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왔다. 2월 27일에.
"안녕하세요 선생님. ㅇㅇ이 엄마 소개로 전화드렸습니다."로 시작하는 한 학부형이었다.
그녀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정말 친한 친구엄마에게 내 얘기를 예전에 들었고, 왠지 자신의 아이가 나를 만나면 꼭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저학년 아이는 인터뷰조차도 하지 않으니 아이가 5학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단다. 그렇게 그녀는 1년이 넘게 기다린 후 5학년이 되는 3월 이틀 전에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의도치 않게 나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분을 너무나 오래도록 기다리게 한 것이 미안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날 인터뷰를 보자고 했다. 나는 주로 성인만 수업하지만 아이들은 다른 사람은 가르치기 힘든 경우에만, 즉, 다른 곳에서는 공부를 할 수 없어야 내가 맡아서 가르친다. 그러니 그 아이가 다른 곳에서도 공부할 수 있는 "평범"한 아이면 내 학생이 될 수 없는 거였다.
잠시 아이에 대해 상담을 받고자 왔던 그 엄마와 아이의 상담은 무려 2시간이 넘도록 진행되었다. 아이의 상담으로 시작해서, 엄마의 얘기, 그리고 아빠와 아이의 오빠까지... 가족 상담이 되어버렸다.
아이의 아빠는 대한민국 최상위권의 엘리트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평생 단 한 번의 실패도 겪지 않았다. 하지만 코로나로 생애 최초로 직업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닥쳤고 의도치 않게 직장에 나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이의 교육을 뛰어난 머리의 아빠가 맡으면서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고 했다. 아빠는 칼같이 정확하게 계획해서 모든 걸 실패 없이 성공적으로 해내는 대한민국 대표적인 스카이 장학생 스타일이었고, 그 아이의 오빠도 현재 겉으로 보기에는 아빠와 성향이 너무 비슷했다.
그런데 이에 비해 엄마는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예술가였다. 문제는 M이 자라면서 더욱 엄마와 비슷한 성향을 보이기 시작한 거였다. 평소에 아빠는 자신과는 다른 엄마의 여러 성향이 거슬렸었던가 보았다. M이 아주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는 아이라고 낙인찍은 아빠는 엄마까지 같이 묶어 누구를 향한 비난인지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집안에 너 같은 사람은 하나로 충분하다고!...." 이야기가 이즈음에 달했을 때 엄마는 참았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신은 딸이 대부분의 아이들과 다르긴 해도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빠는 딸아이를 '문제아'로 여긴다. 아빠는 딸에게 학교 우등생들이 당연히 하듯이 학습한 내용을 노트에 간결하게 정리하고, 실수는 정확히 파악해서 같은 실수는 하지 않도록 오답노트를 만들어 정리해야 한다고 했다. M의 오빠는 너무나 그걸 잘하는데 M은 노트 정리는 할 생각도 하지 않고, 수학도 영어도 계속 '실수'해서 틀리고, 너무 게으르며 가르치는 사람의 말도 '집중해서 듣지 않는다'며 아빠에게 끊임없이 혼난다고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런 식으로 공부할 거면 아예 학교를 그만두라고까지 했단다. 당연히 아이의 스트레스도 극에 달했을 것이다. 아이의 몸이 반쪽이 될 정도로 살이 빠져 병원을 방문했지만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엄마를 잠시 내 보내고 아이에게 영어 읽기 테스트를 해보았다. 아이는 영어 사립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해외에도 정말 많이 체류했던 경험도 있고 하니 엄청나게 영어에 노출이 되었을 것이고, 외국인 선생님 수업도 많이 들었을 것이었다. 그런 아이에게 쉬운 유치원생이 읽을 법한 책을 줬는데... 아이는... 읽지 못했다! 아이가 처음 들어왔을 때의 인상은.. 약간은 두려움이 깔려있었고 표정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말을 했을 때는 지능이 낮다거나, 사회성이 결여되었다거나 하는 인상은 전혀 받지 못했다.
"학교에서 매주 단어 시험을 보거든요. 그 단어들을 제가 보면 쉬운 것도 있지만 정말 어려운 것도 있는데 그걸 거의 백점을 받아와요. 그런데 백점 받은 그 단어들을 시험 본 후 제가 다시 물어보면 정말 하나도! 기억을 못 해요. 당연히 읽지도 못하고요. 그런데 어떻게 시험을 백점을 받는지 모르겠어요."..."선생님, 저는 정말 M이 공부 잘하기를 바라거나 하지 않거든요. 전혀요! 그냥 영어를 읽을 수만 있으면 좋겠어요..."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본 이 아이는 분명 난독증이 있었다. 짐작했던 대로 한글도 익히는데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고 했다.
난독증은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난독증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는 있지만 원래 가지고 태어난 두뇌구조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지 않은가? 엄청난 노력과 훈련으로 뇌의 부족한 영역을 조금 더 활성화시켜 줄 수만 있는 거다. 아니면 다른 회로를 통해 자신만의 방법을 빠른 속도로 훈련하는 것이거나. 한글 난독, 영어 난독, 이렇게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한글을 배울 때 아주 힘들었다면 영어는 그것에 몇 곱절은 더 힘들다. 서양에서는 난독증 아이들에게는 학교에서 배우는 외국어 수업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게 해 주는 학교들이 많다. 바로 그 이유도 외국어를 익히는 게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지 알기에 그런 것이다.
이런 M을 결국 내가 맡아서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종종 경과보고를 엄마에게 많이 해 드렸는데 가끔 M의 엄마는 "어머, 그건 저랑 똑같네요?!" "어머, 저도 단어를 그런 식으로 외워요!"... 이런 얘기들을 했다. 그리고 나는 이 아이의 엄마도 생활에 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경미한 난독증의 두뇌를 가졌을 거라 짐작했다. 부모가 난독증이 있으면 그 아이들 중 50퍼센트는 비슷한 난독증의 특징들을 보인다고 하니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인구의 5명 중 한 명은 난독증상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 주변에 (자신이 자각을 못할 정도로 경미하다 해도) 난독증의 두뇌를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흔하기도 하다.
나는 안경을 써야 하는 '시각장애인'이지만 아무도 나에게 어떤 낙인도 찍지 않는다. 심지어 나조차도 내가 시각장애인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사회가 '눈이 나쁘지만 안경을 써서 바로 잡을 수 있는 정도는 괜찮다'고 포용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독증 스펙트럼은 왜 낙인을 찍는가? 스펙트럼의 언저리에 있는 사람조차도 내가 '그 단어'를 자신과 조금이라도 연결시킬까 철저하게 방어막을 치기 바쁘다. 지금껏 내가 만난 한국인의 대부분은 '그 단어'에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서 (제 1화에서 썼던 것처럼) M의 엄마에게도 '그 단어'를 쓰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는 엄마가 먼저 '그 단어'를 썼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그 단어'를 쓰지 않고 온 진심을 담아 설명했다.
이 아이는 아마도 정말 창의적인 아이일 것 같다. 아이가 글을 읽지 않고 귀로 듣거나 이미지로 보거나 몸으로 직접 체험하면 정말 디테일까지 잘 이해하고 기억하지 않느냐. 정말 많은 이 세상을 바꾼 사람들은 M과 비슷한 두뇌를 가졌다. 이 아이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다. 엄마가 이 아이를 평범하게 만들려고 하면 이 아이의 삶은 정말 불행해질 거다. 모든 사람에게는 장단점이 있는데 M은 남이 가지지 못한 엄청난 장점이 있고,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걸 못 가진 약점이 있다. 모두가 지옥으로 뛰어들어 아이의 약점을 평균으로 만드는 데 올인할 것인가, 약점을 어느 정도만 보완하면서 장점을 더욱 강점으로 만드는데 도움을 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꼭 기억해야 한다. 이 아이가 절대! 게으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만 기계적인 암기는 이 아이의 취약점일 뿐이고 자의성이 큰 특징인 문자로 학습하는 것은 M에겐 고역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게 M은 3월부터 나의 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M은 글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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