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편
지난 학기의 학생, 티아포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510시간 무료 영어과정을 수료하고, 지금은 커피 바리스타 과정을 듣고 있었다. 조만간 학교 내의 카페에서 실습을 하게 될 텐데 아직 영어가 자유롭지 않은 그는 걱정이 된다고 했다.
티아포는 버마의 여러 소수 민족 중의 하나인 ‘몬족’(The Mon)이었다. 내가 몸 담았던 이민자 영어과정에는 주로 카렌족 (The Karen)이 많았고, 그다음으로 몬족이 있었다. 그들은 정부의 박해를 피해 호주로 난민을 온 사람들이었다. 몬족이었던 티아포도 가족들과 함께 호주로 와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린아이 둘과 부인과 함께 새로운 삶을 찾아 멀리 호주까지 온 티아포. 정말 아무런 가진 것도 없이 호주란 나라에 와서 살게 되었지만 별로 걱정할 건 없어 보였다. 난민으로 인정이 된 순간부터 티아포는 월세와 생활비를 한 달에 1500불 이상 지원받았다. 게다가 정부에서 주는 주택에서 거의 공짜로 지냈고, 교통비가 비싼 호주에서 티아포는 할인카드로 3분의 1 정도의 요금만 내면 되었다. 정부에서 영어교육도 무료로 시켜주었고, 직업교육도 시켜줬다.
아이들 교육비는 당연히 무료였고, 사교육 같은 게 없는 호주에서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놀고 건강하기만 하면 되었다. 가끔 아프면 종합 병원은 공짜고, 개인 작은 병원들도 무료인 곳이 많았다. 물론, 대기 시간이 좀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돈 한 푼 안 내는 걸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영어가 부인보다 조금 나은 티아포는 앞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지만 그래도 아직 큰 부담은 느끼지 않고 있는 듯했다. 매일 조금씩 배워가는 바리스타 과정이 재밌고 뿌듯한 것 같았다. 다만 손님을 상대하고, 매니저와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기 위해서는 영어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부담은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부인은 누군가의 소개로 잠시 호텔의 하우스키핑, 즉 객실 청소 일을 일주일 정도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아직 영어가 걸림돌인 것 같았다. 청소만 하면 되니 영어를 못해도 별 문제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매니저의 지시나 전달사항을 잘 알아듣지 못해 가끔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나는 직업과 관련하여 꼭 알아야 하는 표현들이 담긴 영어교재를 한 권 주며, 힘들거나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했다.
호주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순수 이민자들을 돕는 것도 보람되지만, 이런 난민들을 돕는 것은 내겐 더욱 의미가 컸다. 그때껏 관심을 가져볼 생각조차 안 했던 무지했던 내게 , 많은 것을 일깨워주고 가르쳐주는 경험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티아포와 같은 반이었지만 더 늦게 들어온 팔레스타인 난민 파티마. 그녀의 나이는 60이 넘었을 것으로 보였다. 파티마는 일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냥 남편과 조용히 생을 보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파티마는 종종 팔레스타인 음식이라며 이것저것 특이한 요리들을 직접 만들어 수업에 들고 오곤 했다. 그렇게 그녀는 늘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더니 언젠가는 나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였다. 공과 사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자 노력했던 나는 늘상 그랬듯이 적절한 핑곗거리를 대어 사양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계속해서 묻고 또 물으며, 내가 시간 되는 때 언제든지 좋다며 언제 시간이 가능하냐고 묻는 걸 더 이상 못 간다고 하기는 너무 미안했다.
결국, 어느 날 초등 저학년이었던 큰 아이와 함께 가 보기로 했다. 아이가 다른 문화를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리란 생각도 했지만, 실은 아이와 가면 빠져나오기가 수월하리라 생각했던 것도 치사하지만 사실이었다.
파티마의 집을 찾아가는 내내, 시내에서 아주 가깝고, 무척 비싼 어커너(O’conner)란 동네에 사는 게 맞기는 맞는 건지 주소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결국은 그 동네 언저리에 아주 쬐끄맣고 오래된 낡은 집 정도 되는가 보다 하고 짐작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파티마의 집에 도착해 보니 아주 넓은 마당이 있었고, 오래되긴 했지만 튼튼한 방 세 개의 벽돌집이었다. 파티마와 남편만 살기에는 아주 넓어도 지나치게 넓어 보이기까지 했다.
정부 주택은 싼 동네에만 몰려있는 게 아니라 동네와 상관없이 골고루 퍼져 있다더니 사실이었다. 정말로 캔버라의 정부 주택은 오래된 집만도 아니며, 동네가 싼 곳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부 주택 관련 부서에서 일하는 친구가 언젠가 캔버라는 부촌 빈촌을 일부러 형성하려고는 하지 않는다더니 정말인 것 같았다. 정부 무상주택이 정말 캔버라의 곳곳에 고루 분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우리를 위해 파티마는 팔레스타인식 샐러드, 빵, 후무스 (Hummus;빵 따위를 찍어먹는 콩을 갈아 만든 소스) 등을 내놓았다. 파티마의 후무스는 시중에서 사 먹는 것보다 더 담백했다. 마치 가게에서 파는 김치와 집에서 만든 김치가 다르듯이 가게에서 사 먹던 후무스 맛과는 확연히 다른 집에서 엄마가 만든 듯한 후무스의 맛이 느껴졌다. 샐러드는 레몬과 올리브유가 베이스가 된 것 같았는데 한입 먹는 순간, 과거 배낭여행 다닐 때 '이스라엘'의 한 가정에서 맛보았던 샐러드 맛이 그대로 떠올랐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샐러드 맛이 비슷하다니... 너무 가슴이 아파왔다. 언젠가 북한에서도 김치를 먹으면서 이런 슬픈 감정이 들까 싶었다.
파티마는 직업도 없고, 앞으로도 직업을 구할 수 있을까 싶은 나이였지만 얼굴엔 한 톨의 근심도 보이지 않았다. 근심이 있었다면, 호주에서 살아갈 걱정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국과 이스라엘의 상황이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티아포와 파티마를 보면서 호주가 참 살기 좋은 나라구나 싶었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새로운 곳에서 둥지를 틀고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나라... 정말 천국의 나라 같았다. 물론, 이들에 대한 관대한 처우에 관해 반대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영원히 인권과 평등을 중시하는 목소리가 주류를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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