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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도은 Jun 07. 2016

우리는 왜 주택에 살지 못할까

3. 임대강요

금으로 된 주춧돌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는 돈이 들어간다. 그것이 매매대금이건, 프리미엄이건, 보증금이건 개인이 마련할 수 있는 가장 큰 돈이 들어간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월세로 집을 빌린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택을 마련하는 자체가 비용을 소모하는 행위다.


 그뿐 아니다. 집은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천장보다는 많은 기능을 한다. 음식을 덥히고, 몸을 덥힌다. 밤에는 불을 켜야 하고 여름에는 시원해야 한다. 유/무선 인터넷도 필요하다. 열거한 모든 것은 비용으로 고스란히 전환된다. 어찌 보면 이 소모를 최대한으로 줄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활동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절약은 한계가 있다.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까지 줄일 수는 없다. ‘주택의 존재’ 자체가 그것이다. 소모를 줄이지 못한다면 재산을 수호해야 한다. 이 주택과 주택을 둘러싼 자금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장 큰 재신일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부동산 가치를 매겨보고 이에 신경을 쓴다. 그런데 이것이 방어에서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임대강요


 사람들은 거주에 들어가는 목돈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더 크게 불리고자한다. 일면 당연한 활동처럼 보이지만 이 현상은 집과 인간을 멀게 만들고, 주택의 역할을 삭제한다. 이 현상에서 부동산과 부동산 자금의 분리가 파생되고 우리는 수익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방영해 반향을 일으킨 바 있는 한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임대업이 꿈인 나라’였다. 짐짓 세태를 욕하려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따져봤을 때도 여러 조건과 지금의 경제 구조는 임대업에 최적화된 듯하다. 아니, 오히려 이를 강제하는 듯하다.


 우선 금리가 낮다. 저축 이자는 재미가 없는 반면, 대출 이자는 빌리는 이에게 유리하다는 이야기다. 금리가 낮다 보니 은행은 많은 돈을 빌려주려고 한다. 대출의 기준은 후하다. 지역기준 주택 매매가의 70~80퍼센트를 저리의 대출로 충당할 수도 있다.



 반면 물가는 높다. 물가에는 ‘임대료’가 포함된다. 따라서 임대료도 비싸다. 서울 가로수길의 월 임대료는 10년 만에 크게는 5배가 넘게 올랐다. 건물이나 주택을 가진 사람들, 혹은 어느 정도의 자금을 가진 사람들은 싼 이자로 돈을 빌려 높은 임대료를 취하는 방식에 구미가 당기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전세유감


 주택에서는 이 때문에 사실상 전세 물건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전세와 상관이 없어보일 수 있지만, 전세에도 엄연히 정기적인 임대료가 존재한다.


 전세 보증금을 은행에 예치하거나, 어떤 식으로건 투자해서 보는 이자가 바로 그것이다. 보통은 보증금 예금 시의 은행이자를 월세로 생각하는데, 현재의 금리가 현저히 낮다보니 임대인들은 그 금리보다 높은 월세, 혹은 그와 비슷한 반전세로 그 형태를 옮기고 있는 추세다. 반대로 임차인들은 전세를 선호하게 돼 기형적으로 높은 보증금의 상한이 형성되고 일부 지역에서는 매매가를 상위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부동산 시세나 금리 등 경제의 작은 개념들은 선후관계를 가지고 서로를 간섭하고, 특히 기준금리는 다른 현상들의 주요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각각의 독립된 요인으로 판단하는 것은 거친 생각이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는 저금리와 고물가는 피부로 느껴지며, 실제로 우리 경제생활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만 파악하여 내용을 잇고자 한다.





상황과 상상들


 이 상황에서 주택 구매의 전체 금액을 스스로 충당할 수 있는 구매 예정자는 혹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주택으로 수익을 올리거나, 혹은 이 주택의 가치가 향후 하락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또한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살면 되는 거지 뭐.’

 그렇다. 살면 된다. 주택을 구매해서 수익을 올리지 못하더라도, 그 임대업에 대한 유혹과 강요에 다소 부응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건물에서 삶을 이어가면 된다. 그것은 주택과 토지 본연의 ‘의식주’에 대한 가치를 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주택 자금의 일부나 전부를 은행에서 대출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온다. 이 상황의 구매 예정자 또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것으로 수익을 올리거나, 혹은 이 주택의 가치가 향후 하락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또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자를 갚지 못하게 되면 큰일이다.’

 바로 이 생각이 문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매자는 매각 시세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금리가 낮을 때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금리에 따른 이자를 갚아 나갈 수 있게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담보가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더해 투자를 해 놓은 재산의 가격이 내려가거나 감가상각의 위에 놓여 그 가치를 소모한다면 실로 이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구매자는 자연스럽게 가격이 규격화되어 있고, 향후 물가에 맞춰 그것이 상승할 기대에 부응하며, 그것을 지킬 강력한 카르텔과 사회 저변이 존재하는 물건을 찾게 된다. 비로소 ‘팔기 위해 집을 사는’행위를 시작하는 것이다.





마리 앙투와네트


 '살기 위한 집'에서 '팔기 위한 집'으로의 이행이 일어나며 자연스럽게 주택의 역할은 삭제된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안정감있는 보금자리가 위협받는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주택의 매각 후 이익에 종속되며 집과 멀어지는 것이다. 이쯤에서 개념없는 질문 하나가 필요하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 


 사실 이는 프랑스 혁명군이 날조해 악의적으로 퍼뜨린 말이라고 한다. 마리 앙트와네트는 공분을 샀고, 결국 처형됐다. 그런데 전술한 상황에서도 비슷해 보이는 질문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럼 싼 집을 찾아서 대출 없이 살면 되잖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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