼기긱하고 소리 나는 걸 피할 수 없다. 최대한 문고리를 천천히 돌려 소음을 최소화한다. 자정부터 다음날 오전 8시까지는 모두가 잘 잘 수 있도록 설정해둔 매너타임이기 때문에 더욱 조심한다. 


양치질을 하며 내 치약 칸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누구의 칫솔이냐 넌...." 각자의 칫솔/치약을 구분해 꽂아두는 통을 쓰고 있는데 며칠 전부터 옆 칸의 칫솔이 자꾸 내 자리에 침범해 있다. 별 거 아닌데 신경 쓰인다. 보다보니 그 칫솔의 솔 상태까지 신경쓰인다. 오래 쓴 탓에 엉망이다. ‘칫솔 이렇게 쓰면 안 좋다는데. 말해줄까 말까. 말해줘도 괜찮을까.’ 쓸데없는 고민을 한다. 에이, 혹시 잔소리로 들릴 수 있으니,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 


화장실 조명 스위치 역시 천천히 누르고, 내 방으로 완전히 들어올 때까지 조심스러움을 유지한다. 내가 얼마나 조용하게 움직이는지, 얼마나 배려심 넘치는 사람인지에 대해 은밀한 자부심을 느끼면서. 내 방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은하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고생했어, 라는 말을 해주고도 싶지만 밤은 각자의 시간. 꾹 참고 삼킨다. 


침대 위에서 미타임(Me Time)을 가진다. 책을 몇 장 읽으면서 오롯이 나만의 공간감을 느낀다. 오늘 나도 모르게 했던 선의의 거짓말은 없었는지 살피면서 ‘우리’에서 ‘나’를 떼어낸다. 충분히 혼자가 되는 것으로 함께 하는 시간이 기쁘다. 함께의 시간을 넉넉했기에 혼자의 시간 역시 반갑다. 함께여서 혼자가 괜찮고, 혼자여서 함께인 것이 즐거운 그런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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