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커뮤니티 빌딩의 8할을 차지하는 큐레이션
무한반복을 부르는 플레이리스트. 요즘 내 고민을 점집보다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듯한 독립서점. 내 취향에 맞게 잘 큐레이션된 서비스를 만나면 마음이 절로 편해진다. ‘믿고’ 보고, 듣고, 사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커뮤니티 역시 큐레이션이 중요하다. 커뮤니티에서 큐레이션이란 결이 맞는 사람들로 모이게 하는 것이다. 큐레이션이 잘된 커뮤니티의 가장 큰 미덕은 ‘믿고’ 마음을 열게 한다는 점이다. 불안이나 두려움 없는 상태는 서로 더 빠르게 연결되도록 한다.
“나는 사실 혼자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거든. 근데 서울눅스에서 생각보다 내가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어. 이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야. 한 명 한 명 다 좋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거웠던 덕분이야.” 매튜는 이렇게 고백했다.
앞선 장에서도 이야기했듯 교집합의 삶에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한 세트로 온다. 즐거움만 있는 동행이란 없다. 교집합의 괴로움보다 즐거움이 더 크게 만들고, 또 그 즐거움에 집중할 수 있게 하려면 서로 좋아할 만한 사람들을 잘 모으는 것이 필수불가견이다. 물건을 꼭 어딘가에 덤벙거리고 놓고 다니는 S의 행동의 결과는 정돈된 공간을 선호하는 내게 스트레스가 될 수 있지만, 그저 ‘으이구!’ 하고 넘어갈 수 있게 하는 건 그에 대한 내 애정이 더 크기 때문인 것처럼. 좋아할 만한 사람을 모으고 서로가 좋아할 만한 발견의 계기를, 사건들을 만드는 것이 커뮤니티 가드닝의 핵심이다.
규모가 작을수록, 공유하는 공간과 접점이 많을수록, 커뮤니티 형성 초기 단계일수록 큐레이션은 더욱 중요하다. 각자가 서로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결’과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야 어떤 방향으로든 커뮤니티가 함께 힘을 모으고 협력하여 성장할 수 있다.
결이 맞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우리는 멤버 선발 절차를 거친다. 사람들이 지원서를 제출하면, 현재 살고 있는 멤버들이 함께 열람하고, 의견을 수렴하여 1차 결과를 정한다. 그 뒤 인터뷰를 거쳐 최종 확정을 하는 방식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가입신청서를 받는다. 초반에 7여 개의 기초적인 질문으로 구성되었던 신청서의 현재 질문 수는 총 20개 이상이다. 내용이 부실하면 보강해서 작성해줄 것을 요청한다. 대개들 정성스럽게 써주는데 역대 많이 쓴 사람은 내가 대학교 수시 전형에 작성한 지원서보다 더 디테일하게 잘 썼다. 그땐 대학교 입시니까 했지만, 솔직히 지금 나보고 우리 커뮤니티 가입 지원서 쓰라고 하면 이렇게까지 못 쓸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커뮤니티에 신청서를 내는 사람들 모두 존경스럽고 고맙고 황송하다.
신청서는 나뿐만 아니라 함께 살고 있는 이라면 모두가 열람 가능하며 의견을 줄 수 있다. 다 같이 볼 때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 누구를 어떤 이유로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지에 대해 의견 교환을 하며 이 커뮤니티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같이 만들어가는 기회다. 이렇게 의견 수렴을 통해 면접 진행 여부가 결정되면 인터뷰는 온라인으로 진행된다. 주로 1시간 내외 길면 2시간까지 걸린다. 어떻게 할 것이라는 미래 약속형 문장보다 과거에 실제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질문한다. 사례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요청하고 생각은 최대한 깊은 곳까지 파보기 위해 '왜'라고 지겹게 묻는다.
여러 경험이 쌓이면서 어설프게 가지고 있는 가설들을 내려놓은 결과다. 이런 것들 말이다.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 안다고 착각하지 않는다.
스타트업에 다닌다고 유연하고 커뮤니케이션에 능한 사람일 거라 미리 짐작하지 않는다.
해외 생활을 많이 했다고 다름에 대한 포용력이 높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인터뷰 진행 후에는 이틀의 시간을 가져 객관성을 찾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커뮤니티의 의견을 수렴해 최종 결정을 내린다. ‘나쁘지 않을 것 같다’가 아니라 ‘정말 좋다, 만나고 싶다’는 확신이 들어야만 통과다. 두 단계를 거치면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 같이 생활하기에 무리가 없는 사람인가. 이 질문은 다음 세 질문으로 더 쪼갤 수 있다. ‘공용 공간을 깨끗하게 사용할 것인가. 커뮤니티 약속을 잘 지킬 사람인가. 그 약속에 명시되지 않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매너를 갖추고 있는가.’
둘째, 다양성에 대한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 집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산다. 마찰은 당연히 발생하고 이런 마찰에 상호 간에 당황스럽고 놀라는 건 자연스럽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당황한 감정을 상대에 대한 판단으로 연결 짓지 않는 것. 이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과 다른 문화를 가진 개인 또는 그룹과의 사이에서 겪은 갈등 경험에 대해 묻는다. 무엇을 배웠으며, 어떻게 해결했는지까지.
셋째, 매력적인 사람인가. 자주 보고 싶고 가까이하고 싶을 만큼 흥미로운 사람인가. 그로부터 커뮤니티가 배울 수 있는 경험이나 지식 또는 열정과 태도, 관점 등이 있는가를 확인한다. 둘 중 더 선호하는 쪽을 고르자면 후자가 더 중요하다. 그 편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모여있건 서로의 성장에 더 도움 되는 자극을 준다. 함께 성장하는 커뮤니티를 지향하기 때문에 대학교 학부생은 잘 받지 않는 편이다. 그들과 일하는 사람들이 당면하고 있는 고민의 결은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합류에 성공했던 몇몇 학부생은 그 틀을 한참 벗어난 아웃라이어들이었다. 대학생 맞으세요?라고 물어보게 되는 그런 이들. 그런 식으로 하나의 틀에 갇히지 않는 비전형적인 사람이라면 더욱 환영이다.
넷째, 기여할 사람인가. 커뮤니티의 가치와 방향에 강력하게 동의하고 적극적으로 기여할 사람이라면 설사 매력이 좀 떨어져도 괜찮다. 커뮤니티에는 수많은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가 일어난다. 감사하게도 주는(Give)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들의 기여는 마치 숲에 내리는 비처럼 커뮤니티를 활기 있고 풍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누구든 늘 주기만 하면 지치기 마련이다. 작은 커뮤니티일수록 쪽쪽 받아먹기만 하는 테이커 한 명의 파급력은 어마 무시하다. 자칫하면 정의 창고가 빠르게 말라버리게 할 수 있다. ‘서울눅스에서 당신은 어떻게 기여할 계획인가요? 당신이 합류하면 우리는 뭐가 좋을까요?’ 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묻는 이유다. 과거 다른 그룹에서는 어떤 기여를 했는지도 확인해 기여의 약속이 공수표가 아닌지를 가늠한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이런 큐레이션 과정에서 신청을 반려하거나, 같이 살던 사람들과 헤어지기도 하냐고 묻는 질문도 받는데, 물론이다. 반려는 꽤 많이 했고(죄송합니다 ㅠㅠ), 같이 살던 식구들과도 몇 번 이별했다. 요즘엔 기본적으로 눅스멤버상(?)에 맞는다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반려를 결정하는데, 굳이 꼽자면 가장 많은 반류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인 것 같다.
신청서 내용이 너무 부실한 경우. (부실하지만 좋은 씨앗이 보이면 보강 요청을 하고 이에 대답이 없으면 커뮤니케이션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고 반려)
커뮤니티보다는 집 자체 (인테리어, 위치, 편의성 등)가 주요 지원 동기로 보일 때
함께 하던 멤버와 이별한 경우는 약속한 시기보다 더 빨리 헤어지기 보단 약속된 멤버십 기간 이후까지 연장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주로 지금의 기준과 과정이 갖춰지기 전에 합류했던 멤버들과 겪어야 했던 성장통이었다. 주로 솔직하고 상호 존중과 배려라는 소통의 원칙을 기대하기 어려웠거나, 커뮤니티와의 약속 등을 번번이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별을 결정하게 됐다. 담담하게 써내려 가니 쉬워보이지만, 절대로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그들의 당시 아쉽다고 생각된 면모들이 커뮤니티의 안전감을 헤친다는 판단으로 어렵사리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 외에 그들 모두에겐 아름다운 면들이 많았다.
사람 고쳐 쓰는 게 아니라 하지만, 한편 고치면서까지 어딘가에서 살거나 소속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야 조심하다가도 편안해지면 결국 본연의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애초에 그러는 장소가 '집'이고. 그래서 큐레이션이 중요하다. 그 큐레이션의 책임은 서로가 나눠진다. 인터뷰에 참여한 지원자에게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대화하면서 당신이 원하는 것이 정말로 우리 같은 커뮤니티가 맞는지, 가늠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다. 서로 자연스럽게 존재할 때, 그것만으로 기쁜 관계에서 시작하는 게 서로에게 득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고쳐 쓰는거 아니라는 표현은 한편 오해를 일으키기 쉽다. '고친다'는 말이 옳게 작동해야 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고장나 있는 상태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정답이란 게 있고, 정답에 맞게 수정해서 써야 할 사람이 있다는 식으로 읽히면 곤란하다. 그저 관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로움이 커 변화가 필요한데 그 변화를 일으키거나, 그 상태를 수용하는 데에 그 관계에 참여한 이들의 총합 에너지가 부족하다 정도로 받아들이면 어떨지.
고로 우리가 신청을 반려해야 했던 사람들, 내가 어렵게 느낀 과거의 몇 멤버들, 그중 종래는 헤어지게 된 멤버들 역시 어떤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다만 나의 품이, 우리 커뮤니티의 그릇이 딱 우리 분수만큼의 사이즈였을 뿐이다. 그래서 헤어져야 했던 멤버들을 생각하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안이 씁쓸해진다. 지금이라면 우린 어쩌면 그때 포기했던 능선을 같이 넘었을 수 있는데, 지금쯤 우린 더 좋은 풍경을 즐기며 즐거운 여정을 함께 하고 있었을 수도 있는데 - 그런 생각을 이따금 하며 그들을 그리워한다.
한들 어쩌겠는가. 씁쓸함을 이기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과 갈등 해결 능력 높은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 아니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